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윤의 슬픈 중국

“사회주의 파괴 금지” 중국 헌법 1조가 부리는 무소불위 마법

bindol 2021. 7. 17. 06:11

“사회주의 파괴 금지” 중국 헌법 1조가 부리는 무소불위 마법

송재윤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

 

 

 

 

 

 

 

<“빈과일보”가 폐간된 2021년 6월 26일 최종판을 들고 시위하는 홍콩의 청년들/ https://therisingyouth.info/hong-kong-bids-farewell-to-apple-daily/ >

송재윤의 슬픈 중국: 문화혁명 이야기 <64회>

 

지난 6월 24일 홍콩의 자유언론 <<빈과일보>>가 중국공산당 정부의 탄압으로 폐간됐다. 전 세계가 이구동성으로 중공 정부를 규탄하자 중공 기관지 <<환구시보>>(영문판, The Global Times)는 “<<빈과일보>>는 폐간됐지만, 홍콩의 언론자유는 건재하다”며, 내정간섭을 멈추라 부르짖었다. 언론사를 문 닫게 하고 언론인들을 줄줄이 잡아가면서 대체 무슨 근거로 홍콩의 언론 자유가 건재하다 주장을 하고 있나? 그 주장의 논리적 근거는 놀랍게도 중화인민공화국의 <<헌법>>이다.

중화인민공화국 <<헌법>> 총강 제1조는 “그 어떤 조직이나 개인의 사회주의 제도 파괴도 금지된다”고 명기하고 있다. 중공 정부는 <<빈과일보>>가 중국 헌법이 허용하는 언론의 자유를 넘어 사회주의 제도를 파괴하는 활동을 일삼았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빈과일보>>는 최근 10년 간 홍콩의 반중 시위를 지지하고 옹호하는 기사를 집중적으로 게재해 왔다. 중공 정부는 중국 헌법 총강 제1조에 따라 사회주의 제도를 부정하고 파괴하는 <<빈과일보>>를 합법적으로 폐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중국 헌법에 근거해 ‘빈과일보’ 폐간 당연”

서구의 비판자들은 “미니헌법”이라 불리는 홍콩 <<기본법(基本法)>>을 근거로 홍콩의 자유를 옹호하지만, 그 역시 간단하지 않다. 홍콩은 기본법을 통해서 외무(外務)와 군사안보를 제외한 모든 방면에서 자율권을 보장받지만, 특별행정자치구로서의 홍콩의 지위는 중국헌법 제31조에 근거하고 있다. 홍콩 기본법 제22조는 중앙인민정부가 홍콩의 내치에 개입할 수 없도록 명시하지만, 제158조에 따르면 전국인민대표회의 상임위는 홍콩기본권에 대한 유권해석을 내릴 수 있다. 교묘하게 감춰져 있었지만, 1997년 반환 이후 홍콩의 자치 근거는 언제나 중국의 헌법이었다.

 

 

 

 

 

 

 

 

<“경찰은 폭력을 중단하라! 언론 자유를 사수하자!” 2019년 홍콩 시위대의 모습/ https://niemanreports.org/articles/18-weeks-and-counting-how-hong-kong-media-is-covering-the-mammoth-protests-and-fighting-for-its-own-survival/>

덩샤오핑은 “일국양제”의 원칙을 내세워 국제 사회에 적어도 2047년까지 홍콩의 자율권을 보장했건만, 시진핑은 19세기적 “자강의 중국몽”을 내세워 그 약속을 깨는 조치를 이어가고 있다. 이미 중공 정부는 “일국양제”의 외피를 벗어던졌다. 국제 사회의 비판에 더욱 강경하게 맞서며 홍콩의 탈자유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결국 문제의 핵심은 개인의 자유를 근본적으로 제한할 수 있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사회주의 헌법이며, 전체주의적 대민지배와 전일적 일당독재를 정당화하는 중국공산당의 레닌주의적 당헌(黨憲)이다. 세계인의 상식이지만, 중국은 공산혁명의 최종 목적을 위해 개인의 자유와 인권을 제약하고 박탈할 수 있는 “인민민주독재”의 사회주의 국가이다.

