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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신문물에 눈뜬 왕자, 아들을 적으로 본 인조

bindol 2021. 8. 27. 05:42

청나라 신문물에 눈뜬 왕자, 아들을 적으로 본 인조

중앙일보

입력 2021.07.16 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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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세자는 왜 급사했을까

퓨전사극 ‘추노’(2010) 초반에 소현세자로 등장하는 배우 강성민과 소현세자 초상.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는 중국에서 서양의 신문물을 익히며 급변하는 세계 정세에도 눈을 떴다. [사진 KBS·중앙포토]

“세자는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병을 얻었고 며칠 만에 세상을 떠났다. 온몸이 전부 검은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선혈(鮮血)이 흘러나왔다. 검은 헝겊으로 얼굴의 반쪽만 덮어 놓았는데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 색깔을 분변할 수 없어 마치 약물(藥物)에 중독돼 죽은 사람 같았다.”

음력 1645년 6월 27일자 『인조실록』의 내용이다. 34세로 급사한 소현세자(昭顯世子·1612∼1645)의 시신을 염(殮)하는 자리에 동석했던 종실(宗室) 진원군(珍原君)의 증언을 담고 있다.

당시는 소현세자가 청나라에서 7년 6개월 가까운 볼모 생활을 마치고 막 귀국했던 시점이었다. 급작스레 죽은 데다 시신 전체가 검은빛이었고 얼굴의 일곱 구멍에서 피가 흘러나왔다는 것을 근거로 ‘소현세자가 독살당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남아 있는 기록만으로는 독살이라고 단언하기 어렵다. 그런데 전후 맥락을 고려하면 그의 죽음이 석연치 않은 것만은 부정할 수는 없다. 소현세자는 왜 급사했을까.

인조의 지극한 사랑 받고 성장한 소현

소현세자가 조선에 돌아와 급사한 후 묻힌 소경원 전경.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 안에 있다. [사진 문화재청]

소현세자는 인조의 맏아들이다. 인조는 1623년 이른바 인조반정(仁祖反正)을 일으켜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 반정 이후 소현의 운명도 바뀌었다. 평범한 종실 집안의 맏아들에서 다음 보위(寶位)를 예약한 왕세자로 변신한다. 인조는 1625년 1월, 열네 살 소현을 왕세자로 책립(冊立)했다. 자신이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지존(至尊)의 자리에 올랐기 때문에 후계자를 조기에 결정하여 권력 기반을 안정시키려는 조처였다.

왕세자가 된 이후 소현은 부왕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인조가 엄선하여 붙여준 사부(師傅)들의 훈육을 받으며 장차 성군(聖君)이 되는 데 필요한 자질을 연마하기 위해 정진했다. 왕세자 책립 이후 인조와 소현세자의 관계는 그야말로 ‘자애로운 아버지와’와 ‘효성스러운 아들’ 그 자체였다.

병자호란을 맞아서도 소현세자의 ‘효성’은 멈추지 않았다. 1637년 1월, 남한산성을 완전히 포위했던 청군은 빨리 성에서 나와 항복하라고 인조를 다그쳤다. 출성(出城)할 경우 청으로 끌려갈 것을 우려했던 인조는 머뭇거렸다. 1월 22일, 소현세자는 자신이 적진으로 가겠다고 나선다. 부왕 대신 굴욕을 감당하겠다는 충정이었다. 하지만 청은 소현세자의 요청을 거부했고, 1월 30일 부자(父子)는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항복한다.

청은 철수하면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鳳林大君)을 심양(瀋陽)으로 끌고 간다. 혹시라도 조선이 변심하여 저항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인질이었다. 1637년 2월 8일, 소현세자가 청으로 떠나는 날 인조는 배웅을 위해 서오릉(西五陵·고양시 덕양구 용두동) 부근까지 행차한다. 인조는 소현세자를 연행해 가는 청 왕자 도르곤(多爾袞)에게 머리를 숙였다. 그러면서 가는 도중 소현세자 일행을 온돌방에서 재워달라고 신신당부한다. 자식을 걱정하는 여느 아비의 모습 그대로였다.

소현세자 일행은 1637년 4월, 심양에 도착하여 심관(瀋館)이란 곳으로 들어갔다. 애초 소현세자에게 심양은 ‘오랑캐의 소굴’이었다. 어려서부터 청과 만주족을 인간이 아닌 ‘오랑캐’라고 배웠던 데다 인조와 조선 신료들은 ‘오랑캐의 소굴’로 들어간 소현세자가 ‘문명국’ 조선의 왕세자답게 꿋꿋하고 당당하게 처신하기를 기대했다.

청은 소현세자를 조선과의 접촉 창구로 활용하려 했다. 조선에 대한 요구 사항이나 양국의 현안들을 심관을 통해 조선에 전달하여 해결하고자 했다. 청 조정은 소현세자를 조회(朝會)와 연회(宴會)에 정기적으로 참석시켰고, 도르곤 등 지배층 인사들 또한 소현세자와 개인적으로 만나곤 했다.

‘명 멸망, 청 등극’ 현장서 직접 목격

비록 인질로 끌려왔지만 접촉이 잦아지면 상대와 친밀해질 수밖에 없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또 시간이 흐르면서 소현세자의 눈에는 ‘오랑캐’의 단점뿐 아니라 장점과 실력도 보이게 된다. 1642년 5월, 소현세자는 명의 병부상서(兵部尙書) 홍승주(洪承疇)가 투항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홍승주는 머리를 치발(薙髮·만주식 변발)하고 호복(胡服) 차림으로 청 태종 홍타이지에게 세 번 큰절을 올리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렸다. 명의 최고위 신료가 ‘오랑캐 추장’에게 무릎 꿇는 장면을 보면서 소현세자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조선이 하늘처럼 떠받드는 명이 무너지고 ‘오랑캐’로 멸시하는 청이 중원의 주인이 될 날이 머지않았던 현실을 절감하지 않았을까.

