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윤의 슬픈 중국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역사를 조작하는 권력

bindol 2021. 7. 17. 06:03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역사를 조작하는 권력

송재윤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

 

 

 

<1967년 4월 베이징, 오른쪽부터 장칭, 마오쩌둥, 린뱌오, 저우언라이/ 공공부문>

송재윤의 슬픈 중국: 문화혁명 이야기 <58회>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 현재를 지배하는 자가 과거를 지배한다.” 조지오웰의 <<1984>>에서 “오세아니아” 진실부(眞實部, Ministry of Truth) 기록 관리원 윈스턴(Winston)이 고문을 당하며 되뇌인 영국사회당 “잉쏙(Insoc)”의 구호다. “미친” 윈스턴을 “치유하기 위해” 그를 고문하는 진실부의 오브라이언(O’Brien)이 그에게 속삭인다. “현실은 외부에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게 아니라 오직 마음속에만 있는 거란다······. 당이 진실이라 주장하면 그게 바로 진실이란다.”

1948년 완성된 조지 오웰의 소설 <<1984>> 속의 디스토피아는 문화혁명 시기 중국에서 거의 그대로 실현됐다. 그 당시 중국의 “현재”를 지배하던 마오쩌둥과 사인방(四人幇)은 실제로 정치적 목적에 따라 “과거”의 기록을 뒤틀고 인민의 기억을 바꿔서 중국의 “미래”를 완벽하게 지배하려 했다. 문혁 시절 마오쩌둥의 사주를 받은 관방 역사가들은 혁명의 미명 아래 거리낌 없이 과거사를 조작했다. 정확한 기록에 근거한 엄밀한 실증의 역사학은 “자산계급 학술권위”로 매도되고 배척됐다. 공산당의 권위를 훼손하는 기록은 조직적으로 훼멸됐다.

현재 권력이 과거 기록을 바꿔 미래를 지배

정치의 시녀가 된 그 시절의 역사학을 중국에서는 “영사(影射) 사학”이라 부른다. 직역하면 “그림자를 투사(投射)한다” 정도의 의미지만, 여기서 “영사”란 어떤 사물에 빗대 다른 얘기를 ‘넌지시 암시하다’ 혹은 ‘에둘러 얘기하다’의 뜻이다. 결국 “영사 사학”이란 현재의 정치적 목적에 따라 과거사를 왜곡하는 거짓의 역사학을 이른다. 문혁 시절 “영사 사학”은 지식분자를 탄압하고 인민대중을 선동하는 이념투쟁의 폭약이 됐다. 과연 어떤 논리로 문혁 시기 관방 역사가들은 그토록 자의적으로 과거를 조작할 수 있었을까? 그들의 논리를 파헤쳐 보면 무덤 속의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가 벌떡 일어난다.

런던 북부 하이게이트(Highgate)에 세워진 마르크스의 묘비명은 젊은 시절 그가 남긴 잡기장에서 따왔다. “지금껏 철학자들은 세상을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해 왔다. 요는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 이 한 마디는 이후 전 세계에서 수많은 청년들을 사회주의자로 만드는 주술적 마력을 발휘했다.

일면 그럴싸하지만, 20대 철학도의 오만한 발상, 치기어린 궤변일 뿐이다. 세상을 제대로 바꾸기 위해선 복잡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깊이깊이 궁구해도 턱없이 모자라다. 현실을 모르는데 어떻게 세상을 바꿀 수 있나? 20세기 공산주의 운동의 대실패는 복잡한 현실의 질서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마르크스 추종자들이 섣부른 혁명의 정책을 남발한 결과다. 스탈린의 표현을 빌면, “머리가 더운” 좌익혁명가들이 세상을 알지도 못하면서 세상을 바꾸려 했던 까닭이다.

문혁 당시 “영사 사학”이 득세한 심리적 배경도 다르지 않다. 마르크스를 원용하자면, “지금까지의 역사학자들은 과거를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해 왔다. 요는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 이 논리에 따르면, 역사학은 혁명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 사회 변혁을 위해서 역사를 조작하고 왜곡할 수 있다는 발상이다.