그럼에도 지난 반세기 미국은 중국의 정치체제는 그대로 내버려 둔 채 “묻지 마!” 경제 공생을 추구해 왔다. 닉슨의 외교노선은 경제적 자유화가 정치적 민주화로 이어진다는 나이브한 낙관에 근거하고 있었다. 그 결과 인류는 현재 “중국 딜레마”에 봉착해 있다.

닉슨, 중 경제 자유화가 민주화로 이어진다고 낙관

아이젠하워(Dwight Eisenhower, 1890-1969) 행정부(1953-1961)에서 8년 간 부통령을 역임했던 닉슨(Richard Nixon, 1913-1994)은 당시 강경한 반공 투사로서 명성이 자자했다. 닉슨과는 달리 아이젠하워는 상업이 경제적 번영을 보장하며 공산독재 권력에 대한 인민의 저항을 추동한다는 개방적 사고 하에 한국전쟁 직후부터 중국과의 무역 및 국과 정상화를 추진하려 했다. 다만 당시의 완강한 반공 분위기를 뚫을 수 없어 그 계획은 실현될 수 없었다.

1959년 미국 상원의 외교위원회는 이른바 “콘론 보고서(The Conlon Report)”에 따라 중국과의 관계 정상화 가능성을 타진하기도 했었다. 이후 1966년 미 상원은 “고립 없는 봉쇄(containment without isolation)” 전략에 따라 보다 적극적으로 대중국 포용정책의 가능성을 검토했다. 물론 냉전의 정점에선 중국과의 대화가 요지부동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었다.

닉슨은 대통령 취임 2년 전인 1967년 10월 월남전의 절정에서 <<포린 어페어스(Foreign Affairs>>지에 “베트남 이후의 아시아(Asia After Viet Nam)”란 중요한 기고문을 실었다. 닉슨은 대중 봉쇄정책은 미국에 막대한 군사비용을 초래할뿐더러 핵전쟁의 위험을 고조시킨다고 분석했다. 아울러 그는 “고립 없는 봉쇄”보다 더 적극적인 “압박과 설득”(pressure and persuasion)의 전략을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나아가 아시아의 비(非)공산 국가들이 미국의 지원 아래서 경제 번영과 군사 안보를 확립할 때, 중국이 침략 야욕을 버리고 이념적 고립 상태를 벗어나 국제 사회의 일원이 될 수 있다는 논지를 전개했다. 이후 닉슨의 외교전략이 그대로 담긴 적극적인 데탕트의 청사진이었다. (Richard M. Nixon, “Asia After Vietnam,” Foreign Affairs, Vol. 46, [Oct. 1967]).

대통령 취임 이전부터 닉슨은 헨리 키신저에 밀명을 내려 적극적으로 중국과의 대화를 추진토록 했다. 닉슨은 37대 대통령에 오른 직후, 중국과의 국교 수립을 은밀히 추진하기 시작했다. 그는 문혁의 광풍 속에서 만신창이가 된 중국이 소련과의 군사충돌로 외교적으로 고립됐던 바로 그 위기의 모멘트를 파고들었다. 빈곤의 트랩에 빠진 비대한 대륙국가 중국을 슬그머니 당겨서 자유주의 시장경제로 유인하려는 외교 작전이었다.

1971년 4월 10일 세계 탁구선수권대회에 참가 차 일본 나고야에 있던 미국의 선수단이 특별 초빙을 받아 베이징을 방문하는 이른바 핑퐁외교의 드라마가 펼쳐졌다. 이어지는 미·중 물밑대화 끝에 닉슨은 1971년 7월 15일 텔레비전 생방송으로 이듬해 중국을 방문할 계획이라 발표했다.

