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칼로 권력 잡은 자, 2인자의 총칼을 두려워한다
송재윤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
<1966년 9월 톈안먼 홍위병 접견식. 오늘쪽부터: 마오쩌둥, 린뱌오, 저우언라이, 장칭, 캉성/ 공공부문>
송재윤의 슬픈 중국: 문화혁명 이야기 <63회>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 기원전 247-195)은 천재적인 군사전략으로 자신을 도와 천하통일의 위업을 이룩한 최고의 개국공신(開國功臣), 국사무쌍(國士無雙)의 명장 한신(韓信, 기원전 ?-196)을 제거했다. 한신이 모반하지 않을까 늘 의심했기 때문이었다. 린뱌오 역시 천재적 군사전략으로 마오쩌둥을 도와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운 희대의 명장이었다. 린뱌오도 한신처럼 정치권력의 정점에서 불운의 최후를 맞았다.
한신과 린뱌오 모두 탁월한 군사적 능력이 액운을 자초했지만, 그들의 모반 혐의는 권력자가 지어낸 이야기일 수 있다. 누구든 마상(馬上)에서 권력을 잡아 황제의 지위에 오르면 군부의 실력자를 두려워한다. 총칼로 권력을 잡은 자는 언제든 총칼에 그 권력을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마오쩌둥은 늘 군사반란을 경계했다. 심지어는 나무나 바위까지 자객으로 의심하는 병적인 히스테리에 시달려야 했다. 절대 권력자가 측근의 2인자를 제거해야 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571공정 기요, 린뱌오의 반란 계획서인가
중공 서열 제2위의 국방장관이자 국무원 부총리였던 린뱌오(林彪, 1907-1971)는 급히 소련으로 망명하다 몽골 상공에서 가족과 함께 잿더미로 돌아갔다. 중공중앙의 발표에 따르면, 린뱌오는 암암리에 당내에 자본주의 사령탑을 건설한 후, 군을 동원해 마오쩌둥을 암살하고 당과 정부를 장악하려 했다. 이 음험한 프로젝트의 코드네임은 “571 공정(工程, 프로젝트)”이었다. 중국어에서 숫자 “571”(우-치-이)은 “무기의(武起義)와 발음이 같다. 곧 린뱌오가 군부의 장성들과 공모하여 무장봉기를 획책했다는 얘기다.
중국의 라오바이싱(老百姓, 일반백성)은 중공중앙의 발표를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린뱌오가 누군가? 250만 군부의 수장이자 마오쩌둥의 공식 후계자였다. 그는 문혁의 최고 수혜자였다. 무엇보다 린뱌오는 마오쩌둥 신전의 최고 제사장(祭司長)이었다. 그가 왜 표변해서 마오쩌둥을 암살하고 자본주의를 되살리려 했을까?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로선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었다. 린뱌오 추락사는 실로 기괴한 사건이었다.
이미 6년 간 문혁의 광풍 속에서 인민들은 날마다 공포와 불안에 떨고 있었다. 그동안 인민들은 마오쩌둥의 훈시를 맹신하며 온갖 형태의 비투(批鬪), 문투(文鬪), 무투(武鬪)에 휩싸였다. 우붕(牛棚, 사설 감옥)에 서로를 가두고 감시하고 학대해 왔다. 급기야 그들은 문혁의 목적 자체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문혁은 결국 지저분한 권력투쟁이었나? 중국의 인민은 1인의 권력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동원된 막장 혁명 드라마의 엑스트라였던가?
<문혁 시기 린뱌오의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포스터. “마오쩌둥 어록”을 손에 든 린뱌오가 마오쩌둥과 함께 홍위병을 접견하고 있다. “광휘의 방양, 위대한 창거(創擧, 창조적인 거업)! 마오주석의 제 8차 문화혁명 대군 검열!” “최고 지시: 그대들은 국가 대사에 관심을 갖으라!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을 끝까지 진행해야 한다!/ 공공부문>
린뱌오의 죽음은 혁명 신화를 무너뜨렸다. 민심 이반의 쓰나미를 막기 위해 마오쩌둥은 출구전략을 모색했다. 린뱌오 역모의 스모킹건(smoking gun)을 만천하에 공개하는 정공법이었다. 사람들의 눈앞에 증거를 보여줌으로써 린뱌오의 대역죄를 믿게 하려는 의도였다.
