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 수십만냥 빼앗아간 명 “은사다리도 바쳐라”
중앙일보
입력 2021.07.02 00:32
1608년 조선에 온 명나라 사신 일행을 그린 반차도(班次圖). 그림 왼쪽 가운데 가마를 타고 있는 사람이 명나라 사신이다. [사진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올 때는 사냥개처럼 갈 때는 바람처럼(來如獵狗去如風)/ 모조리 쓸어가니 조선 천지 텅 비었네.(收拾朝鮮一罄空)/ 오직 청산만은 옮길 수 없으니(惟有靑山移不動)/ 다음에 와서 그림 그려 가져가리.(將來描入畫圖中)’
음력 1602년(선조 35) 3월, 조선을 다녀간 명나라 사신 고천준(顧天埈)을 수행했던 동충(董忠)이란 인물이 남긴 시구다. 고천준이 조선에 온 것은 명에서 황태자를 책봉한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고천준은 의주로 입국한 순간부터 한양에 도착할 때까지 온갖 명목으로 각종 물자를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조선 조정과 지방 관리들은 대국이자 상국의 사신인 그의 요구를 거부할 수 없었다. 고천준이 가장 많이 챙긴 것은 은이었다. 그의 탐욕과 징색(徵索)에 놀란 『선조실록』의 사신(史臣)은 “고천준의 끝없는 욕심 때문에 조선 천리가 마치 전쟁을 치른 것 같았다”고 탄식했다. 같은 중국인 입장에서도 고천준의 행태가 너무 심했다고 생각했는지 동충은 위와 같은 풍자시를 남겼다.
건국 이래 명에 사대(事大)했던 조선은 세종 초년까지 해마다 은 700냥을 공물(貢物)로 바쳤다. 700냥은 그다지 많은 양은 아니지만 매년 그것을 꼬박꼬박 확보하기는 쉽지 않았다. 은광이 별로 많지 않은 데다 채굴 과정에 공역이 많이 들고 민폐도 심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지방 수령들은 자기 고을에서 은광이 발견돼도 숨기기에 급급한 실정이었다.
은이 난다는 사실을 숨기려 한 조선
중국 북경에서 조선 사신을 송별하는 장면을 그린 ‘송조천객귀국시장도’.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명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려면 은을 바칠 수밖에 없다고 여겼던 태종은 고민했다. 은광을 찾기 위해 곳곳에 채방사(採訪使)를 파견하고, 지방 관아에서 사용하는 은그릇 등을 몰수했다. 또 사찰에서 금과 은으로 불상을 도금하거나 사경(寫經·불경을 베껴 쓰는 것)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했다.
그럼에도 은을 마련하는 것이 여의치 않자 세종은 방향을 바꾼다. 명 황제에게 사신을 보내 공물에서 금과 은을 제외해 달라고 요청했다. 금과 은 대신 다른 토산물을 바치겠다고 제의했다. 1429년 세종은 이복동생 함녕군(諴寧君)을 북경에 보냈다. 명의 신료들은 조선이 금과 은을 공물로 바치는 것은 태조 주원장(朱元璋)이 정한 조법(祖法)이므로 함부로 바꿀 수 없다고 반대했다. 하지만 명의 선덕제(宣德帝)는 “조선이 지성으로 명을 섬겨 왔다”고 찬양하면서 세종의 요청을 선선히 들어주었다. 그러면서 함녕군에게 도리어 은 100냥을 하사한다. 명이 일찍부터 금과 은을 공물로 요구한 것이 조선의 충성심을 떠보기 위한 의도에서 비롯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명나라 은괴
여하튼 1429년 이후 조선에서는 은이 나지 않는 것으로 치부됐다. 은을 더는 공물로 바치지 않았고, 조선에 오는 명 사신들에게 주는 예물도 모시·부채·인삼·화문석 같은 토산물로 충당했다. 그렇다면 고천준은 어떤 배경에서 ‘은이 나지 않는 조선’에서 은을 긁어내기 위해 광분했던 것일까.
1601년 일본 은화
조선이 명에 대해 ‘은이 나지 않는 나라’라고 내세웠지만 16세기가 되면 사정이 달라진다. 함경도 단천(端川) 등지에서 은이 자못 많이 생산되고, 일본산 은이 다량으로 유입되면서 그것을 밑천으로 중국과의 사무역(私貿易)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일본은 조선 제련술 받아들여 발전
은 생산이 늘어난 데는 새로운 제련술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갓 채굴된 은광석에는 납(鉛)을 비롯한 불순물이 적지 않게 함유돼 있다. 따라서 순은(純銀)을 얻으려면 은과 납을 분리하는 제련술이 필수적인데, 1503년(연산군 9) 조선에서는 상놈 김감불(金甘佛)과 노비 김검동(金儉同)에 의해 연은분리법(鉛銀分離法)이란 신기술이 개발됐다. 은광석을 아연과 함께 가열하여 혼합시킨 다음 회를 섞어 다시 끓이면 마지막에는 재가 아연을 흡수하여 순은만 남게 된다. 그래서 이 기술을 회취법(灰吹法)이라고도 불렀다.