< 1972년 2월 21일 베이징에서 1시간가량 진행된 마오쩌둥과 닉슨의 회담. 왼편부터 저우언라이, 통역 탕원성(唐聞生, 1943- ), 마오쩌둥, 닉슨, 키신저/공공부문>

1972년 2월 21-28일 중국을 직접 방문한 닉슨은 베이징, 항저우, 상하이를 돌며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2월 21일 닉슨은 중국공산당 총서기 마오쩌둥과 1시간 동안 회담을 했다. 그 짧고도 강렬한 만남으로 닉슨은 한국전쟁 이래 적대적인 미·중 관계를 청산했다. 미국 외교사 최고의 반전(反轉)이자 냉전의 빙하를 녹이는 세계사적 대전환이었다.

 

1972년 2월 21일, 베이징에서 마오쩌둥을 만난 미국의 37대 대통령 리차드 닉슨은 의미심장한 한 마디를 남긴다.

“오랜 세월 동안 중화인민공화국에 대한 나의 입장은 마오 주석 및 저우 총리와는 완전히 달랐소. 이제 세계의 상황이 바뀌었음을 인정했기에, 한 국가 내부의 정치철학이 중요한 게 아니라는 점을 이제 우리가 인정하기에 오늘 이 만남이 성사될 수 있었소. 중요한 것은 [한 국가의 정치철학이 아니라] 세계에 향한, 또 우리 미국에 대한 그 나라의 정책입니다.” (<<닉슨회고록 The Memoirs of Richard Nixon>>에서)

“정치철학”의 차이 따윈 일단 덮어두고 대외 정책의 유·불리만을 근거로 국가 관계를 재정립하자는 발상이었다. 냉전 시기 이데올로기 대립을 종식하고 실용적인 윈윈의 경제 공존을 모색하는 데탕트 외교 전략의 시작이었다. 닉슨의 이 한 마디가 이후 반세기 미국의 대중 정책을 결정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닉슨의 방중을 성사시킨 반대급부로 마오쩌둥은 미국의 승인을 얻어 유엔 안보위원회에 가입하는 외교적 쾌거를 거머쥐었다. 장제스의 중화민국은 타이완 공화국으로 국명이 바뀌어 구석으로 밀려났다. 닉슨의 적극적 구애 끝에도 마오는 미국과의 국교 정상화 및 경제적 협력 관계의 체결까지 나아갈 순 없었다.

결국 마오 사후 2년이 지난 1978년 12월 덩샤오핑은 개혁개방의 시대를 개창했다. 대기근의 참상과 문화혁명의 광기를 겪은 후였지만 중공정부는 공산주의 이념 자체를 비판하거나 폐기하지는 않았다. 대신 레닌주의 정치체제를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적당히 뒤섞어서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라 명명했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물과 기름처럼 서로 섞일 수가 없지만, 덩샤오핑은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외치며 “맨발로 미끄러운 강바닥을 조심조심 건너자!” 했다.

<1972년 2월 방중 당시 만리장성에 간 닉슨과 그의 부인/ 공공부문>

1979년 1월 29일-2월 5일 덩샤오핑은 미국을 방문해 본격적으로 국교 정상화를 추진했다. 그해 3월 1일 워싱턴과 베이징에 양국의 대사관이 설치됐다. 일사천리로 전개된 미·중 관계의 정상화는 좋든 싫든 닉슨 패러다임의 실현이었다. 덩샤오핑은 닉슨의 대중 외교 전략을 붉은 카펫처럼 밟고서 개혁개방의 물꼬를 텄기 때문이다.

“미국, 중국의 도광양회 전략에 말려들었다”

2020년 7월 23일 미국 국무부 장관 폼페이오(Mike Pompeo, 1963- )는 캘리포니아 요르바 린다(Yorba Linda)의 닉슨 대통령 도서관/박물관을 찾아 미국 대중정책의 일대 전환을 알리는 의미심장한 연설을 했다. 지난 반세기 미·중 관계를 지배해 온 미국 외교의 기본 노선을 부정하고 비판하기 위함이었다.

