반동세력 타격!… 저우언라이가 기획하고 마오가 승인한 정치 학살
송재윤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
1970년 “일타삼반운동” 당시 비투당하는 피해자들의 모습. 사진 속 피해자의 목에 걸린 팻말엔 “삼반분자 주자파, 반군세력의 검은 배후 왕광빈”이라 적혀 있다./공공부문
송재윤의 슬픈 중국: 문화혁명 이야기 <54회>
문혁의 광풍 속에서도 1970년대가 밝았다. 중국현대사에서 1970년대는 천번지복(天飜地覆)의 격변을 예고하고 있었다. 굵직한 사건만 몇 가지 짚어보자.
1971년 9월 13일 중공중앙의 2인자 린뱌오(林彪, 1907-1971)의 일가족이 타고 있던 비행기가 몽고와 소련 접경에서 추락한다. 1972년 2월 21일-28일 닉슨은 베이징을 방문해서 마오쩌둥과 접견하는 세계사적 이벤트를 연출한다. 1976년 1월 8일 오전 방광암으로 투병하던 국무원 총리 저우언라이가 77세를 일기로 숨을 거둔다. 4월 5일 청명절을 맞아 대규모 군중이 톈안먼 광장에 몰려와서 저우언라이를 추모하며 문혁의 광기를 규탄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인다. 이를 빌미 삼아 사인방(四人幇)은 덩샤오핑을 다시 축출한다.
1976년 9월 9일 0시 10분 마오쩌둥이 사망한다. 바로 다음 달 사인방이 전격 체포되면서 문혁은 공식 종결되지만, 1978년 12월 말이 되서야 덩샤오핑은 최고영도자의 지위에 오른다. 1979년 1월 29일 덩샤오핑은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 도착한다. 이로써 30년 간 지속된 중국의 고립주의가 막을 내린다. 1979년 중국공산당은 마오쩌둥 집권기 27년의 유산을 땅에 묻고 실용주의 노선의 깃발 아래 새로운 경제혁명의 대로로 나아갔다. 덩샤오핑은 “맨발로 미끄러운 돌을 살살 밟으면서 강을 건너는” 경제개발의 대혁명을 개시했다.
1970년대의 서막, 일타삼반 운동의 개시
1970년대는 그렇게 국가운영의 기본 철학이 바뀌는 격변의 시대였지만, 1970년대의 첫 해 중국은 여전히 문혁의 광풍에 휩싸여 있었다. 1970년 벽두부터 수백만을 조사해서 수십만을 체포하고 많게는 10-15만 명의 “반혁명분자”들을 처형한 이른바 “일타삼반(一打三反) 운동”이 전개됐다. 저우언라이가 기획하고 마오쩌둥의 승인 하에 중공중앙이 추진한 이 운동은 또 한 번 중국의 비판적 지식인의 씨를 말리는 잔혹한 숙청의 드라마였다.
1970년 1월 1일 <<인민일보>>, <<홍기>>잡지, <<해방군보>> 등 중국공산당과 중앙군사위의 기관지엔 일제히 “위대한 70년대를 맞이하며”라는 제목의 사설(社說)이 실렸다.
“1960년대 초 마오주석께서는 높게 멀리 내다보시고 말씀하시었다. ‘지금부터 50년 내지 100년 동안은 전 세계 사회제도가 철저히 변화하는 위대한 시대, 하늘과 땅이 뒤집히는 시대가 될 것이다. 과거 그 어떠한 역사 시대와도 비교될 수 없을 것이다.’ 60년대의 역사는 마오주석의 위대한 예언을 웅변으로 증실(證實, 사실로 증명)한다”
중국의 1960년대는 인류사 최악의 대기근으로 시작됐다. 1962년부터 1966년까지 신경제정책은 파괴된 국민경제를 어느 정도 회복시켰지만, 1966년 5월 16일 공식적으로 개시된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은 3년 반의 세월 동안 중국 전역을 산산이 조각내고, 중국사회를 갈가리 짓찢었다. 홍위병의 집단테러, 조반파 “혁명군중”의 탈권 투쟁, 분열된 군중집단 사이의 무장투쟁, 군대에 의한 무력진압, 지방정부의 대민테러, 양민학살, 정치 탄압, 마녀사냥, 대규모의 인신 억류, 광범위한 인권유린, 잔악무도한 인격살해의 연속이었다.
