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민족 부흥”… 문혁 때 죽였던 공자 다시 불러낸 까닭은?
송재윤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
입력 2021.07.17 09:05
<1974년 경 비림비공 운동의 포스터. 린뱌오가 공자를 안고 쓰러져 있는데, 뒤에 “극기복례(克己復禮)”의 현판이 있다. “린뱌오와 콩라오얼(孔老二, 공자의 비칭)을 철저히 비판하라!”/ 공공부문>
송재윤의 슬픈 중국: 문화혁명 이야기 <66회>
문혁 시기 중국의 관변학자들은 공자(孔子, 기원전 551-479)를 노예제의 복원을 희구했던 노예주의 대변인이라 비판했다. 그들은 공자를 “공씨 둘째 아들” 쯤을 의미하는 “콩라오얼(孔老二)”이라 불렀다. “콩라오얼의 추악한 면모” “콩라오얼의 죄악(罪惡) 일생” “콩라오얼 죄악사(罪惡史)” 등등 문혁 시대의 정치 포스터뿐만 아니라 아동용 만화도 공자를 역사의 죄인으로 몰고 갔다.
문혁 이후 만신창이로 내버려졌던 공자는 2000년대 중반부터 중국공산당의 부름을 받고 다시 살아났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 스타디움에서 아이들이 세계를 향해 외친 한 마디는 바로 “유붕자원방래 불역낙호(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멀리서 친구가 오니 즐겁지 아니한가!)”라는 “공자님 말씀”이었다. 이후로 공자는 “중화민족”의 정신적 스승으로 숭상되고 있다.
중공정부는 대체 왜 공자를 되살려야만 했을까?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만으로는 14억의 다민족 국가를 다스리기 버거웠나? 경제규모 세계 2위의 대국에 걸맞은 소프트 파워가 필요했나? “중화민족의 부흥”을 위해선 새로운 중화주의의 이념이 필요했나?
<2010년도 6월 20일 당시 부주석이었던 시진핑은 호주 왕립 멜번 공과대학에서 중의학 공자학원 설립의 제막식을 거행하고 있다./ Foreign Policy>
시진핑, 집권 전부터 유가 부흥운동 추진
현 중국공산당 총서기 시진핑(習近平, 1953- )은 비림비공(批林批孔) 운동이 전국적으로 개시되던 1974년 1월 아홉 번의 실패 끝에 중국공산당에 입당했다. 이듬해 그는 공·농·병(工·農·兵) 학원(學員)의 자격으로 지방 영도자의 추천을 받아 칭화(淸華)대학에 입학했다. 그는 누구보다 공자를 역사의 악인으로 몰아가던 당시의 분위기를 잘 기억하고 있을 터다. 그럼에도 그는 집권 전부터 작심한 듯 유가(儒家) 부흥운동을 추진했다.
2014년 9월 24일 공자 탄신 2565년 국제학술 연구토론회에서 시진핑은 “공자와 유학의 연구는 중국인의 민족특성을 인식하고, 오늘날 중국인의 정신세계의 역사적 유래를 인식하는 중요한 길”이라고 말한 바 있다. 시진핑의 강력한 후원 아래서 중국 교육부는 2019년까지 6대륙의 수십 개 국에 530개의 “공자학원”을 설립했으며, 조속히 그 숫자를 1000개로 확대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중공 정부의 지원 하에 공학(孔學, 공자의 가르침)이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와 접붙은 어색한 상황이다. 과연 유학이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과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을까?
<2020년 8월, 캐나다 토론토에서 거행된 공자학원 반대 시위/ twitter.com>
마오쩌둥 사상과 유학이 공존할 수 있나
물론 공자는 중화문명의 상징적 인물이다. 그는 2500년 전 춘추시대 노나라에 태어나 수신(修身)의 방법과 선정(善政)의 원리를 간명하고 진솔한 언어로 설파했다. 그의 행적이 담긴 <<논어(論語)>>는 동아시아 각국에서 성경처럼 읽혔다. 그가 편찬·정리했다는 유교의 고경(古經)은 중화제국 및 동아시아 제국(諸國)의 국가이념이 됐다. 그의 행적은 동아시아 사인(士人)들의 귀감이 되었고, 그의 혼령은 공묘(孔廟)에 배향됐다. 그가 설파한 인·의·예·지(仁·義·禮·智)는 국경을 넘고 문화를 가로지르는 인류의 보편가치라 할 수 있다. 오늘도 공자는 석가모니, 소크라테스, 예수와 함께 기축시대(the Axial Age) 4대 성인(聖人)으로 칭송되고 있다.
문제는 불과 40-50년 전 중국공산당이 공자를 불러내 역사의 법정에 세워놓고 헐뜯고 깨물고 짓밟았다는 사실이다. 그 역사의 법정에서 공자의 변호인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 역사의 법정에 나선 모두가 피고인 공자를 매도하고 폄훼하고 타격했다. 마오쩌둥은 중국의 역사에서 암세포 도려내듯 공자의 유산을 청소하려 했다.