소현세자가 심양 생활에 익숙해질 무렵, 조·청 관계는 순탄치 않았다. 청은 병자호란 당시 붙잡아왔던 포로들(被擄人)이 조선으로 계속 탈출했던 것, 명을 공격하는 데 동참하라는 요구에 조선이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에 불만이 컸다. 청의 불만은 당장 소현세자에 대한 질책으로 이어졌다. 반면 조선의 인조와 신료들은 소현세자가 앞장서서 청의 무리한 요구를 차단해주기를 고대했다. 소현세자는 중간에서 자칫 ‘샌드위치’ 신세로 내몰릴 가능성이 높았다.

조선으로 도망친 피로인들을 도로 붙잡아 보내라는 요구가 제대로 먹혀들지 않자 청은 회심의 ‘카드’를 꺼낸다. 고분고분하지 않은 인조를 심양으로 입조(入朝·제후가 황제를 직접 찾아뵙는 것)시킨다는 것이었다. 청 조정에서는 아예 인조를 폐위하고 소현세자를 국왕으로 세워야 한다는 이야기까지 흘러나왔다. 인조는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권력은 부자 사이에도 공유할 수 없는 법, 입조론과 왕위 교체론이 불거지면서 인조가 소현세자를 보는 눈은 미묘하게 달라진다. ‘효성스러운 아들’이 아니라 ‘경쟁자’이자 ‘정적(政敵)’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이제 멀리 떨어져 있는 아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려고 부심하게 된다.

1644년 4월, 이자성(李自成)이 이끄는 농민 반란군에 의해 명이 멸망했다. 당시 산해관(山海關)을 지키던 명 장수 오삼계(吳三桂)는 반란군을 응징하기 위해 청에 원조를 요청한다. 청은 도르곤이 이끄는 병력을 파견한다. 도르곤은 출전하면서 소현세자도 데려간다. 심양에서 요동 벌판을 지나 산해관을 통과하여 북경으로 향하던 소현세자의 종군 길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물과 식량이 부족한 데다 막사 지척에 포탄이 떨어지는 아찔한 경험도 잇따랐다. 하지만 소현세자는 역사가 바뀌는 현장을 직접 목격했다. 청군은 이자성을 몰아냈고, 청은 이윽고 북경으로 천도한다.

17세기 중국에서 활동한 독일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 [사진 위키백과·바이두]

소현세자는 북경에 머무는 동안 진객(珍客)을 만난다. 독일인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湯若望·J Adam Schall von Bell)이었다. 그는 북경에 동천주당(東天主堂)을 세웠고, 흠천감(欽天監·국립 천문대)의 책임자였다. 아담 샬은 소현세자에게 천주상(天主像)과 천구의(天球儀), 각종 서적을 증정했다. 서양 물건과 책들을 받았을 때 소현세자는 신기해했고, 특히 역서(曆書)를 받고서는 “조선에도 역서가 있지만 오랫동안 천행(天行)과 합치되지 않아 문제였는데 귀국하면 새 역서를 보급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세례받은 천주교 신자를 조선에 보내고 싶다는 아담 샬의 제의에도 거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처음 대면한 천주교와 서학에 대해 열린 자세를 보였다.

병자호란 이후 조선의 커다란 손실

17세기 중국에서 활동한 독일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이 베이징에 세운 동천주당. [사진 바이두]

청은 북경을 접수하자 소현세자를 귀국시킨다. 소현세자는 1645년 2월 18일, 천주교도였던 이방조(李邦詔) 등 한인들까지 이끌고 한양에 도착한다. 하지만 인조는 영구 귀국한 아들을 전혀 반기지 않았다. 신하들이 세자에게 하례(賀禮)하겠다는 요청도 거부했다. ‘온돌방에서 재워 달라’고 도르곤에게 고개를 숙였던 때와는 완전히 달라진 모습이었다. 부왕의 냉랭한 태도에 충격을 받았기 때문일까. 소현세자는 곧 병석에 누웠고, 침을 맞은 지 사흘 만에 세상을 뜬다. 인조는 장례를 서둘렀다. 사인도 규명하려 하지 않고 입관을 재촉했다.

소현세자가 급서하자 아담 샬이 보냈던 이방조 등은 청으로 돌아간다. 인조는 왜 소현세자를 버렸을까. 일부 기록에는 인조의 총애를 받던 후궁이 소현세자를 무함(誣陷)했기 때문이라고 돼 있다.

하지만 본질적인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소현세자는 심양과 북경에서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장면을 직접 보았다. 아담 샬과의 만남은 더욱 특별한 경험이었다. 나라 밖, 격변의 현장에서의 체험을 통해 청이 결코 ‘오랑캐’가 아니라 배울 만한 장점이 있다는 사실도 목도했다. 인조는 그런 소현세자가 청을 긍정적으로 보고, 청이 자기 대신 소현세자를 선택하지나 않을까 전전긍긍했다.

여하튼 누구보다도 청의 실상을 제대로 알고, 일찍이 서양 문물에 눈을 떴던 소현세자의 때 이른 죽음은 병자호란 이후 조선에 커다란 손실이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