1971년 11월 14일, 중공중앙은 마오쩌둥의 명령에 따라 “혁명정변의 강령 ’571공정 기요'에 관한 통지문을 전국에 발송했다. 이 통지문엔 지금은 금서가 된 린뱌오의 반란 계획서 “571공정 기요(紀要)”가 첨부돼 있었다. “571 공정 기요”는 군사반란의 정치적 의의와 투쟁 전략이 기록돼 있다.
문건의 작성자는 린뱌오의 아들 린리궈(林立果, 1945-1971)와 그의 동지 3인이었다. 린뱌오가 소련으로 도주한 1971년 9월 13일, 이 3인 중 1명은 체포됐고 나머지 두 명은 베이징에서 비행기를 타고 도주하다 권총 자살했다. 마오쩌둥 사상의 이론가 천보다(陳伯達, 1904-1989)와 린뱌오와 연결된 군부의 5인은 “린뱌오 집단”이 되어 1980년 법정에서 16-20년 유기 도형(徒刑,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반역도당 매국노 린뱌오의 반혁명 수정주의 노선을 철저히 비판하라!” 인민의 공적으로 전락한 린뱌오의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포스터/ chineseposters.net>
“통치 집단 상층부가 부패하고 무능해 고립무원 상태”
린뱌오가 군사반란의 주동자였다면, “571 공정 기요”는 린뱌오의 뜻에 따라 그의 아들 린리궈가 작성한 반란의 계획서였다. 반면 린뱌오가 만약 그의 아들에 납치된 상태였다면, 이 문서는 전적으로 린리궈가 거친 상상력을 발휘해 구성한 쿠데타의 시나리오였다. 구체적으로 이 문건은 1) 가능성, 2) 필요성 3) 기본조건, 4) 시기, 5) 역량, 6) 구호와 강령, 7) 실시 요점, 8) 정책 및 책략, 9) 비밀보호 및 기율, 이상 9항으로 구성돼 있다.
1970년 8월 루산회의(제9기 2차 전회) 이후 마오쩌둥과 린뱌오의 갈등이 표면에 드러났다. 문건의 작성자들은 그 상황을 다음과 같이 파악한다.
“정국이 불안정해지면서 통치 집단의 내부모순이 첨예해지고, 우파 세력이 대두하고 있다. 군대는 압박을 받고 있다. 10년 동안 국민경제는 전에 없는 정체를 보인다. 군중과 기층의 간부들, 부대의 중·하 간부들의 실제 생활수준이 하락했다. 불만 정서가 날마다 커져간다. 감히 분노하지만 결코 말하진 못한다. 심지어 분노조차 할 수 없어 입을 닫아 버렸다. 통치 집단 내부의 상층부가 매우 부패한데다 우매하고 무능하여 고립무원의 상태에 이르렀다.”
그들은 “정치 위기가 깊어지고 권력탈취가 일어나 중국에선 점진적이고 평화적인 변화의 방식으로 전개되는 정변이 진행 중”이라 파악했다. 이 정변은 문인들에겐 유리하고, 군인들에겐 불리한 상황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때문에 문인들이 이끄는 “반혁명의 점진적 변화”를 저지하기 위해선 “폭력 혁명을 통한 급진적 변혁”가 필요하다. 사상, 조직, 군사 모든 면에서 혁명의 조건이 무르익었다는 낙관 위에서 그들은 “무장기의”의 초읽기에 들어갔다. 요컨대 이 문건은 군이 직접 나서서 부패한 권력집단을 일소하고 새로운 혁명정권을 세워야 한다는 대역(大逆)의 계획서였다.
“마오쩌둥의 호시절도 오래 갈 수 없다”
이 문건 속에서 마오쩌둥은 1950년대 미공군 폭격기 “B-52”라는 암호명으로 불린다. 아마도 최고영도자를 그저 노쇠한 “미 제국주의의 폭격기”라 폄하하려는 의도인 듯하다.
