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보다 농민에 가까워…가족구성도 평민과 비슷
중앙일보
입력 2021.10.15 00:29
업데이트 2021.10.15 01:30
노비제, 사실과 편견 사이
조선 후기 화가 김득신(1754~1822)의 ‘노상알현도(路上謁見圖)’. 길에서 우연히 만난 양반과 상민의 모습이 조선시대의 신분 질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사진 평양조선미술박물관]
지난 칼럼(9월 17일자)에서 조선 노비제의 추이, 노비의 평민화 정책을 살펴보았다. 부모 중 한쪽이 노비면 자식도 노비가 되던 조선 전기의 정책 기조에서, 17세기가 되면서 아버지가 양인이면 말할 것도 없고 어머니가 양인이라도 자식이 양인이 되는 정책으로 바뀌었다고 서술했다.
약간의 논란은 예상했지만 실제 댓글은 더 흉흉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개 “조선을 미화한다” “조선 유학자들은 대부분 수백 명 노비를 거느리고 착취했다”는 반론이었다. 내 말에 공감해주는 분은 거의 없었다.
전쟁포로·약탈노예와 성격 판이
매매에 따른 가족해체 거의 없어
“노비 두느니 소작 주는 게 낫다”
양반층과 ‘상호보험적’ 관계 이뤄
먼저 내가 그 칼럼을 잘못 썼구나 싶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일방적으로 비판을 받을 리 없기 때문이다. 댓글을 쓴 독자들도 그리 독해력이 좋은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이 주제를 다시 논의해보자고 마음먹은 것은 그 댓글에서 중요한 함의를 읽었기 때문이다. 댓글 중 누구도 노비제가 바람직한 제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 청산하고 극복해야 할 악습으로 본다는 점 말이다. 이보다 중요한 공감대가 어디 있는가.
올해 초부터 시작된 이 칼럼의 취지는 ‘식민주의=근대주의’ 프리즘을 치우고 조선을 하나의 사회, 문명으로 설명해보자는 것이었다. 여전히 기존 프리즘이 강고해서 내 칼럼이 조선을 미화한다고 보는 이가 많은 듯하다. 그래도 미화라는 말은 과하다.
“조선을 미화한다”는 댓글은 오해일 뿐
조선시대 최고 법전인 『경국대전』. [사진 한양도성박물관]
조선 초, 정부는 일천즉천(一賤卽賤) 악법을 개선하지 못했다. 이는 성종 때 반포된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수록된 바다. 여기서 내가 놓친 것이 있다. 국민의 30% 이상으로 추정되는 노비 숫자를 나는 고려 후기의 연장에서 이해했는데, 그보다는 세조 때 보법(保法)으로 군역 부담이 늘고, 그 압박으로 양인이 감소한 것이 노비 증가의 원인이었다. 노비제는 이전 문명에서 넘겨받은 게 아니라 조선 정부의 정책이 만들어낸 인재(人災) 성격이 컸다.
이 악법을 깨는 시간도 적지 않게 걸렸다. 17세기 노(奴·남자)가 양인 아내를 얻어 자식을 낳으면 양인이 되는 법은 율곡의 제안 이후로 쳐도 150년이 걸렸고, 1669년(현종10) 첫 입법 이후에도 폐지와 부활을 거듭하다가 60년 뒤인 1731년(영조7)에 확정돼 『속대전(續大典)』에 실렸다. 그래서 18세기 이후 노비제는 쇠퇴한다. 이 사실을 근거로 나는 조선 사람들은 주-노 관계를 오륜에 더하여 육륜으로 치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문명의 선진성을 판단하는 데 사회 구성원의 통합성, 즉 갈등의 감소가 주요 지표가 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최고 법전인 『경국대전 』의 속편 격인 『속대전』.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우리가 노비제를 살피는 이유는 생사여탈, 매매, 성노리개 등의 용어를 통해 묘사될 때 빠지기 쉬운 선정적 상상을 도발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 삶이 어떠했는지, 역사적 실상에 접근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를 위해서는 노비의 발생·거주·의무에 대한 자료를 검토해야 한다.
예컨대, 노비의 발생 과정은 존재 양태를 결정하는 주요한 요소다. 북아메리카에 도착한 앵글로색슨 등 백인들은 당초 원주민인 인디언을 노예로 삼으려다 실패하고 아프리카 흑인을 약취했다. 당연하게도 그들은 백인보다 아메리카 지리에도 밝았고 그곳 농작·수렵에도 익숙했다. 그러니 노예가 되지 않았다. 억지로 그들을 노예로 삼아 봐야 도망치는 건 일도 아니었다. 인디언을 노예로 삼는 방법은 흑인 노예 경우처럼 잡아다 유럽에 파는 것이었다. 일종의 뿌리 뽑기. 같은 이유에서, 백인 노예주가 종종 오해하고 매도했던, 흑인 노예의 비굴하기까지 보였던 나약함은 천성이 아니라 뿌리 뽑힌 사회경제적 고립감 때문이었다.
조선의 노비는 전쟁 포로나 약탈 노예가 아니라 그 땅에서 살던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이들이 노비로 전락했다고 해서 노예처럼 부릴 수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노비의 거주와 주인에 대한 의무를 보면 노예보다 일반 농민에 가깝다. 평민인 농민이 국가에 지던 군역과 비슷한 부담을 주인에게 지는 것이다.