<2019년 2월 16일, 누군가 마르크스의 묘비에 붉은 글씨로 낙서를 했다. 낙서의 내용: "볼셰비키 홀로코스트 기념비, 1917-1953년, 사망자 6천 6백만 명“/ twitter.com>

마르크스주의 인식론에 따르면, 모든 주장은 당파성을 갖는다. 가치중립의 객관적 진리란 없다. 실증사학의 “진리”는 부르주아 계급 편향일 뿐이다. 부르주아 계급사관에 맞서 무산계급의 역사학을 세워야만 한다. 진리는 오직 혁명 과업을 이끄는 당이 결정한다. 과거사는 현실의 목적에 복무할 때만 의미를 갖는다. 오웰이 그린 오세아니아 진리부의 논리 그대로다. 그러한 관점에 서면, 역사 왜곡이야 말로 숭고한 혁명운동이 된다.

거짓 날조와 허위 조작으로 국가주석을 극형에

국가 주석 류샤오치는 거짓 날조와 허위 조작에 의해서 극형에 처해졌다. 사인방(四人幇)의 사주를 받은 중앙전안심사조(中央專案審査小組, 이하 전안조)는 오로지 류사오치를 잡아넣기 위해서 1920년대 그의 행적을 집중적으로 파헤쳐 과감하게 조작하고 터무니없이 왜곡했다. 1968년 10월 18일 중공중앙은 전안조의 보고서를 근거로 “중발 [68] 155호: 반역도당, 내부간첩, 노동자계급의 공적 류샤오치의 죄행 심층보고에 관하여”를 발표했다. 이로써 중공 부주석 및 국가주석 류샤오치는 빠져나올 수 없는 파멸의 늪 속에 머리끝까지 잠겼다.

8페이지 분량 “중발 [68] 155호”는 거의 50년에 달하는 류샤오치의 혁명 인생을 통째로 부정하는 모략중상의 단죄에서 시작된다.

“지주 출신인 류샤오치는 극도의 부패 반동으로 충만한 지주계급으로서 자산계급 사상을 실행하는 이기분자다······. 40년 간 그는 꾸준히 반혁명의 양면적 수법을 써서 적에 투항하고, 반란을 획책하고, 외국과 내통하고, 미친 듯이 마오 주석을 대표로 하는 무산계급 혁명노선에 저항하고 무수한 반혁명 행위를 저질러왔다. 그 결과 류샤오치는 당내 반혁명 수정주의 집단의 총 두목이자 자본주의 재건 세력의 총 대표가 됐다.”

 

<1967년 여름, 중난하이에서 홍위병에 비투(批投, 비판투쟁)당하는 류샤오치의 모습/ 공공부문>

그러한 판단의 근거로 전안조는 1925년, 1927년, 1929년 세 차례에 걸친 류샤오치의 변절, 반역, 내부간첩 행위 및 반혁명 죄행을 낱낱이 공개했다. 묘하게도 1959년 이래 국가주석의 직무를 수행해 온 당 서열 2위의 류샤오치를 죽이기 위해 40년 전 행적만을 들춰냈다. 전안조의 보고서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1925년 상하이 총공회(總工會)의 책임자였던 류샤오치는 병을 핑계로 그 직책을 내려놓았다. 그해 9월 18일 당시 상하이를 지배하던 군벌 싱스롄(邢士廉, 1885-1954)은 총공회를 폐쇄한 후 9월 19일 류샤오치 체포령을 내렸다. 이에 지하로 숨었던 류샤오치는 11월 몰래 상해를 떠나 후난(湖南)성 창사(長沙)로 달아났는데, 창사의 군벌 자오헝티(趙恒惕, 1880-1971)는 공산당원을 소탕하는 백색공포를 일으켰다. 결국 12월 16일 류샤오치는 체포되어 참형을 당할 위기에 처했다. 이에 류샤오치의 친형을 비롯한 여러 인사들이 자오헝티를 찾아가 반혁명적 정치 협상을 벌인 끝에 가까스로 류샤오치가 살려낸다. 전안조는 이 과정에서 류샤오치가 자오헝티에게 투항한 후 유가경전 <<사서(四書)>>를 하사받고 광둥(廣東)으로 가서 악의를 품고 공산당에 재(再)입당했다고 주장했다.

