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네덜란드 지배 이후 동아시아 화약고 400년
중앙일보
입력 2021.06.18 00:24
‘뜨거운 감자’ 대만
대만과 마주보고 있는 중국 푸젠성(福建省) 샤먼(廈門) 언덕에 있는 정성공 동상. 정성공은 네덜란드와의 전쟁에 승리하며 대만을 정복했다. [중앙포토]
지난달 21일, 한·미 정상회담 직후에 나온 공동성명과 지난 14일 G7 정상회의가 끝난 뒤 발표된 공동성명에서 모두 대만(臺灣) 문제가 언급됐다. 두 성명에는 “대만해협의 평화와 안정 유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는 문구가 들어 있다. 중국은 이번 성명에 대해 격한 반응을 보였다. 한·미 양국에 대해 “대만 문제는 중국의 내정이므로 외부 세력은 간섭하지 말고 언행에 신중을 기하라”고 경고했다. G7 공동성명이 나온 다음 날인 지난 15일에는 역대 최대인 28대의 군용기를 대만 방공식별 구역에 무단 진입시켜 무력시위까지 벌였다.
대만을 둘러싼 군사적 긴장이 심상치 않다. 일각에서는 미·중 사이에 전쟁이 벌어질 경우, 그 발화점은 대만이 될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온다. 미·중 양국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우리로서는 대만 문제를 결코 남의 일로 치부할 수 없다. 실제로 17세기 후반과 20세기 중반, 동아시아 격동 속에서 한반도와 대만은 직·간접으로 영향을 주고받은 경험이 있다. 대만은 어떤 과정을 거쳐 동아시아 화약고가 됐을까.
‘아름다운 섬’에 몰려온 서구 열강들
정성공 초상화. [중앙포토]
대만이라는 이름을 널리 쓰게 된 것은 17세기 이후다. 그 전에는 유구(流求)·북항(北港)·동번(東番), 혹은 고산국(高山國)이라 칭하기도 했다. 서구인들은 20세기 중반까지 대만을 포르모사(Formosa·福爾摩沙)라고 불렀다. ‘아름다운 섬’이라는 뜻인데 16세기 말, 포르투갈 선원들이 대만섬을 지나다가 수려한 풍광에 감탄하여 “일라 포르모사(Ilha Formosa)”라고 했던 데서 비롯했다고 한다.
역대 중국 왕조들은 대만에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송대 복건(福建) 상인들이 대만을 일본과의 무역 거점으로 활용하고, 원이 대만 옆의 팽호도(澎湖島)에 군사기지를 설치하기도 했지만 대만은 이후에도 대륙 왕조의 교화가 미치지 않는 ‘화외(化外)의 땅’이었다.
16세기 말, 대륙 한인들의 이주가 증가했지만 대부분은 어민이나 난민(難民)·해도(海盜)였다. 또 복건·절강·마카오 등지와 규슈를 오가며 밀무역을 벌였던 왜구(倭寇)들도 대만 북부 지역에 자주 출몰했다.
대만을 정복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1624년 구축한 젤란디아성. 베이징 상무인서관에서 발간한 『천조략영』(2018)에서. [중앙포토]
확실한 지배세력이 없이 무주공산(無主空山) 같았던 대만을 차지했던 나라는 네덜란드(和蘭)였다. 1624년 화란 동인도회사는 지금의 대남(臺南) 지역에 젤란디아(Zeelandia·熱蘭遮)성을 구축했다. 화란은 이후 대만을 거점으로 중계무역을 활발하게 벌였다. 중국산 생사·면화·사탕·도자기 등을 일본 히라도(平戶)로 가져가 은과 교환하고, 그것을 동인도회사 본거지인 바타비야(자카르타)로 운반하여 후추 등 향료로 바꾸는 무역을 통해 막대한 이득을 챙겼다.
대만을 지배하는 과정에서 농업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동인도회사는 복건 등지로부터 한인들을 끌어들였다. 농기구와 종자, 소(牛)까지 제공한다는 유인에 수많은 한인이 대만으로 건너왔다. 그런데 동인도회사는 이후 한인 농민들을 혹사하고 세금을 가혹하게 거둬 원성이 높아졌다. 결국 1652년 한인 곽회(郭懷)가 이끄는 농민 1만8000여 명이 봉기했다.
하지만 농기구와 죽창 등으로 무장했던 반란군은 화란인들의 월등한 화력에 맥없이 무너지고 만다. 대학살을 벌여 반란을 진압한 동인도회사는 선교사들을 데려와 기독교를 전파하고, 학교 등을 세워 원주민인 고산족(高山族)을 회유했다. 또한 고산족들에게 총을 나눠주어 한인들을 탄압하는 등 이이제이(以夷制夷) 방식으로 통치를 이어갔다.
영속될 것처럼 보였던 화란의 대만 지배는 정성공(鄭成功·1624~1662)에 의해 종식된다. 정성공은 복건 출신의 밀무역자인 아버지 정지룡(鄭芝龍)과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군사·경제력을 갖춘 정지룡은 1644년 명 멸망 후 황족 융무제(隆武帝)를 받들고 반청복명(反淸復明) 운동에 가담했다. 하지만 1645년 융무제가 죽자 정지룡은 청에 투항한다. 정성공은 아버지가 변심한 뒤에도 계속 반청 대열의 선두에 선다.