“B-52의 호시절도 오래 갈 수 없다. 초조하고 불안해서 그는 몇 년 내로 후사를 안배할 수밖에 없으니 우리에 대해서 절대로 방심하지 않는다. 손이 묶여 꼼짝하지 못하느니 차라리 결사항전에 나서야 한다. 정치에선 상대가 공격해오길 기다렸다 제압하지만, 군사행동에선 선수를 쳐서 상대를 제압한다. 우리나라의 사회주의 제도는 현재 엄중한 위기에 휩싸여 있다. 붓을 든 트로츠키파가 제멋대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변조하고 왜곡해서 사익을 추구하고 있다. 그들은 거짓된 혁명의 언사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대체해서 중국 인민을 사상적으로 기반하고 몽폐하고 있다······. 그들의 사회주의는 실제로는 사회 파시즘이다. 그들은 중국의 국가기구를 서로 잔인하게 학살하고 서로 헐뜯고 싸우는 고기 가는 기계로 뒤바꿔버렸다 "
<린뱌오의 아들 린리궈가 주동적으로 작성했다고 알려지는 군사정변의 계획서 “반혁명정변 강령 <<“571공정” 기요>> (영인본), 기밀 첨부 1”>
문건 속에서 말하는 “붓을 든 트로츠키파”는 구체적으로 장칭(江靑)과 함께 4인방을 이루는 장춘차오(張春橋, 1917-2005), 야오원위안(姚文元, 1931-2005) 등을 가리킨다. 그들이 제멋대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왜곡해서 인민들을 죽음의 협곡으로 몰아넣었다는 비판이었다. 당시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발언이었지만, 불과 10년이 못 돼 이 주장은 만인의 상식이 됐다. 4인방에 대한 이들의 비판은 문혁 이후 4인방에 내려진 법정의 판결과도 공명한다. 문혁의 절정에서 린뱌오 집단이 4인방에 사형을 선고한 셈이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1980년 11월 20일 중국의 최고인민법원은 소위 “린뱌오 집단” 6인을 4인방과 함께 특별법정에 세워 단죄했다. 법정의 공식명칭은 “린뱌오·장칭 반혁명집단 사건 심사”였다. 4인방은 린뱌오가 가족과 함께 추락사한 후, 1974년 반년에 걸쳐 린뱌오와 공자를 동시에 비판하는 이른바 “비림비공(批林批孔)” 운동을 광적으로 전개한 주체였다. 어떻게 “린뱌오 집단”이 4인방과 함께 “반혁명집단”의 법정에 함께 설 수 있나? 상충되는 이 두 세력을 “반혁명집단”으로 묶음으로써 최고 인민법정은 마오쩌둥에 면죄부를 부여했다. 문혁의 책임을 마오쩌둥을 기민하고 오도한 린뱌오 집단과 4인방에 전가하기 위함이다.
<1980년 11월 28일, 4인방과 린뱌오 반혁명 집단의 특별법정/ 공공부문>
“마르크스-레닌주의 외피에 진시황의 법을 쓰는 중국 역사상 최대의 봉건 폭군”
문혁 이후 류샤오치의 명예는 복권되었지만, 린뱌오 집단의 반역행위는 오히려 더 강력하게 단죄됐다. 린뱌오 사건은 흔히 철안(鐵案, iron case)으로 불린다. 확고부동하게 결정된 번복 불가능한 사건이란 의미다. 문혁 시기 다른 사건들은 의안(疑案, 의심스런 사건), 현안(懸案, 계류 중인 사건), 원안(冤案, 원통한 사건), 가안(假案, 거짓 사건), 착안(錯案, 착오의 사건) 등으로 불리는 상황과 대조된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아마도 이 문건은 마오쩌둥에 대한 강경한 어조의 비판을 담고 있기 때문일 듯하다.
“당내와 국가의 정치생활은 봉건 전제 독재 방식의 가부장제 생활로 변질됐다. 당연히 우리는 그가 중국을 통일한 역사적 위업을 부정하지 않는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 혁명가들은 역사상 역사에서 그가 마땅히 누려야 할 지위를 인정하고 지지한다. 다만 현재 그는 중국 인민이 그에게 준 신임을 남용하여 반면의 역사로 치닫고 있다. 그는 이미 오늘날의 진시황이 됐다. 중국인민에 대한 책임과 중국역사에 대한 부책 때문에 우리들의 기다림과 인내는 한계에 달했다. 그는 진정한 마르크스-레닌주의자가 아니다. 그는 당시 공자와 맹자의 길을 가면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외피를 쓰고 진시황의 법을 집행하는 중국 역사상 최대의 봉건 폭군이다!”
