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항녕의 조선

부계·모계 함께 올려…가부장 ‘호주’ 없었다

bindol 2021. 11. 12. 04:08

부계·모계 함께 올려…가부장 ‘호주’ 없었다

중앙일보

입력 2021.11.12 00:28

조선시대 호적에 대한 오해

17~18세기 경남 산청 단성현(헌재 산청군 남부) 주민들의 호적 장부를 보관했던 단성향교.

2000년대 초, 호주제 폐지를 둘러싼 논의가 뜨거웠다. 폐지론자는 호적제도는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기 위해 작성한 민적(民籍)에서 시작됐다고 주장했다. 이 의견은 사실이다. 반면 호주제 존속을 주장한 쪽에서는 호적제도와 부계 성씨는 ‘우리의 전통’이므로 폐지하면 안 된다고 했다. 이는 사실과 다르다. 마치 전통을 지키는 듯 목소리를 높였던 자칭 ‘유림’에서 정작 조선의 호적에 대해 몰이해를 드러냈다.

과거 호적을 떼보면 아버지가 호주로, 위로 할아버지/할머니, 그리고 이하 가족 상황이 나왔다. 호적에는 할머니나 어머니, 아내의 가족 상황은 표기되지 않았다. 호주제 아래서는 부, 모, 자녀로 구성되지 않은 가족, 즉 독신모 가족, 이혼 가족 등을 ‘비정상’으로 규정한다. 또 호적에 들어 있느냐의 여부에 따라 재산상속에서 차별이 있었다.

부부 4조 기재, 여성 단독 대표도
일제강점기에 남성연장자로 고정

양반과 평민 모두 기재양식 동일
성이 각기 다른 양부·양자도 있어

2008년 논란 끝에 폐지된 호주제
“부계 성씨가 전통”은 사실과 달라

요즘 주민등록과 비슷, 3년마다 조사

향교 편액. ‘향안실(鄕案室)’이라 쓰여 있다.

조선의 호적은 이와 다르다. 3년에 한 번씩 조사한다. 개별 호에서 호구단자를 작성하면 동네에서 중초(中草)를 작성해 고을 관청에 제출하고, 거기서 호적대장으로 정리하는 순으로 만들어진다. 필요하면 호적 등본을 발급받기도 하는데, 이것이 준호구(準戶口)다. 호적의 특징과 성격은 다음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조선의 호적은 요즘 주민등록과 비슷하다. 단일 세대만 기재한다. 부부 중심의 호가 되는 것이다. 게다가 3년에 한 번 조사하니 때에 따라서는 태어나서 3년이 돼야 호적에 오른다. 즉 국가가 파악하는 것이다. 아마 그 전에 사망하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니, 높은 영아사망률을 고려하면 여기서부터 호적과 실제 인구 사이의 괴리가 시작됐을 것이다.

둘째, 가족 구성원 모두를 적는 게 아니다. 호적은 오랫동안 지역마다 설정됐던 호구 총수를 기준으로 필요한 만큼의 호구를 등재했을 뿐이었다. 호적에 등재되는 인구는 전체 인구의 30~40% 정도였다. 호 역시 실제 마을에서 사는 호인 자연호가 아니라, 행정적으로 구획한 편제호였다. 편제호에서는 같은 집에 사는 사람도 다른 호에 편제될 수 있고, 다른 자연호에 사는 사람들도 같은 호에 편제될 수 있었다. 그러므로 호적의 호는, 주로 공동 생활권에 거주하기는 했겠지만, 실제 호의 모습과 같지 않다. 이 때문에 호구단자를 작성할 때부터 누구를 빼기도 하고 넣기도 하는 조정이 자연스럽게 이뤄졌다.

향교에 보관됐던 호적 장부. 현재 경상대 고문헌 도서관에 보관 중이다. [사진 문화재청]

셋째, 조선 최고 법전인 『경국대전』 호구식(戶口式)에 보면 호적에 올라가는 부부는 기재 양식이 똑같다. 남편쪽 가족만 적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부계와 모계를 다 기재하는 양식은 조선 이외의 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호를 대표하는 부부는 모두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부, 외할아버지 등 4조(祖)를 기재한다. 때에 따라서는 여성이 혼자 호를 대표할 수도 있다. 많아야 10% 정도지만 이런 경향은 계속 나타난다. 이는 갑오경장 이후 달라진 대한제국기 호적이 ‘호주’에게 호에 대한 권리와 의무를 한정한 경우나, 식민지 시기 가족 자체를 호로 파악하면서 남성 연장자를 유일한 호주로 내세운 것과 다르다. 가부장제는 근대사회로 올수록 더 선명해졌다.

넷째, 양반과 평민의 기재 양식이 같다. 신분에 따라 국가가 부여하는 직역의 구별만 확실하다면, 즉 군역을 하는 평민인지, 관직 의무가 있는 양반인지 판단할 수 있다면, 호의 구성에서 특권을 보장할 이유는 없고 국가가 관심을 가질 일도 없는 것이다. 노비만 주인을 추가 기록하는 것이 다르다. 이것도 실제로는 차이라고 볼 수 없다. 노비에게 주인이 있듯이 평민과 양반에게는 왕이라는 주인이 있고, 호적은 왕이 주인인 국가가 하는 것이기 때문에 ‘주인 항목’이 생략됐을 뿐이다.