정성공은 부친에게 물려받은 군단과 일본 무역을 통해 축적한 자금을 바탕으로 청을 공격하는 북벌(北伐)을 도모했다. 하지만 1659년 남경(南京) 공략에 실패하면서 북벌은 좌절된다. 재기를 꾀하던 그는 대만으로 눈을 돌려 1661년 12월, 젤란디아성을 함락시켰다. ‘반청의 수괴’ 정성공을 껄끄럽게 여긴 청은 정지룡을 처형하여 보복한다. 그리고 천계령(遷界令)을 발포했다. 대만과 인접한 대륙 연안 주민들을 내륙으로 이주시키는 조처였다. 연안 주민들과의 접촉을 원천적으로 차단하여 정성공을 고사시키겠다는 책략이기도 했다.
정성공은 1662년 세상을 떠났지만, 대만은 이후에도 그의 후손들에 의해 반청의 근거지로 자리 잡았다. 1673년 오삼계(吳三桂) 등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정성공의 아들 정경(鄭經)도 호응하여 복건 곳곳을 공격했다. 정경이 거병하자 북경에서는 “조선이 정경과 합세하여 쳐들어올 것”이라는 유언비어가 돌았다. 실제로 당시 조선에서는 정경의 거병을 틈타 청을 공격하여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하지만 북벌 시도는 실패했고, 정경은 1680년 세상을 떠났다.
전략적 가치에 새로 눈을 뜬 청나라
중국 샤먼시에서 동중국해로 출항하는 중국 전함들. [중앙포토]
정경의 반란을 계기로 청은 대만의 전략적 중요성을 절감한다. 1683년 8월, 수군 제독 시랑(施琅)을 보내 대만을 함락시켰고, 이듬해 5월 대만부(臺灣府)를 설치하여 복건성에 소속시켰다. 대만이 비로소 청의 판도 속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1684년 이후에도 청은 대만인들을 제대로 장악하지 못했다. 당시 대륙에서 온 이주민들은 정치적 억압에서 벗어나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려고 했다. 이들은 청 당국의 가혹한 통치에 저항했다. 1684년부터 1895년까지 대만에서는 대략 159차례의 반란이 일어났다. 이 때문에 청 관원은 “대만인들은 3년에 한 번은 작은 난동, 5년에 한 번은 큰 난동을 벌인다”고 푸념했을 정도였다.
풍부한 자원을 지닌 데다 지리적 요충에 위치한 대만에 대한 서구 열강의 관심은 19세기에도 이어졌다. 당시 대만은 세계 최대의 장뇌(樟腦) 생산지였기에 영국을 비롯한 수많은 서구 선박과 상인이 몰려들었다.
페리 제독
1854년 일본을 개항시킨 미국 해군 제독 페리(Matthew C. Perry, 1794~1858)는 필 모어(Millard Fillmore) 대통령에게 올린 보고서에서 ‘대만은 명목상 중국 소속이지만 실제로는 독립적인 존재’라며 미국 보호령으로 만들자고 강조했다. 타운센트 해리스(Townsend Harris·1807~78)는 청으로부터 대만을 사들이자고 주장했다.
1874년에는 과거 표류했던 오키나와 어민들이 대만 원주민들에게 피살당한 것을 빌미로 일본군 3000여 명이 대만 서남 해안에 상륙했다. 1884년에는 프랑스가 대만해협을 봉쇄한다. 열강의 침략에 놀란 청은 1885년 대만을 성(省)으로 승격시키고 방어 대책 마련에 나섰지만, 1894년 청일전쟁에 패하면서 대만을 일본에 넘겨주게 된다.
장제스
1945년 일본이 항복하면서 대만은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10월 24일 장제스(蔣介石)가 보낸 국민당군이 대만으로 들어오고 일본의 지배는 종식됐다. 하지만 대륙인들이 대거 몰려들고 국민당이 지배자로 군림하는 와중에 대만 본성인(本省人)들의 불만은 날로 높아진다. 급기야 1947년 2월 28일, 대만 전국에서 폭동이 일어나자 장제스는 군대를 보내 대만인 2만여 명을 학살했다.
맥아더 “대만은 침몰하지 않는 항모”
맥아더
1949년 공산당에 패해 피신해 온 장제스는 대만을 본토 수복을 위한 거점으로 삼는다. 그는 ‘제2의 정성공’으로 자임했을지 모르지만 대만 본성인들의 고난은 이어진다. 이 같은 상황에서 본성인들은 일본의 철수와 국민당의 등장을 가리켜 “개가 물러가니 돼지가 왔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1950년 북한의 남침으로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대만의 형세는 또다시 변한다. 미국은 7함대를 보내 대만해협을 봉쇄한다. 그리고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는 대만을 ‘침몰하지 않는 항공모함’이라고 표현했다. 대만의 전략적 가치가 다시 급상승하는 순간이었다.
2021년 오늘의 대만은 어떠한가. 미국에는 중국의 태평양 진출을 저지하는 ‘최전방 전진기지’로, 중국에는 미국의 봉쇄망을 뚫기 위해 무조건 장악해야 하는 ‘턱밑의 칼날’로 떠올랐다. 그에 더해 반도체 부족이 세계적인 문제가 된 상황에서 TSMC를 보유한 대만의 경제적 존재감은 날로 높아지고 있다. 17세기 이후 서구 열강과 일본, 그리고 중국 대륙 사이에서 수많은 굴곡을 겪어야 했던 대만의 운명은 여전히 짙은 안개 속에 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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