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윤의 슬픈 중국

마오쩌둥 “고작 260명 죽인 진시황이 무슨 잘못인가”

bindol 2021. 7. 17. 06:05

마오쩌둥 “고작 260명 죽인 진시황이 무슨 잘못인가”

송재윤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

 

<1969년 4월 1-24일, 중국공산당 제9차 전체인민대표회의, 마오쩌둥(왼쪽)과 린뱌오의 모습>

송재윤의 슬픈 중국: 문화혁명 이야기 <60회>

 

정치의 정면(正面)은 아름답다. 불의에 항거하고, 부정을 일소하고, 최선의 정책을 입안하는 호모폴리티쿠스(Homo Politicus)의 적극적인 사회 개혁의 활동이다. 정치의 배면(背面)은 추하다. 동지를 배반하고, 정적을 제거하고, 대중을 현혹해서 권력을 탈취하는 야심가들의 권모술수, 사기꾼들의 무도(無道) 작란(作亂)이다.

고대의 유가(儒家) 경전은 정치의 두 얼굴을 동시에 보여준다. 예컨대 <<서경(書經)>>엔 문명을 개창하고 교화를 실현한 상고 시대 성왕(聖王)의 행적이 통치의 전범으로 제시돼 있지만, 동시에 폭군의 학정(虐政), 혼군(昏君)의 패정(悖政), 권신(權臣)의 전횡 또한 낱낱이 기록돼 있다.

역사서 탐독한 마오, 음모와 술수 파헤쳐

마오쩌둥은 광적으로 과거의 역사서를 탐독했다. 그는 주변에 전통시대 역대 조대(朝代)의 정사 <<25사>>를 통째로 수차례 반복해 읽었노라 자랑했다. 물론 그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따르는 계급혁명을 꾀하는 공산주의자였다. 마르크스는 그에게 계급 철폐, 인간 해방 등 혁명의 당위와 방향을 알려줬지만, 마키아벨리적 지략을 가르쳐주진 않았다. 권력자로서 마오쩌둥은 <<25사>>의 배면에 깔린 음모와 술수를 깊이 파헤쳤다.

그는 늘 역사를 거꾸로 뒤집어서 봤다. 주지육림에 빠져 잔악무도한 난정(亂政)을 일삼았던 상(商)나라 최후의 폭군 주왕(紂王)을 높이 평가했으며, 진시황(秦始皇)을 중국사의 최고 인물로 칭송했다. 그는 말하곤 했다. “고작 260명 유생(儒生)을 죽였는데, 그게 무슨 큰 잘못이란 말인가?” 그는 “진시황의 사소한 잘못을 과장하고 위대한 업적은 폄하하는” 백면서생의 역사해석을 경멸하고 조롱했다. 고루한 도덕관념에 갇혀 인간사의 진면목을 외면하는 꽁생원의 질시일 뿐이라 여겼다.

밤낮으로 문자만 들여다보는 학인들이 대체 정치사의 흑막과 권력자의 간지를 어찌 알 수 있나? 그들의 붓끝에서 만들어진 포폄(褒貶)의 역사학이 어떻게 인간사의 진실을 드러낼 수 있나? 고기도 씹어 봐야 그 맛을 알 듯, 권력 역시 직접 누려본 후에야 역사에 기록된 권력자의 높낮이를 평가할 수 있다. 범부의 상식을 거부했던 마오는 역사에 기록된 폭군과 간웅(奸雄)의 행적을 파헤쳐 교묘한 음모의 통치술을 연마했다.

1970-71년 마오쩌둥은 배반의 정치, 권력투쟁의 술수를 완성했다. 절대 권력의 장악을 위해 그는 젊은 시절부터 산전수전 함께 겪으며 오랜 세월 혁명의 동지로 살아왔던 중공중앙의 권력자들을 과감하게 제거하기 시작했다. 홍위병은 이미 해체된 후였다. 인민해방군의 군부독재로 천하대란의 혼란상도 거의 끝이 났다. 그럼에도 70대 후반의 마오는 더욱 저돌적으로 권력투쟁에 나섰다. 군권(軍權)의 완벽한 장악을 위해서 그는 군부의 실세들을 제압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최종의 표적은 그가 손수 키운 문화혁명의 영웅 당 서열 2위의 린뱌오(林彪, 1907-1971)였다. 더욱 철저히 린뱌오를 제압하기 위해서 그는 30년 간 지근거리서 자신을 보필하며 “마오쩌둥 사상”을 정립한 중공중앙의 이론가 천보다(陳伯達, 1904-1989)를 희생양으로 삼았다.