대체 무슨 근거로 “사론”은 “마오쩌둥의 예언”이 적중했다 주장했나? 몽환적 현실인식인가? 노골적 역사왜곡인가? 낯 뜨거운 아첨인가? 그 모두일 수도 있지만, 교묘하게도 인용된 마오쩌둥의 “예언”은 그저 50-100년의 장시간을 두고 장차 인류사에서 사회주의가 승리할 것이라는 희망 섞인 예측일 뿐이었다. 비록 1960년대 수천만 명이 굶어죽고 맞아주고 정치적 학살을 당했다 해도 100년 안에 사회주의가 실현된다는 주장이었다. 판에 박힌 공산유토피아의 논리인데, 그 속에 대규모 숙청의 폭약이 내장돼 있었다.
1970년 1월 1일, 인민일보 1-2면. 제2면을 장식한 새해 첫 사론 “위대한 70년대를 영접하며”는 1970년 한 해 전국을 휩쓴 “일타삼반 운동”의 기본 논리가 제시돼 있다.
사론은 “경각심을 제고하여 조국을 보위할 것!”과 “전쟁을 준비하고(備戰), 재난에 대비하고(備荒), 인민을 위하라!(爲人民)”는 마오쩌둥의 훈시를 강조하면서 다시금 “투쟁(鬪), 비판(批), 사상개조(改)”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여기서 “전쟁 준비”는 마오쩌둥이 노상 강조한 미국 제국주의와 소련수정주의와의 전쟁을 의미했다. “재난 대비”와 “위인민”의 구호는 당시 중국이 경제 위기와 민생고에 봉착해 있음을 보여준다. 외부의 강적을 상정하고 내부의 모순을 지적하고 정책의 방향을 제시하는 이 세 구호는 신년 벽두부터 시작되는 “일타삼반 운동”의 논리가 됐다.
저우언라이의 생존 전략서 나온 일타삼반 운동
1969년 11월 12일 전(前) 국가주석 류샤오치는 중국 허난(河南)성 카이펑(開封)시 혁명위원회 건물 한 구석의 빈 방에서 만 일흔 한 번째 생일을 불과 열흘 앞두고 숨을 거두었다. 사인(死因)은 악성폐렴과 당뇨합병증이었으나 실은 의료방치에 의한 정치적 타살이었다.
류사오치의 죽음은 특히 국무원 총리 저우언라이에게 큰 충격을 줬음직하다. 1920년대 중국공산당 초창기부터 두 사람은 산전수전 다 겪으며 동고동락한 혁명동지였을 뿐만 아니라 1949년 이래 추진된 중공중앙 모든 정책의 공동책임자였다. 게다가 1898년 생으로 동갑내기였던 두 사람은 한 평생 보필했던 다섯 살 연상의 마오쩌둥과 함께 중공중앙의 트로이카로 군림했다. 15년 간 국가주석의 지위에 있었던 류샤오치는 그러나 마오쩌둥에게 버림받아 처참한 몰락의 길을 갔다. 비정한 정치투쟁의 현실에선 저우언라이도 예외일 수 없었다.
실제로 문혁 이래 저우언라이는 여러 차례 정치적 위기에 봉착했다. 문혁 초기 그는 류샤오치와 덩샤오핑의 사면과 복귀를 제안했다가 중앙문혁소조의 거센 비판에 휩싸였다. 이후 저우언라이는 곳곳에 도사리는 정치적 폭약을 살금살금 피해 생존의 줄타기를 해야만 했다. 틈만 나면 내부의 적들은 그를 반혁명수정주의자로 몰고 가려 했다. <44회>에서 살펴봤듯 1천 만을 조사해서 10만을 학살했다고 알려진 “청사 5.16 운동”은 저우언라이를 공격하는 소수의 조반파 혁명집단에 대한 반격에서 시작됐다.
“경애하는 저우언라이 총리, 억만 인민은 영원히 당신을 기억합니다. 저우 총리를 음해한 사인방의 죄행을 맹렬히 폭로하자!” 문혁 직후 제작된 포스터. 포스터의 메시지와는 달리 저우언라이는 사인방과 같은 배를 타고 문혁 시기 정치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핵심인물이었다. / chineseposters.net
류샤오치가 타계한 후, 저우언라이는 대규모의 정치적 숙청을 기획하고 나섰다. 수려한 외모, 신중한 언행, 자상한 이미지로 대중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저우언라이 역시 닳고 닳은 정치투쟁의 달인이었다. 1970년 1월 신년 벽두부터 그는 사상범, 언론범, 정치범 등 이른바 “현행 반혁명분자”들을 일망타진하는 거대한 정치 운동을 직접 기획했다. 이름 하여 “일타삼반 운동”이었다.
