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도 보이고 / 속도 보이며 / 떨어지는 단풍이여
일본의 와카(和歌) 시인이며 조동종 승려였던 료칸(大愚良寬·1758∼1831) 선사의 사세구(辭世句)다. 길을 나서니 플라타너스 잎사귀 한 장이 발등에 떨어진다. 내 손바닥보다 큰 잎의 무게가 인기척처럼 느껴진다. ‘가을이네요’ 어깨를 스치는 눈인사 같다. 장중한 낙하(落下). 어김없이 내 입에서는 이 시구가 맴돈다.
“겉도 보이고/ 속도 보이며/ 떨어지는 단풍이여.” 료칸 선사는 국상(國上)산에 오합암(五合庵)을 지어놓고 청빈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나이 칠십 무렵, 그는 정심니라는 젊은 비구니의 방문을 받는다. 그녀는 무사(武士)의 딸로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의사에게 출가했으나 살림보다는 문학을 더 좋아했다. 이혼 후 불교에 입문한 그녀는 료칸 선사에게 깊은 감화를 받았고 와카 지도도 받았다. 40년이란 나이차 에도 두 사람의 마음 밑바닥엔 영적 교류가 흘렀다. 73세 여름부터 료칸의 병세가 깊어졌다. 연말에는 심한 설사로 중태에 빠졌다. 정심니는 선사를 성심껏 돌보았다. 그런데도 나날이 시들어가는 료칸 선사. “생사(生死)의 경지를 넘어서/ 사는 몸이라 할지라도/ 다시, 이별이 있음을 슬퍼함이여.” 정심니는 이같이 적어 그에게 내보였다. 그때 선사가 그 옆에 적어놓은 시구가 바로 이것이었다. 이질로 설사를 하며 망가진 육체의 겉모습(현상)과 진여(眞如)의 법성을 갖춘 속마음(본체)도 함께 보이며 떨어지는 ‘단풍이여!’로 언하(言下)에 드러나는 선사의 진면목이다.
1828년 일본에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그는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썼다. “… 거미줄에 걸린 벌레가 살아날 방법은 없다. (…) 차라리 이것저것 고민하는 것을 그만두면 된다. 무심(無心)으로 되는 것이다. 이것이 재난을 피하는 묘법”이라고. “죽을 시절에는 죽는 것이 좋다”던 선사의 말씀을 껴안게 된다.
수필가
'맹난자의 한줄로 고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차별 없는 죽음 (0) | 2021.10.24 |
---|---|
두 마음 (0) | 2021.10.24 |
고향 (0) | 2021.10.24 |
적연부동(寂然不動) (0) | 2021.10.24 |
구름과 비, 이슬과 서리 (0) | 2021.10.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