중공중앙의 당파 싸움...마오와 린뱌오의 권력투쟁

1970년 중공중앙은 두 패로 갈리어 사생결단의 당파 싸움에 돌입했다. 군 장성 출신 황융성(黃永勝, 1910-1983) 및 우파셴(吳法憲, 1915-2004)은 린뱌오가 이끄는 중앙군사위원회의 핵심인물이었다. 반대편의 장칭(江靑), 캉성(康生), 장춘차오(張春橋), 야오원위안(姚文元) 등은 모두 마오쩌둥의 수족이라 할 수 있는 중앙문혁의 성원들이었다. 본래 4인방 및 캉성과 더불어 중앙문혁소조의 조장으로 맹활약했던 마오쩌둥 사상의 핵심 이론가 천보다는 장칭 및 캉성과의 사이가 틀어지면서 놀랍게도 린뱌오 집단에 참여했다. 결국 이 싸움은 군부를 장악하고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대원수 린뱌오와 “불멸의 최고영도자” 마오쩌둥 사이의 권력 투쟁이었다.

<1967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18주년을 열렬히 환영하고 경축한다! 마오주석과 함께 영원히 혁명을 하자!” 1967년 문화혁명을 이끈 핵심 인물, 왼쪽부터 캉성, 저우언라이, 마오쩌둥, 린뱌오, 천보다, 장칭. 이 중 천보다는 1970년 권력에서 밀려나 투옥되고, 린뱌오는 1971년 불의의 비행기 사고로 망명 중 사망한다./ chineseposters.net>

양자의 권력 투쟁은 일단 마오쩌둥의 후계자 문제를 둘러싸고 전개됐다. 일반적으로 전체주의 정권의 권력자들은 피붙이를 후계자로 양성한다. 전통시대 황제 지배 체제에서 세자를 책봉해 권력을 이양하는 방식과 같다. 마오쩌둥의 아들 마오안잉(毛岸英, 1922-1950)은 중공군 지원병으로 참전하여 1950년 11월 25일 평안북도의 창성군에서 유엔군의 공습을 받아 전사했다. 아들을 잃은 마오쩌둥으로선 새로운 권력 승계의 구도를 짤 수밖에 없었다. 그가 고안한 최초의 방법은 권력의 분할 승계였다.

1959년 4월 제2기 전국 인민대표 대회에서 마오쩌둥은 류샤오치에 국가주석의 직위를 양도했다. 최고영도자로서 마오는 중국공산당 총서기 및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으로 군림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을 대표하는 국가주석의 지위는 제2인자 류샤오치에 돌아갔다. 이로써 중공중앙의 정치는 마오와 류 두 사람의 투톱 체제가 구축됐다. 국경일마다 <<인민일보>> 제1면에는 두 사람의 사진이 나란히 같은 크기로 실렸다. 마오쩌둥 역시 외국 사절과의 공식 만남에서 류샤오치를 후계자라 소개한 적도 있다. 당시 누가 봐도 류샤오치는 “포스트-마오(Post-Mao)” 시대의 최고영도자였다. 류샤오치는 그러나 문혁의 광풍 속에서 3년 넘게 시달리다 1969년 11월 12일 카이펑의 혁명위원회 건물에 갇힌 채 숨을 거두고 말았다.

 

류샤오치가 축출된 후, 마오쩌둥은 제2인자 린뱌오를 일단 후계자로 삼는 공식 절차를 밟았다. 1969년 4월 1일부터 24일까지 베이징시 인민대회당에서 개최된 중공 9차 전체회의에는 2200만 당원 중에서 1512명의 대표가 참석했다. 이 회의에서는 무산계급 독재 원칙 아래서 문화대혁명을 계속 추진하며, “류샤오치를 우두머리로 하는 자본주의 사령부”의 비판을 최고 의제로 삼았다. 아울러 “중국공산당 장정(章程, 이하 당헌)”의 수정본 초안이 채택됐는데, 그 총강에는 “린뱌오가 마오주석의 친밀한 전우이자 후계자”라는 구절이 삽입됐다.

린뱌오의 권력 승계가 당헌에 명기됐지만, 10년 전처럼 권력 분할의 절차 따윈 없었다. 10년 전 류샤오치를 국가주석에 앉힐 때처럼 마오쩌둥은 행정의 실권을 놓을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스스로 국가주석이 되기도 꺼려했다. 대외적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을 대표하는 국가주석은 외빈을 영접하고 해외순방을 가야 하는 번거로운 자리였다. 그렇다고 린뱌오를 국가주석의 자리에 앉힐 수도 없었다. 1950년대부터 전쟁 영웅이었던 린뱌오는 10대 원수 중 서열 3위의 영예를 누려왔다. 1959년 국방장관에 임명된 이래 이미 10년 간 린뱌오는 군부를 강력하게 조정하고 있었다. 마오는 정치권력의 원천이 군사력임을 잘 알고 있었다. 린뱌오는 군을 직접 지배했고, 마오는 린뱌오를 오른팔 삼아서 군을 지배했다.

1969년 중·소 국경의 무장충돌 이후 린뱌오는 더욱 세차게 군부를 장악했다. 문혁 시기 “천하대란”을 정돈하는 과정에서 군부의 권력은 막강해졌다. 1967년 초부터 “삼지양군(三援兩軍, 좌파, 농민, 노동자의 지원과 군관 및 군훈)”의 원칙 아래 군부가 정부를 대체하고 있었다. 그 당시 군부는 중공중앙 정치국 위에 군림했다. 중앙 각 부서의 위원회는 물론, 각 성에 들어선 혁명위원회 역시 군대의 통제 하에 있었다.