그 모든 과정이 날마다 매스컴을 타고 전국의 모든 인민에게 보도됐다. 공자는 “비림비공”의 구호 아래 회생불능의 타격을 입는 듯했다. 공자 비판은 곧 유가 비판으로 확산됐다. 이어서 법가를 재평가하고 유가를 비판하는 “평법비유(評法批儒)” 운동이 일어났다. 이때부터 중국철학사는 “유법투쟁(儒法鬪爭, 유가와 법가의 투쟁)”으로 해석됐다. 물론 그 배후는 최고영도자 마오쩌둥이었다.
마오쩌둥 “유가, 입으로만 인의도덕 외치며 역사의 시계 거꾸로 돌려”
마오쩌둥은 적대세력에 대해선 비타협, 불관용, 무자비의 원칙으로 일관했던 공산-근본주의자(communist fundamentalist)였다. 그는 또한 무산계급의 혁명 의지에 불을 지피면 단시간에 역사적 비약을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오늘날 중국헌법의 이념적 기초로 명기된 “마오쩌둥 사상”이란 공산-근본주의와 돈키호테적 낭만주의(Quixotic Romanticism)의 결합이 아닐까?
1950-60년대 내내 마오쩌둥은 “제국주의,” “봉건주의,” “관료-자본주의,” “수정주의”와 투쟁했다. 그런 그의 심리 밑바탕엔 극단적 이분법과 적·아(敵·我)의 구분이 깔려 있었다. 그가 구사한 이분법은 속류 마르크시즘의 “유물변증법”에 기초하고 있었다. 스탈린 시대 “소비에트 유물변증법”에 따르면, 모든 철학의 문제는 “의식과 존재”의 관계로 환원된다.
철학적 테제로서 엄밀성은 떨어지지만, 그 정치적 함의는 명료하다. 공자, 맹자, 칸트, 헤겔 등등 그 어떤 사상가가 무슨 사상을 설파했든, 그 누구도 자신의 계급적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유물변증법에 따르면, 인간은 누구나 계급의 대변자며, 구조의 수인(囚人)일 수밖에 없다. 한 사람의 존재(계급, 재산 등)가 그들의 의식(정치성향, 가치관)을 미리 결정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변증유물론의 관점에서 공산주의 이론가들은 세계철학사를 무산계급을 대변하는 진보적 “유물론” 대 착취계급을 대변하는 반동적 “관념론”의 투쟁으로 묘사한다.
<1978년 베이징 시가 풍경: “마르크스주의, 레닌주의, 마오쩌둥 사상 만세!”/ 공공부문>
중국의 관변 철학자들 역시 중국사상사의 전 과정을 “유물론(唯物論)”과 “유심론(唯心論)”의 대립투쟁으로 해석했다. 이들의 관점에 따르면, 유물론은 근로대중의 이익을 대변하며 유심론은 착취계급의 이익을 대변한다. 인류의 역사를 선(善)의 진영과 악(惡)의 진영 사이의 대립·투쟁으로 파악하는 마니교적 이분법(Manichaean dichotomy)이었다.
1973년 8월 5일 마오쩌둥은 중국 역사에서 전개됐던 “유법투쟁(儒法鬪爭)”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역대로 어떻게든 행동을 하고 무슨 일이라도 성취한 정치가는 모두 법가였다. 그들은 법치를 주장했으며, 후금박고(厚今薄古, 현대를 중시하고 고대를 경시)했다. 유가는 입으로만 노상 인의도덕을 외치면서 후고박금(厚古薄今)을 외쳤으니, 그들은 역사의 시계를 거꾸로 돌렸다.” (<<毛澤東年譜 1949-1976>> 第6卷, 490)
마오쩌둥답게 2천 년 중국사의 가치 체계를 180도 뒤집는 발상이었으나 새로운 건 아니었다. 이미 1920년대 “5.4운동” 때부터 공자 비판은 이미 거세게 일었다. 1937년 4월 29일 현대중국 문학의 거장 루쉰(魯迅, 1881-1936)은 공자를 비판하면서 “중국의 우민들처럼 그렇게 공자를 이해하는 자들은 아마도 세계 어디에도 없을 듯하다”고 적은 바 있다. 20세기 초부터 중국의 지식인들은 경전의 기록을 의심하고 검증하는 이른바 “의고풍(擬古風)”에 휩싸여 있었다. 중화제국의 몰락은 곧 공자로 상징되는 유교적 세계관의 붕괴를 의미했다. 그러한 맥락에서 문혁 시기 공자 비판은 20세기 초부터 진행된 의고풍이 최극단이었다.