현재 중국에서도 용인될 수 없는 강한 어조의 마오쩌둥 비판이었다. 사상적 직격탄, 이념의 핵탄두였다. 마오쩌둥을 전근대 중국의 황제였다면 이 “발칙한” 언사는 최악의 불경죄에 해당한다. 당시의 현실에서 마오쩌둥은 황제보다 더 높은 최고영도자였다. 그는 날마다 인민의 눈동자에 강림하는 인격신이었다.
당시 이 문서는 전국 모든 곳의 개개인에 전달됐다. 저우언라이를 비롯한 중공중앙의 리더들은 이 “불경스런” 문건이 민간에 전해지면 안 된다고 건의했지만, 마오쩌둥은 듣지 않았다. 린뱌오가 마오쩌둥을 직접 공격했음이 알려지자 많은 사람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국가 안의 “깊은 국가”(deep state) 속에서 자행된 권력암투의 비릿한 피 냄새를 맡았기 때문이었다.
현재 ’571 공정 기요'는 금서...“린뱌오, 누명 쓰고 희생” 재평가도
중국국방대학의 대표적 문혁사가 왕녠이(王年一, 1932-2007) 교수는 린뱌오 역시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의문의 추락사로 희생됐다고 주장한다. 린뱌오는 국가주석의 직위 존폐 여부를 놓고 마오쩌둥과 대립했지만, 부주석으로서 공식 회의석상에서 자신의 의견을 발표했을 뿐이었다. 왕교수는 묻는다. 부주석의 개인적 견해의 표명이 어떻게 권력찬탈의 혐의가 될 수 있나? 아울러 왕교수는 “571 공정” 자체가 린뱌오가 아니라 그의 아들 린리궈가 구상한 허술한 몽상일 뿐이었다고 주장한다. 설혹 “571공정 기요”가 날조된 문서는 아니라 해도 아들의 일탈을 근거로 린뱌오를 반역도당의 수괴로 몰아갈 수는 없음은 법상식이다.
중국 군부의 10대 원수(元帥) 천이(陳毅, 1901-1972)의 아들 천샤오루(陳小魯, 1946-2018)는 문혁이 막을 내린 후 40년이 지나서 당시를 돌아보며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오늘날 ’571공정 기요'를 보면 갈수록 명확해집니다. 실상 많은 일들을 린뱌오는 모르고 있었죠. 게다가 ’571공정 기요'는 당시에는 기층의 모든 사람들에게 전달된 문건이었죠. 이 문건은 많은 문제를 제기합니다. 사실 당시 “마오쩌둥 혁명노선”을 지향한 게 바로 문혁의 병폐였었죠. 그 문건의 논거는 당시 기준으로는 우파 언론에 해당했지만, 오늘의 관점에서 보면 올바른 견해였소. 이후 4인방을 비판할 때 썼던 바로 그 논리죠. 때문에 오늘날 도리어 “571공정 기요”는 극비의 문건이 됐소. 절대로 외부로 유출할 수가 없죠!”
<1974년 “비림비공” 운동 당시의 포스터/ 공공부문>
1970년대 초 중국의 전 인민이 린뱌오의 아들 린리궈가 주동적으로 작성했다는 바로 그 군사 쿠데타의 계획서를 읽어야만 했다. 반면 오늘날 중국에선 그 문서는 금서 목록에 올라 있다. 당시엔 린뱌오 부자의 대역죄를 드러내기 위해 이 문서를 강제로 읽혔지만, 오늘의 관점에선 “571공정 기요”의 내용이 인류의 상식에 부합한다. 언젠가 중국을 지배하는 권력의 진자가 반대 방향으로 움직일 땐, 린리궈가 오히려 영웅의 신전에 안치될 수도 있다. 시대가 변하면 과거사 역시 새롭게 해석되고 평가되게 마련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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