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윤의 슬픈 중국

세계적인 반중 감정...6·25전쟁과 문혁 때부터 시작됐다

bindol 2021. 7. 17. 06:04

세계적인 반중 감정...6·25전쟁과 문혁 때부터 시작됐다

송재윤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

 

 

 

 

 

 

 

 

<2018년 6월 11일, 베트남 호치민시의 반중 시위/ 2018년 6월 11일 https://www.bbc.com/news/world-asia-44436019>

송재윤의 슬픈 중국: 문화혁명 이야기 <59회>

 

현재 중국은 외교적으로 1978년 개혁개방 이래 최대의 위기에 봉착해 있다. 세계 각국의 반중 감정이 갈수록 격해지고 있다. PEW 연구센터의 조사에 따르면, 2020년 세계 각국에서 중국을 싫어하는 인구의 비율은 일본 85%, 호주 81%, 스웨덴 85%, 덴마크 75%, 한국 75%, 영국 74%, 미국 73%, 캐나다 73%, 독일 71%, 프랑스 70% 등을 보인다. 이들 국가들의 반중 감정은 코로나 19에 따른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2017년 이래 점점 강화되는 추세다. BBC의 조사에 따르면, 반중 감정은 독일 35%, 캐나다 51%, 호주 47%였고, 2019 PEW 연구센터 조사에 따르면, 독일 56%, 캐나다 67%, 호주57%였다.

2018년 현재 세계190국 중에서 128개국이 중국을 제1 교역 상대국으로 삼고 있다. 이들 국가들은 중국과 경제적 공생관계를 맺고 있음에도 중국을 경계하고, 불신하고, 심지어는 혐오하는 경향까지 보인다. 코로나 19의 확산은 반중 감정을 강화시켰지만, 오로지 코로나 19 때문에 글로벌 반중 감정이 생겨났다고 볼 수는 없다. 전 세계적 반중 정서의 확산을 설명하기 위해선 1949년 건국 이래 지속돼 온 중국공산당의 일당독재, 인권유린, 중국-중심적(China-centric) 패권주의, 배타적 징고이즘(jingoism)에 주목해야 한다. 반중 정서를 확산시킨 굵직한 사건들만 역순으로 꼽자면, 코로나 19 팬데믹, 1989년 톈안먼(天安門) 대학살, 문혁 시기의 외교참사(1967-1969년), 한국전 파병(1950-1953, 이른바 “항미원조” 전쟁) 등을 들 수 있다.

영국 대사관 방화...문혁 시기 중국의 외교참사

1967-1969년 인구 8억의 거대한 대륙국가 중국은 문화혁명의 광열 속에서 전 세계를 상대로 고립무원의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1967년 8월 베이징의 홍위병들은 영국 대사관에 난입해서 불을 지르는 외교적 망동을 자행했다. (“슬픈 중국” <43회> 영국대사관에 불지른 홍위병들”참조) 이 사건 이후 중국의 외교적 고립주의는 극한 상황으로 치달았다. 1968년 한 해 중국의 외교는 마비상태였다. 외교참사의 최절정은 1969년 3월 만주의 국경에서 발생한 소련과의 군사 충돌이었다.

베트남 전쟁 당시 중국은 배후에서 북베트남에 무기 및 군수물자를 지원하고 있었다. 베트남 전쟁은 중공정부에 반미제국주의 선전선동의 절호의 기회를 제공했다. 중국공산당 기관지들은 날마다 미국을 비난하고 공격하는 기사로 지면을 채우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1968년 3월 미국의 존슨(Lyndon B. Johnson) 행정부는 북베트남과 평화협상을 제안했다.

소련의 중재를 통해 북베트남이 “파리 평화협상”의 제안을 수용하자 중월 관계는 큰 시련에 휩싸였다. 1968년 6월, 광저우(廣州), 쿤밍(昆明), 난닝(南寧)의 베트남 영사관에선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특히 쿤밍의 베트남 영사관은 큰 피해를 입었다. 미국의 외교 전술이 중·월 관계를 위협한 셈이었다.

중·소 관계는 1968년 8월 소련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으로 더 큰 위기로 내몰리고 있었다. 그해 1월 5일 알렉산더 둡체크( Alexander Dubček, 1921-1992)가 총서기로 선출된 직후, 자유화를 외치는 대규모 군중 시위가 발생했다. 이른바 “프라하의 봄”이었다. 아래로부터의 요구에 부응한 둡체크 정부는 경제적 분권화 및 자유화 개혁을 추진했고, 이에 분개한 크렘린은 “공산국가의 배신을 단죄하기 위해” 65만 “붉은 군대”를 급파했다. 본래 둡체크의 개혁을 수정주의 노선이라 비판하던 중공정부는 180도 방향을 틀어서 체코슬로바키아의 편에 서서 소련의 군사행동을 규탄했다. 이후 중·소 대결은 악화 일로였다.