다른 지역에 비해 변화가 더뎠을 것으로 추정되는 18세기 경상도 안동의 의성 김씨 집안 문서를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노비의 가족 구성은 평민과 다를 바 없다. 우리가 생각하는 매매에 의한 해체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노비제는 이제 훨씬 인간적인 모습을 한 것이다. 물론 노비 주인이 이때 와서 착해졌기 때문은 아니었다.
안동 의성 김씨 집안 문서가 말하는 것
보물로 지정된 경북 안동 의성 김씨 종택의 대청마루. [사진 문화재청]
지난번 살펴보았듯이 백성의 삶을 대변하는 지식층, 즉 사류(士類)의 정책적 노력의 결과이기도 했다. 거기에는 노비들의 자기의식이 끊임없이 작동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노동력이 중요했던 16세기와는 달리, 18세기에는 토지의 재화 가치가 높아졌다. 차라리 소작을 주는 게 낫지, 노비를 농사에 부리며 그 생계를 유지해주는 일이 소유주에게 부담스러운 일이 됐다. 그러니 노비가 도망을 쳐도 심각하기보다 시큰둥한 것이다. “막금이가 지난번 도망갔다가 오늘 돌아왔으니 괴이한 일이다” “덕삼이가 행랑채로 들어왔다. 덕삼이는 2일에 달아났다고 한다.”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노(奴) 만세가 쌀 1말과 돼지 1마리를 보내 초하루 제사를 도왔다. 그 성의가 가상하지만 너무 지나치다.” 잘 사는 종 만세가 제수를 보태자 감사하는 말이다. “비(婢·여자) 분이를 석전으로 보냈다. 어머니의 명을 따른 것이지만 제사를 담당하는 비를 사사로운 일에 써 큰 실례이니 매우 마음이 편치 않다.” 제사 지내는 비를 심부름 보내는 것도 불편했던 것이다. 이런 모습에서 미국 남부의 노예-주인 관계를 읽어낼 수 있겠는가.
상호성 인식이 평등을 향한 첫걸음
그래서 연구자에 따라서는 ‘불완전하지만’ 노비와 주인의 관계를 ‘상호 보험적 또는 상호 호혜적 관계’라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이 된 것이다. 여기서 상호성을 평등성으로 혼동하지는 말자. 불완전한 상호성은 위계의 존재를 상정하는 것이다. 그것이 신분이든 계급이든 말이다. 그러나 상호성의 인식이야말로 평등을 향한 첫걸음이다.
언젠가 노비의 양인화 정책을 발표했더니, 그게 평등사상에 기초한 것은 아니지 않느냐는 반론을 들었다. 평등이 멀리 있는 무엇은 아닐 것이다. 노비도 나와 같은 인간이라는 자각 속에 평등이 있는 것 아닐까. 그 자각의 제도화 속에서 구현되는 것 아닐까. 늘 미래는 도둑처럼 와 있을 때가 많다. 그렇게 점차 노비제를 없애 간 것은 조선 문명사의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상 노비제에 대한 논의는 정진영·이영훈·김건태·권내현·임상혁·이정수의 논문을 참고했다. 논문은 도서관에서 쉽게 내려받을 수 있다.
역사 공부의 끝에는 평가가 있다. 우리 일기가 반성으로 끝나듯이, 사마천도 그랬고, 조선실록의 서술도 그랬다. 그러나 역사가 곧 도덕은 아니다. 역사 공부는 세상이 어떻게 굴러갔는지 설명하는 것이 우선이고, 그런 다음 판단·평가한다. 그런데 “조선사에는 모르는 게 너무 많다.” 나는 그 이유가 조선사를 연구하고 설명하기 이전에 판단·평가부터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문화사학자 하위징아(J Huizinga)의 말마따나 역사에 대해서는 누구나 한마디 한다. 쉽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관심, 역사학계의 종사자로서 무척 고마운 일이다. 근데 고맙지만은 않은 이유도 있다. 공들인 연구 자체를 도대체 인정하지 않는 가벼운 영혼들 때문이다. 이건 미숙함과 구별된다. 미숙함은 얼마든지 일취월장할 수 있다. 그러나 가벼움은 언제나 가벼움일 뿐이다. 내가 걱정할 일은 아니지만, 자신의 현실도 그렇게 가볍게 보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노동, 자유일까 강제일까
에릭 홉스봄
노비제에 담긴 인간의 예속과 불평등에 대한 독자들의 문제의식에 부응하는 뜻에서 한 걸음 더 생각해보자. 지혜로운 역사가 에릭 홉스봄(E Hobsbawm·사진)조차도 『자본의 시대』에서 “농노제 폐지는 자유로운 노동력을 동원하는 데 필요한 하나의 전제조건이었다”고 서술할 정도로, 임노동은 늘 ‘자유로운’이라는 수식어와 함께 언급된다.
보유지와 공유지에서 쫓겨난 농민은 산업혁명 무렵 도시 빈민·노동자가 됐다. 공동체의 보호는 사라졌고, 내 몸의 노동력을 팔아야만 살 수 있었다. 노동조합이 생기기 전까지 휴일 없는 15시간 노동이 드물지 않았다. 그나마 도시의 일자리는 늘 모자랐다.
중세 농민이 부분적으로 경제외적 강제에 의해 토지에 묶여 있었다면, 현대 사회의 나는 부분적으로 경제적 강제에 의해 월급에 묶여 있다. 그러나 인간은 묶여 있기만 한 것은 아니다. 놀고 즐기고 고뇌하며 삶을 가꾸어간다. 그 인간다움의 크기, 딱 그만큼 사회는 살만한 것이 된다.
오항녕 전주대 역사문화콘텐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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