혼인 후에도 다른 성씨 사용한 부부

조선시대의 준호구. 요즘의 주민등록등본에 해당한다. 유학 김종두와 그의 아내 4조(祖)가 적혀 있다. [사진 파평 윤씨 예천 첨사공파]

다섯째, 호적의 성씨는 가족의 신분 규정이나 호의 계승과 관련돼서만 의미를 갖는다. 그래서 심지어 양자와 양부의 성씨가 다른 경우도 있다. 이는 평민과 노비가 성씨를 갖게 되면서 생긴 현상이다. 성씨를 갖는 호는 17세기 50%, 19세기 99%로 추정된다. 신분제 측면에서는 어미의 신분에 따라 적서(嫡庶)와 양천(良賤)이 구별된다는 점에서 모계(母系)의 성격을 띤다. 조선은 혼인 후에도 성씨를 바꾸지 않고 부부가 다른 성씨를 유지했다. 결혼하면 아내가 남편 성씨를 따르는 서양과 다르다.

국가가 생긴 이래 인구와 세금의 파악하는 것이 공무의 핵심이었다. 땅에는 전세를 부과하기 위한 양안(量案)이, 인구에게는 호적(戶籍)을 통해 국가의 인민에 대한 가독성을 높였다. 동원할 인력에 대한 정보가 호적이었다. 조(租·전세), 용(庸·공물), 조(調·역)에서 현물을 납부하는 공물은 호를 기준으로 부과했으니, 호적은 부세 제도의 두 축을 담당하는 데이터였다고 하겠다. 대동법으로 공물을 내는 공납이 토지세, 즉 전세로 됐어도, 조세 현물을 운반, 수송하는 부담은 여전히 호를 단위로 한 요역(徭役)으로 수행됐기에 호적의 중요성이 줄어든 것은 아니었다.

지금은 폐지된 대한민국 호적 양식. [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호적은 발급처와 발급 시기, 주소, 주호(主戶), 주호의 처, 거느린 가족, 노비, 새로 등재된 자, 기준으로 삼은 이전 호적대장, 오기 여부, 수령 수결(手決·사인)로 구성된다. 구성원 남녀를 신분에 따라 노(老), 장(壯), 약(弱)으로 집계하는데, ‘유학장일(幼學壯一)’이라고 하면 신분이 유학(양반)인 장년 1명이 있다는 말이다. 노, 장, 약이 중요한 이유는 15~59세가 국역의 의무를 지는 ‘장’이기 때문이다.

대한제국기 광무호적으로 불리는 새로운 호적이 작성됐다. 당시 전세와 호세를 통일하여 중앙정부가 직접 재원을 징수하려고 했기 때문에, 재정 확보를 위해서는 대상 호수를 증가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한 호, 한 명도 남김없이’ 호적에 등재할 것을 종용했는데, 결과는 반대로 전국적인 호수 격감을 초래했다. 정부의 의도와 인민의 관습은 항상 괴리가 있다.

개개인보다 호구 총수 위주로 파악

1907년부터 통감부 민적법(民籍法)에 의해 호적조사가 시행될 때는 전국 호구가 급증했다. 강제력이 동원되기도 했고, 무엇보다 호와 호세(戶稅), 즉 호가 부담해야 할 부세가 분리됐기 때문이다. 이 민적은 일본 메이지유신 직후 실시된 호적조사에 기초한다. 그리고 1901년대를 거치면 연장자를 호주로 하여 가족이 혈연적으로 파악되는 ‘본적지 주의’ 호적으로 바뀐다. 이것이 2008년 폐지된 대한민국 호적의 원형이었다. 우리가 현대 호구제와 관련해서 전근대적·전통적이라고 지레 생각하는 관습은 사실 그리 오래되지 않는 시기에 형성된 것이다.

게다가 조선과 대한민국은 호적을 작성하는 이유와 행정력도 같은 점이 있으면서도 다르다. 조선 국가의 행정력은 고을(군현) 아래로 내려가기가 어려웠다. 내려가기 싫거나 관대해서가 아니라 그럴 공권력이 되지 못했다. 대한민국은 조선에 비해 훨씬 더 중앙집권적이다. 조선의 인구 관리가  호구 총수에 기초한  호구 조사를 통해 징발과 구휼의 대상으로 삼았던 데 비해, 대한민국은 개개인을 인구(人口)로 파악하여 국부(GDP)와의 관계를 과학적으로 분석할 수 있다.

현대 국가에는 촘촘한 행정력과 도로와 통신 등 기술 조건이 있다. 1인 1투표의 대의민주제 확산, 국민국가 상비군 체제가 국민개병제를 요구한 현실도 인구 파악의 필요성을 자극했을 것이다.

조선시대 호구 조사, 원칙과 현실 사이
역사는 도덕이 아니라는 말을 종종 한다. 역사는 도덕적 접근을 포함하지만 역사가 도덕은 아니다. 호적 조사에는 관법(寬法)과 핵법(覈法)이 있다고 했다. 원래 법적으로는 말 그대로 한 가구, 한 사람(一口一戶)까지 다 조사하여 세금과 요역을 매겨야 했다. 이것이 핵법이다. 그러나 조선 중앙정부의 행정력은 군현 아래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요역 동원에 필요한 ‘호구 총수’만 충족하면 되는 수준의 법 시행, 즉 관법이 현실적이었다. 오히려 현지 마을에서 사는 사람들은 누가 사는지, 그 집 노비가 누구인지 한 가구 한 사람 다 알고 있었으니, 정작 핵법은 현장에서 실현됐다고 하겠다. 이렇게 파악해야 호구 총수에 맞게 마을과 면리에서 조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법률 규정의 시행은 행정력과 필요성, 그리고 법률의 현실성을 좌우하는 인민의 태도나 요구의 긴장 속에서 실효성이 결정된다.
오항녕 전주대 역사문화콘텐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