일본 에도시대 회취법(灰吹法)으로 은을 구하는 모습. 도쿄 소학관 발행 『에도시대관』(2002)에서.
명과의 무역을 위한 밑천으로 은이 필요했던 부상(富商)이나 관리들은 회취법에 주목했다. 1539년(중종 34), 전주판관(全州判官) 유서종(柳緖宗)은 조선 상인뿐 아니라 왜상(倭商)과 결탁하여 자신의 집에서 은을 제련했다가 발각돼 탄핵을 받는다. 유서종과 왜상과의 관계가 암시하듯이 회취법은 일본으로 전래했다. 그리고 16세기 중반 이후 회취법을 기반으로 일본의 은 생산이 폭증했던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조선은 다시 은과 관련된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조선에 참전했던 명군 지휘부는 양곡을 비롯한 군수물자를 현물로 수송하는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 은을 활용하려 했다. 은을 가져와 조선 현지에서 군수물자를 매입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계획은 곧바로 난관에 부딪힌다. 당시 조선에서는 무역 상인을 비롯한 극히 일부 계층만 은을 결제 수단으로 사용했을 뿐 대다수 백성은 그렇지 않았다. 면포와 쌀을 화폐로 사용했던 그들은 명군 장졸들이 다가와 은을 내밀면서 거래를 요구하면 손사래를 쳤다.
16세기 중반 명에서는 조세와 재정이 은납(銀納)을 통해 운용되고 민간의 거래 또한 대부분 은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월급을 은으로 받았던 명군 장졸들은 “조선에서는 은이 있어도 술과 고기를 살 수 없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명군 지휘부는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전쟁이 길어지면서 전비(戰費) 부담이 늘어나자 명군 지휘부는 은광을 개발하라고 촉구했다. 하지만 명이 또다시 은을 공물로 요구할지도 모른다고 우려한 조선 조정은 은광 개발에 소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선조는 명군 장수와 면담하다가 은 이야기가 나오면 화제를 급히 딴 데로 돌리기도 했다. 답답해진 명군 장수들은 중국인 광부들을 데려와 곳곳을 돌아다니며 직접 은을 채굴했다. 그들은 “왜 부(富)의 원천인 은을 채굴하지 않느냐?”고 조선 군신들을 질타했다. 여하튼 임진왜란을 계기로 명은 조선에도 은광이 많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명은 조선에 참전하면서 700만냥 이상의 은을 전비로 썼다. 대략 환산해도 263톤이 넘는 막대한 액수였다. ‘조선을 구하기 위해’ 어마어마한 비용을 지출한 데다 조선에서도 은이 난다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일까. 전쟁이 끝나자 명의 ‘보복’이 시작된다.
고천준의 은 징색은 바로 그 신호탄이었다. 1608년 광해군의 왕위 계승 자격을 심사한다는 명목으로 왔던 엄일괴(嚴一魁)를 필두로 1634년 소현세자를 책봉하려고 왔던 노유녕(盧維寧)까지 명 사신들은 일곱 차례에 걸쳐 도합 수십만냥의 은을 뜯어갔다.
저자세로 일관한 광해군·인조의 한계
특히 1610년(광해군 2)에 왔던 염등(冉登)의 행적은 가관이었다. 상경하는 도중 임진강의 다리가 큰비 때문에 유실되자 무교가(無橋價)라는 황당한 명목으로 은 1000냥을 받아냈다. 한양에서는 ‘천조국(天朝國)’ 사신인 자신을 위해 ‘은사다리(天橋)’를 만들어 달라고 생떼를 썼다. 1625년 인조를 책봉하러 왔던 왕민정(王敏政) 등은 13만냥 이상의 은을 강탈했다. 임진왜란의 후유증에서 아직 회복되지 못한 상황에서 명 사신들의 은 수탈까지 더해지면서 조선의 재정은 엉망이 될 수밖에 없었다.
자력으로 일본의 침략을 이겨내지 못하고 명의 원조에 기댔던 순간부터 비극이 잉태됐다. 명 사신들은 ‘망해가던 나라를 다시 살려낸 은혜(再造之恩)’를 베풀었으니 조선이 명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겼다. 첩자(妾子)이자 차자(次子)로서 왕위에 올라 정통성에 문제가 있었던 광해군, 반정(反正)이라는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즉위하여 권력 보위에 조바심이 컸던 인조는 모두 명에 저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명 사신들의 은 징색은 바로 이 같은 배경에서 지속됐다.
임진왜란 무렵 은은 오늘날의 달러처럼 국제통화였다. 중국은 비단과 생사·도자기를 팔아 전 세계의 은을 흡수했고, 일본은 세계 2위의 은 생산국으로 떠올랐다. 반면 은 생산도 변변찮은 데다 은과 바꿀만한 이렇다 할 상품도 보유하지 못했던 조선은 주기적으로 막대한 양의 은을 명에 수탈당했다. 전란으로 망가진 민생과 경제를 살리는 데 써야 할 은이 ‘정치적으로’ 지출됐던 셈이다. 그것은 임진왜란 이후 조·명(朝明) 관계가 불러온 질곡이자 비극이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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