“일타삼반”이라는 운동의 명칭은 저우언라이가 초안을 쓰고 마오쩌둥의 비준을 거쳐 반포된 중공중앙의 두 가지 문건에서 비롯됐다. 일타(一打)는 반혁명분자의 “타격”을, 삼반(三反)은 부정부패, 사치낭비, 투기매매 세 가지의 관료부패를 “반대”한다는 의미였다. 전자는 비판적 지식분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정치적 마녀사냥이었으며, 후자는 지방정부를 감시하고 통제하기 위한 경제 부문의 캠페인이었다. 당시를 직접 경험했던 문혁사가들의 기억에 따르면, “일타삼반”에서 핵심은 바로 정치범을 숙청하는 “일타”에 있었다.
“살인”의 행동강령: 침착 정확 맹렬하게 적을 타격하라
1970년 1월 31일 반포된 중발(中發) [1970] 3호 “반혁명 파괴활동을 타격하는 중공중앙의 지시”에는 이후 전개될 일타삼반 운동의 전략전술이 소상히 밝혀져 있다. 이 문건의 초안을 저우언라이가 직접 썼다.
마오쩌둥은 1969년 4월 개최된 제9차 전국대표대회에서 “경각심을 제고하여 조국을 보위하자!”와 외부의 적대세력에 대한 “전쟁을 준비하자!”는 실천 강령을 제시했다. 이 강령에 입각해서 저우언라이는 “소수의 반혁명분자들”이 “제국주의, 수정주의, 반혁명세력의 무력을 믿고 망령되이 자신들이 잃어버린 천당을 되찾고자 파괴활동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면서 반혁명분자들을 타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더 구체적으로 저우언라이는 “전쟁공포를 조장해서 미혹한 군중을 교란시키고, 국가기밀을 절도해서 이적행위를 일삼고, 비밀결사를 통해 폭동 반란을 음모하고, 투기매매를 조장해서 사회주의 경제를 파괴하는” 검은 세력의 활동을 열거했다. 그는 유반필숙(有反必肅, 반동세력은 반드시 숙청하라!)이라는 마오의 원칙에 따라 침착하고 정확하고도 맹렬하게 적을 타격하는 “온(穩)·준(准)·한(猂)”의 행동 원칙을 강조했다.
“군중을 충분히 발동시켜 ‘일타삼반 운동’을 견결히 장악하라!” /공공부문
구체적인 행동 강령에서 저우언라이는 군중이 직접 나서서 반혁명분자를 숙청하는 군중독재 인민재판의 절차를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깃발을 높이 들고 북소리를 크게 울리며 광범위하고도 심도 깊게 군중에 선전하고 군중을 동원해야 한다. ‘죽여라!”고 판결하기 전에 먼저 군중에게 토론을 시켜서 모든 집집마다 속속들이 알고 사람들이 명확하게 알아야 한다. ‘죽여라!’고 판결할 때는 군중대회를 개최해서 공개적으로 선판(宣判)하고 즉시 집행하라. 이렇게 해야만 사람들의 마음이 시원해지며, 적인들은 공포에 떨게 된다.”
이 문건이 정식으로 발동되기도 전 베이징시는 먼저 행동에 나섰다. 1970년 1월 9일 베이징 시 “공검법 군관위”는 20명의 처결 명단을 발표했고, 1월 27일에는 스타디엄에 10만 명의 군중이 모아놓고 공판 대회를 열어 19명의 사형을 선판(宣判)했다. 2월 11일엔 다시금 55명의 범죄혐의자들의 명단을 발표했다.
여기서 “공검법 군관위”란 공안국, 검찰청, 법원을 모두 통합한 군사관제위원회를 의미했다. 1949-1953년 건국 직후 실시됐던 제1차 군사관제에 이어 1968-1972년 문혁의 절정에서 다시금 제 2차 군사관제가 실행된 상태였다. 쉽게 말에 군대가 경찰 및 사법의 전 권력을 장악하는 군부독재와 다르지 않았다. 다만 중국공산당의 정부조직이 본래 군사조직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중국 인민들의 의식 속에서 군부독재는 행정적 일탈로 의식되지 않았다.
1970년 “일타삼반 운동” 시가 대회의 한 장면. “반혁명분자를 견결히 진압하라!는 구호가 보인다.” / 공공부문
베이징시가 발표한 범죄혐의자 55명의 절대다수는 사상범과 정치범들이었다. 청계운동의 표적은 주로 1949년 건국 이전 국민당과 연루됐거나 자산계급에 복무했던 이른바 “역사(歷史) 반혁명분자들”이었던 반면, 일타삼반운동의 주요 타깃은 문혁의 과정에서 범죄를 저지른 “현행 반혁명분자들”이었다. 문혁 초기 “홍팔월의 테러”는 이른바 출신성분을 근거로 “계급천민”을 제거하는 민에 의한 계급학살(classicide)이었다. 반면, 일타삼반 운동은 정부기관이 직접 나서서 공개적인 재판을 통해 사상범을 학살하는 관에 의한 정치학살(politicide)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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