문혁 당시 관변학자들 “공자는 노예제를 지키려했던 사상가”
문혁 당시 중국의 역사학자들은 공자를 노예주의 대변인이라 비판했다. 역사학자들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의 공장 및 노동현장에서 고된 노동을 마친 후 마오쩌둥 사상과 혁명의 이론을 공부했던 전국 각지의 노동자 집단도 집체적인 공자 비판에 나섰다. “비림비공” 운동이 한참이던 1974년 중공중앙의 기관지 <<홍기>>제1기에 실린 그들의 주장을 소략하게 소개하면·······.
“공자는 완고하게 노예제를 지키려 했던 사상가였다.” “공자의 모든 언동은 노예 해방의 위대한 역사적 흐름에 정면으로 맞부딪혔다.” “공자는 복고적이고 퇴행적인 정치적 입장 때문에 노예들에게 맹렬한 공격을 받았다.”
“[공자가 되살리려 했던] 주도(周道)란 서주 노예제 전성시기 주공이 건립한 일련의 제도다. 노예제가 몰락하던 시기, 공자는 망령되이 역사의 발전을 막고, 주도(周道)를 회복하려 했다.” “공자는 멸망한 노예제 국가를 부활시키고 단절된 노예주의 세습을 기도했다.”
“공자는 <<춘추>>를 편찬하여 여론상 노예주 계급의 반혁명적 전정(專政)을 강화하려 했다.” “공자는 노예에 대한 노예주의 착취와 억압을 지키기 위해 역사 왜곡을 극진히 했다.” “공자는 몰락한 노예주 계급을 대표해서 역사를 왜곡하는 악랄하고 용렬한 선례를 개창했다.”
물론 <<논어>> 어디를 읽어 봐도 공자가 명시적으로 노예제도를 옹호하거나 노예제도의 회복을 주장한 대목은 없다. 그럼에도 당시의 지식인들은 공자가 노예제를 옹호한 역사의 반동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당시 중국의 역사학자들은 마르크스의 5단계 역사발전론을 기계적으로 중국사에 적용한 결과였다. 그들의 도식에 따르면, 주공(周公)이 통치하던 서주(西周)는 노예제 사회였다. 이어지는 춘추시대는 대규모 농민 봉기의 빈발로 노예제가 급속하게 와해되던 급변기였고, 전국시대는 대지주의 봉건제가 노예제를 대체했다.
<1974-6년 경 중국의 포스터: “유가와 법가의 투쟁사를 연구하여, ‘비림비공’을 더욱 심화하자!”/ 공공부문>
춘추시대의 혼란기를 살았던 공자는 오매불망 주공을 흠모하며, 주공이 세운 서주의 예제(禮制)를 되살리려 했다. 마르크시즘의 도식에 따르면, 주공의 예제란 다름 아닌 노예제 사회의 신분질서 및 정치체제에 불과했다. 그러한 관점에서 중국의 지식인들은 공자가 급속하게 무너지는 노예제의 복원을 시도했다고 맹렬한 비난을 퍼부었다.
전국시대의 맹자(孟子, 대략 372-289) 역시 노예제 옹호자의 오명을 써야만 했다. 당시 중국의 학자들에 따르면, “어진 정치(仁政)”의 이상도 맹자가 노예제를 복원하려는 역사적 반동(反動)의 구호였다. 맹자 역시 계급 모순이 첨예하던 전국시대에 산발적으로 일어나던 농민 봉기의 현실은 외면한 채 제후들만 보고 “어진 정치”만을 설파했다. 노예주 제후들을 향해 “어진 정치”를 설파한 맹자를 과연 노예주의 대변이라 부를 수 있을까? 문혁 시기엔 그러한 의문 제기조차 반혁명 행위로 간주됐다.
“유학, 천하를 다스리는 원리... 공자는 중화민족의 정신적 스승”
오늘날 중국에선 문혁 시절 전국을 도배했던 계급투쟁, 영구혁명 등의 구호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 대신 중국공산당은 부강(富强), 화해(和諧), 평화 등을 최고 가치로 내세우고 있다. 이에 부응해 중국의 연구자들은 유학을 천하를 다스리는 “치리(治理, governance)”의 원리로 재해석하고 있다. 한때 노예주의 대변인으로 매도됐던 공자가 중국공산당의 후원 위에서 “중화민족”의 정신적 스승으로 재평가되고 있다.
<산둥성 취푸에 건립된 세계 최대의 공자상(孔子像), 높이 72미터/ 공공부문>
공자의 극적인 부활은 역설적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을 내건 중국공산당의 이념적 위기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오늘날 중국은 세계 최고의 빈부격차와 도농차이를 보인다. 중국공산당은 유가의 화해(和諧)와 치리(治理)를 전면에 내세워 계급투쟁과 사회갈등을 무마하려 한다. 공자를 죽이든 살리든 중공 정부는 변함이 없다. “중화민족의 부흥”의 깃발을 들고 유교를 선양(宣揚)하지만, 속셈은 “공산당 일당독재”의 강화일 뿐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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