<“중국인민해방군은 마오쩌둥 사상의 큰 학교다!” 문혁 시대 군대 내의 인격숭배를 보여주는 포스터/ chineseposters.net>

문혁 발발 이전부터 마오쩌둥은 군부 쿠데타 가능성을 늘 염두에 두고 있었다. 린뱌오를 자신의 후계자로 세우고 나자 그는 곧바로 린뱌오의 권력을 견제하고 나섰다. 마오쩌둥은 헌법에 명시된 국가주석의 직위 자체를 없애려 했다. 이에 중공중앙은 국가주석 직책의 존폐를 놓고 두 패로 갈라졌다.

마오 “국가주석 직위를 폐기하라”

1970년 8월 23일-9월 6일까지 장시성 북부 쥬장(九江) 경내의 루산(廬山)에선 중공 9기 2차 전체회의가 개최됐다. 산상에 집결한 155명의 중앙위원과 100인의 후보위원은 린뱌오가 이끄는 중앙군사위원회와 마오쩌둥 직속의 중앙문혁의 성원들로 나뉘었다. 표면상 대연합을 통한 승리를 모토로 내걸었지만, 실제로는 목숨을 건 정치투쟁이었다. 그 투쟁의 첫 번째 의제는 바로 국가주석 직위의 존폐였다.

절대 권력자였던 마오쩌둥으로선 국가주석의 직위까지 탐할 필요는 없었다. 그가 아니라면 당헌에 명기된 후계자 린뱌오가 국가주석의 직위를 맡아야 마땅했다. 이미 류샤오치를 국가원수에 앉혔던 경험이 있었기에 마오쩌둥은 린뱌오의 권력 강화를 경계하고 있었다. 개헌을 통해 국가주석의 직위 자체를 폐지한다면, 중공중앙에 더는 어색한 쌍두(雙頭)의 권력 충돌 따윈 없을 터였다. 때문에 마오쩌둥은 이미 1970년 3월 16일 헌법 개정의 논의가 일어났을 때 국가주석의 직위 자체를 폐기하라 지시했다. 3월 17일-20일 이어진 중앙공작 회의에서 이른바 “린뱌오 집단”의 인물들은 국가주석의 직위를 폐기할 수는 없다며 완강히 맞섰다.

<1960년대 초부터 린뱌오는 군대에서 마오쩌둥 인격숭배를 이끌고 있었다./ 공공부문>

당 서열 2위의 실력자로서 이미 당헌에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명기됐음에도 린뱌오가 맡은 행정의 직무는 국무원 부총리에 머물러 있었다. 린뱌오는 마오쩌둥보다 14세 연하였다. 마오의 유고 시 바로 그가 직위 승계의 주체였다. 때문에 린뱌오는 국가주석의 직위를 폐지하는 대신, 마오쩌둥에 직접 국가주석이 되어 달라 읍소했다.

노회한 마오쩌둥이 린뱌오의 속내를 모를 리 없었다. 1970년 4월 25일 그는 4인방의 일원인 장춘차오를 데리고 쑤저우(蘇州)에 있던 린뱌오를 불쑥 찾았다. 마오는 린뱌오에 묘한 질문을 들이밀었다.

“나는 늙었지만, 자네는 건강이 안 좋잖아. 자네의 자리를 누구에게 승계할지 생각해 봤나?”

마오는 80세를 바라보는 고령이었다. 그 때문에 린뱌오가 후계자로 지명됐다. 14세 연하의 린뱌오는 신경쇠약과 병마에 시달리고 있었다. 같은 이유로 린뱌오 역시 후계자를 지명해야 한다는 노골적인 압박이었다. 마오가 왜 하필 군부와 상관없는 상하이 문관(文官) 출신 장춘차오를 린뱌오 후계자로 제안했을까? 직속의 수족으로 하여금 린뱌오의 권력을 빼앗고 군부를 장악하겠다는 신호였다. 아울러 린뱌오가 문혁 시절 공군 사령부에 배속시켜 자신의 후계자로 직접 기르고 있던 그의 아들 린리궈(林立果, 1945-1971)를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장춘차오는 린뱌오 집단의 사람들과는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는 인물이었다. 장춘차오를 린뱌오의 후계자로 삼으라는 마오쩌둥의 요구는 마치 한 민주공화국에서 여당의 핵심인물을 데려다 야당의 수장으로 앉히라는 주문과도 같았다. 린뱌오 집단은 격분해서 장춘차오를 향한 이념의 십자포화를 가하기 시작했다. 물론 마오 집단 역시 격렬하게 반발했다. 첫 번째 희생양은 한 평생 마오를 섬겨왔던 이론가 천보다였다. <계속>

<문혁 시기 마오쩌둥 어록 “소홍서(小紅書)”를 손에 들고 흔드는 젊은 학생들의 모습. 린뱌오가 편찬한 “소홍서”는 문혁 이전 이미 군대에서 이념 교육용 교과서로 널리 읽혔다. / picture-alliance/dpa>

#송재윤의 슬픈 중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