폼페이오의 연설에 앞서 미국 정부의 중요 인물 3인이 나서서 중국을 먼저 때린 바 있다. 중국을 타격하는 1번 타자는 국가안보고문 오브라이언(Robert O’Brien, 1966- )이었다. 그는 2020년 6월 24일 아리조나주 피닉스에서 “중국공산당의 이데올로기와 글로벌 야심”을 고발했다. 그는 미국의 정가, 학계 및 언론계는 암묵적으로 중국의 경제적 자유화는 중국의 정치적 민주화를 추인한다는 근거 없는 낙관 위에서 2001년 중국을 WTO에 가입시키고, 중국 내 인권유린과 지적 재산권 침해에 눈을 감아왔다며 포문을 열었다.

제2번 타자는 FBI국장 레이(Chris Wray, 1966- )였다. 그는 2020년 7월 7일 중국공산당의 첩보행위가 미국에 대한 경제적·안보적 위협”을 경고하면서 놀랍게도 중국이 1억 5천만 미국인의 신상정보를 해킹했다고 발표했다.

이어서 법무부장관 바(William Barr, 1950- )가 타석에 들어섰다. 그는 7월 16일 미시간의 포드(Gerald R. Ford) 대통령 기념관에서 세계 경제와 정치질서를 위협하는 중국정부의 전체주의적 야욕을 비판했다. 그는 덩샤오핑의 영악한 “도광양회(韜光養晦)” 전략에 순진한 미국의 전략가들이 말려든 결과, 미국이 전체주의 국가 중국의 경제적·기술적 웅비에 복무하는 어리석음을 범했다고 지적했다.

마지막 4번 타석에 들어선 폼페이오는 앞선 3인의 연설이 “지난 수십 년간 쌓인 미·중 사이의 심대한 불균형”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치밀하게 기획된 이념전의 포탄이라 정의했다. 이어서 그는 미국의 경제, 미국의 자유, 나아가 세계의 자유 민주주의 국가들에 대한 중국의 위협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면서 중국공산당의 행동방식을 근본적으로 고쳐야 한다고 일갈했다. 그는 중국공산당이 “잠재적 동맹국들을 소외시키고, 국내외의 신뢰 기반을 무너뜨리며, 지적 재산권과 예측 가능한 법의 지배를 거부하는” 등 구소련이 범했던 오류를 반복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미국이 구소련을 붕괴시켰듯 중국공산당의 지배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겠다는 포부를 드러냈다. 대중(對中) 이념전쟁의 선전포고가 아닐 수 없었다.

 

 

 

 

 

 

 

 

<2021년 7월 1일 호주 멜번에서 개최되는 반중국 시위의 포스터. 호주에 체류하는 반중 아티스트 “Badiucao” 트윗/ https://twitter.com/badiucao/status/1410090858607628289/photo/1>

이어서 등장한 바이든 행정부의 대중 전략 역시 트럼프 행정부의 전략을 그대로 이어가고 있다는 분석이 최근 미국 언론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바이든 행정부는 일본, 인도, 호주와 함께 쿼드(Quad) 협의체를 발족시키고, 타이완과의 경제협력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또한 중국 기업에 대한 트럼프 정권의 블랙리스트를 더 확장하고, 틱톡(TikTok)을 포함한 중국 앱(app)에 대한 금수 조치를 이미 강화했다.

반세기전 닉슨은 중·소 분쟁의 틈을 파고드는 기민한 쐐기전략으로 냉전의 수렁에서 극빈의 나락에 떨어진 중국을 바깥세계로 끌어당겼다. 자유무역과 경제적 연대가 냉전의 빙하를 녹이고 독재의 발톱을 뭉갠다는 닉슨의 확신은 탈냉전을 종식하는 세계사적 변화를 추인했다. 중국의 경제성장은 그러나 중국 정치의 자유화로 이어지지 않고 있다. 닉슨 방식의 외교 전략은 실효성을 잃었나? 트럼프에서 바이든으로 이어지는 대중 강경노선은 닉슨 패러다임의 종언을 상징한다. 돌이켜보면, “정치철학”은 묻지 않고 “정책”의 유·불리만을 따지는 실용주의 외교노선 역시 냉전 시기의 로맨티시즘이 아닐까. <계속>

#송재윤의 슬픈 중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