<“반역도당, 내부간첩, 노동자의 공적 류샤오치를 영원히 출당시키라!” 1968년 당시의 선전 포스터/ 공공부문>

2) 1927년 류샤오치는 우한(武漢)에서 후베이(湖北)성 총공회 비서장을 역임하고 있었다. 전안조의 조사에 따르면 그는 “제1차 국내 혁명전쟁으로 혁명과 반혁명의 대결이 첨예하던 바로 그 상황에서” “제국주의 및 국민당 반동파 왕징웨이(汪精衛, 1883-1944)와 천공보(陳公博, 1892-1946)의 주구가 되어 노동자 계급을 팔아먹고 혁명을 파괴하는 내부 간첩의 활동을 전개했다.”

전안조에 따르면 류샤오치는 국민당 중앙의 “노동자 운동 소조장(小組長)”에 임명된 후 국민당 정부에 노동운동이 정보를 물어다 주는 특수간첩 행위를 일삼았다. 특히 1927년 6월 29일 류샤오치는 노동자의 폭동을 막기 위해 “공인 규찰대”를 해산했는데, 전안조는 국민당과 공모한 류샤오치의 반혁명 음모라 단정했다. 바로 그 전날 저녁 류샤오치가 국민당에 공개 체포됐다가 풀려났다는 이유였다. 공개 체포가 연출된 대중을 속이기 위한 고도의 고육계(苦肉計, 제 몸을 해치며 꾸며내는 계략)란 얘기였다.

3) 1929년 8월 21일, 랴오닝성 펑톈(奉天, 오늘날 선양)에서 만주성 위원회 서기로 활약하던 류샤오치는 군벌 장셰량(張學良, 1901-2001)에 다시금 체포됐다. 전안조의 발표에 따르면 류샤오치는 장셰량과의 밀약을 맺고 풀려난 후, 만주성위원회와 동북3성의 지하 당조직을 궤멸시키는 파괴적인 매당 행위를 이어갔다.

류사오치는 1920년 중국 사회주의 청년단에 가입했다. 이듬해 그는 막 창당된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그 후 거의 50년의 세월을 중공중앙의 핵심인물로 맹활약을 해왔던 자타공인의 공산주의 혁명투사였다. 1968년 10월 중공중앙은 그러한 류샤오치를 “반당반국(叛黨叛國)”의 반역자로 몰아서 “당 내외 모든 직무를 정지시킨 후, 그의 당적을 영구히 박탈했다.”

12년 후, 증거를 조작하고 위증을 교사한 모함으로 밝혀져

1980년 3월 19일 중공중앙은 철저한 재심을 통해서 1968년 전안조의 조사가 모두 허위증거, 과장왜곡, 증거조작, 위증교사, 자백강요 등의 불법적, 비윤리적 방법으로 날조되고 조작된 억지주장이었음을 명백히 밝혔다. 1980년의 재조사에 따르면, 류샤오치에 적용된 “반역도당, 내부간첩, 노동자의 공적” 등의 모든 구체적 혐의는 1920년대의 언론보도, 공산당 및 국민당의 내부문건, 관련자 증언 등을 통해서 빠짐없이 반박된다.

 

 

 

 

 

 

 

 

<1998년 류샤오치 탄생 100주년을 맞아 중국 우정국에서 발행한 기념우표/ https://www.xabusiness.com/china-stamps-1998/1998-25.ht

아울러 중공중앙은 류샤오치에 “반당반국”의 유죄를 선고한 1968년의 원심(原審)은 “린뱌오(林彪), 장칭(江靑), 캉성(康生), 천보다(陳伯達) 무리의 축의함해(畜意陷害, 고의적인 모함)”라 선언했다. 1980년 발표에선 명시적으로 마오쩌둥의 책임을 언급하지 않았지만, 1981년 6월 27일 중공중앙은 제11기 6차 전회(全會)에서 채택한 “역사문제 결의문”에서 문화혁명의 최종 책임이 최고영도자 마오쩌둥에 있었음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류샤오치가 파멸을 늪에 잠긴 후, 12년의 세월이 흐른 후에야 역사의 진실이 수면 위로 떠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역사에서 진실의 승리를 장담할 순 없다. 역사상 수많은 권력자들은 거짓말로 군중을 격분시키고, 성난 군중을 이용해 정권을 탈취해왔다. 권력을 장악한 후, 그들은 기록을 조작하고 기억을 왜곡한다. 오웰의 통찰대로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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