<1968년 8월 소련 점령군 탱크 앞에서 저항하는 프라하의 청년/ 공공부문>

그밖에도 중국은 홍콩 문제를 놓고 영국과 계속 맞서고 있었으며, 인도네시아 및 버마와도 충돌했다. 1967년 말, 베이징의 인도네시아 대사관이 공격을 당하자 자카르타의 중국대사관에 대한 보복 공격이 가해졌다. 20명의 중국인들이 부상을 당하고, 여러 명의 인도네시아 사람들이 총격으로 사망했다. 이후 양국은 공관을 모두 철수하는 극한 조치를 이어갔다.

게다가 중국은 심층 취재를 빌미로 일본인 기자단을 추방하고, 재중 일본 사업가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또한 중국이 인도의 반군 세력에 무기지원을 감행하면서 중·인 관계도 극심한 위기에 빠졌다. 1969년 5월 5일, 인도를 방문한 소련의 수상 코시긴(Alexei Kosygin, 1904-1980)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양국의 연합을 논했다. 1969년 5월 소련의 의장 포드고르니(Nikolai Podgorny, 1903-1983)는 북한에 가서 김일성을 직접 회유하기도 했다.

오직 캄보디아만이 표면상 중국과의 관계 개선에 성공했다. 미국이 캄보디아 내의 북베트남 병참기지를 공습하자 1968년 초부터 중국은 캄보디아에 군사지원을 보장했기 때문이었다. 중국은 그러나 물밑에선 캄보디아 국왕 시아누크(1922-2012)에 저항하는 크메르 루주를 지원하는 양면전략을 취했다.

요컨대 1968년, 문혁의 광열 속에서 중국의 외교는 실종 상태였다. 8억 인구의 거대한 대륙이 고립주의의 늪에 빠져 허우적댔다. 외교적 출로가 막혀버리자 중국은 군사적 돌파구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뼛속 깊숙이 게릴라 전사였던 마오쩌둥의 모험심이 다시 발동되는 모멘트였다.

<1969년 3월, 전바오다오로 진격하는 중국 병력의 모습/ 공공부문>

1969년 3월 중소 국경분쟁...중의 도발과 소련의 보복

중소 사이의 국경분쟁은 1959년부터 시작되어 1969년까지 해마다 점진적으로 고조됐다. 1966년 이후부터 중·소 이념갈등이 격화되자 국경 다툼도 거세졌다. 특히 1967년부터 중·소 국경은 화약고가 되어갔다. 1967년 1월 헤이룽장(黑龍江)성 북단의 우수리(Ussuri)강에서 최초의 국지전이 일어났다. 1967년 12월 7-9일, 23일과 1968년 1월 말 아무르(Amur)강과 우수리강에서 분쟁이 계속됐다. 1967년 11월까지 소련의 수 개 사단 병력이 몽골에 배치됐다. 이에 중국은 국경 맞은편에 방어적으로 병력을 배치했다. 동남방의 푸젠(福建)성의 병력까지 이동시켜 소련-몽골 국경에 배치하는 대규모 작전까지 펼쳐졌다.

 

급기야 1969년 3월 만주의 북쪽 중소국경의 우수리강 전바오다오(珍寶島)에서 중·소 군사충돌이 발발했다. 1860년 조약에 따라 청(淸)제국과 러시아 제국 사이의 국경으로 정해진 전바오다오는 아무도 살지 않고 전략적 가치도 없는 그저 작은 강 위의 섬일 뿐이었다. 이 작은 섬을 두고 중국과 소련 사이에서 두 차례의 격한 전투가 벌어졌고, 그 여파로 10년 넘게 중·소 양국 사이의 어색한 갈등이 지속됐다.

전문가의 해석을 종합해 보면, 적어도 1차 교전은 중국의 의도된 도발로 보인다. 3월 1일 심야 300여 명의 중공군이 전바오다오에 진입해서 참호를 파고 매복에 들어갔다. 다음 날 오전 11시경 20-30명의 중공군이 구호를 외치면서 소련군을 유인했다. 중국 측 병력의 이상 징후를 포착한 소련군이 병력을 내보내자 중국 측은 선제적으로 총격을 가했다. 7명이 즉석에서 사망했다. 이에 매복하던 300 명의 중공군이 본격적으로 수류탄, 기관총 및 대전차포를 쏘아댔다. 중공군은 소련군에 돌진해서 백병전을 벌였다. 소련 측 주장에 따르면, 중공군은 19명의 소련군 포로를 생포해서 돌아간 후 즉석에서 처형하는 만행을 자행했다.

3월 15일 중·소 사이에 훨씬 더 큰 규모의 군사충돌이 이어졌다. 확실하진 않지만, 많은 연구자들은 전투가 보복을 맹세한 소련 측 선제공격에서 시작됐다고 해석한다. 중국 측은 2천 명 이상의 병력을 투입했고, 수적 열세를 보였던 소련군은 50대의 탱크와 병력 수송 장갑차를 내보내 1만 발 이상의 포탄을 쏘아댔고, 36대의 전투기가 출격했다. 9시간의 전투 끝에 저녁 7시 경에야 전투가 끝이 났다. 소련 측 사상자는 60명, 중국 측 사상자는 800명에 달했다.

<1969년 전바오다오 사건 이후 버려진 소련제 탱크 T62 위에 올라선 중국 병사들의 모습/ 공공부문>

소련의 핵전쟁 위협...마오쩌둥 “세계 인구 절반 죽겠지”

1969년 3월 8일, 격분한 소련 정부는 중국에 핵무기를 사용하겠다는 최고의 군사협박을 가했다. 3월 15일 2차 전투 이후 소련은 대중 유화책을 펴기 시작했다. 중국도 소련과의 전면전을 원치 않았다. 중국의 입장에서 전바오다오의 군사 충돌은 소련의 침공을 막기 위한 방어적 국지전일 뿐이었다. 그러나 양국은 좀처럼 출구를 찾지 못한 채 6개월 넘게 격한 흑색선전과 이념적 공방전을 이어갔다.

1969년 8월 13일 신장 지역에선 대규모 무력 충돌이 다시 일어났다. 소련은 그해 8월 말부터 다시 중국의 핵시설을 폭격하겠다는 엄포를 놓았다. 이에 9월 5일 미국은 중·소 분쟁의 위험을 경고하기에 이르렀다. 현실적으로 양측 모두 전면전을 벌일 수는 없는 현실인데, 외교적 해결책도 찾을 수 없었다.

결국 1969년 9월 11일, 소련의 수상 코시긴은 베이징 공항에 도착해서 국무원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 1898-1976)와 담판을 벌였다. 코시긴이 중국의 핵시설에 대한 폭격이 가능하다고 언급하자 저우언라이는 항일전쟁의 경험을 살려 전면적인 지구전에 돌입하겠다고 맞섰다. 두 사람은 잠정적 휴전에 일단 합의했지만, 양국 사이의 군사긴장은 향후 10년 이상 지속됐다.

그 당시 소련은 실제로 중국에 대한 핵무기 사용 가능성을 검토했었다. 당시 중국은 1964년 핵무기 개발에 성공하고 2년 후 열핵(熱核) 실험까지 마쳤지만 핵탄두를 탑재한 미사일 개발에선 여전히 뒤쳐져 있었다. 그럼에도 소련이 핵무기 사용을 포기한 이유는 다름 아닌 중국 특유의 인해전술(人海戰術) 때문이었다.

1957년 11월 초 모스크바를 방문한 마오쩌둥은 공식석상에서 제3차 대전이 일어날 경우 자본주의 체제가 멸망할 것이라 단언하며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3차 대전이 터지면 최악의 경우 세계 인구 27억 중에서 절반은 죽고, 절반은 생존하겠지. 그렇게 되면 제국주의 국가들은 모두 파멸하고, 전 세계는 사회주의 체제로 변할 것이다. 그리고 수년 안에 세계 인구는 다시 27억이 될 터이다.”

<1957년 모스크바에서 연설하는 마오쩌둥의 모습/ 공공부문>

1969년 6월 브레제네프는 국제 공산당 대회에서 중국을 규탄하면서 말했다. “12년 전 바로 이 장소에서 마오쩌둥은 놀라운 허세와 냉소를 머금고서 핵전쟁이 나면 인류의 절반이 죽을 것이라 말했죠.” 마오의 발언은 취중의 실언일 수도 있고 엉뚱한 농담일 수도 있지만, 혁명을 위해서라면 세계 인구의 절반까지 기꺼이 걸 수 있는 그의 도박사적 광기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인민의 목숨을 건 마오의 도박은 신비로운 마력을 발휘했다. 소련은 흐지부지 중국에 대한 과격한 군사작전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미국은 중·소 사이의 벌어진 틈에 비집고 들어가 외교관계를 재건하는 “쐐기 전략”(wedge strategy)을 꺼내들었다. 외교적 고립상태에 빠져 있던 중국으로선 미국과의 관계 개선이야말로 소련을 견제하고 타이완을 탈환할 수 있는 최고의 묘책이었다.

놀랍게도 마오의 대(對)소련 군사 도발은 새로운 국제질서의 물꼬를 텄다. 1971년 4월 11일 미국의 탁구팀과 기자단이 중국 땅에 첫발을 내딛었다. 이어서 1971년 7월 15일 미대통령 닉슨(Richard Nixon, 1913-1994)은 전국 텔레비전 연설을 통해 이듬해 중국을 방문하겠다고 발표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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