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있다는 기록 나온 '최영의 활'
최영은 고려 말의 신흥 무인세력… 홍건적·왜구 물리치며 세력 쌓았어요
명에 대항해 '요동 정벌' 주장했지만 이성계의 반란으로 계획은 실패했죠
한 문화재 관련 시민단체가 최영 장군의 활과 화살통이 일본에 있다는 기록을 찾아내 확인 작업을 벌일 예정이라고 밝혔어요. 최영 장군의 활과 길이 99.3㎝인 화살통이 일본 나라현에 있는 도다이지라는 절의 유물 창고에 보관되었다는 기록을 발견했거든요. 정말 그곳에서 최영 장군의 활을 찾는다면 그 활은 현재 남은 하나뿐인 고려시대의 활로, 국보급 가치를 지닌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 활의 주인인 최영 장군은 어떤 인물일까요? 최영 장군이 활동할 당시 우리나라는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지금부터 고려시대 말로 역사 여행을 떠나 봐요.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
여러분, '최영 장군' 하면 퍼뜩 떠오르는 말이 있지 않나요? 맞아요.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사실 최영 장군이 한 말이 아니에요. 최영 장군이 16세 때 그의 아버지인 최원직이 세상을 떠나면서 남긴 유언이라고 해요. 한자로 '견금여석(見金如石)'이라고 쓰는데, 사사로운 이익이나 권세를 얻고자 쓸데없는 욕심을 부리지 말라는 뜻입니다. 최영은 아버지의 유언을 잊지 않도록 이 말을 띠에 적어 항상 몸에 지녔다고 해요.
▲ 그림=이창우
1316년에 태어난 최영은 어려서부터 체격이 좋고 힘이 셌어요. 문신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무술을 익혀 무인의 길을 걸었지요. 지금의 경기도와 충청도 지방인 양광도를 다스리는 도순문사의 지휘 아래 여러 차례 왜적을 물리치며 공을 쌓았습니다. 그러다가 임금을 호위하고 궁궐을 지키는 임무를 맡았는데, 공민왕 때인 1353년에 조일신이란 인물이 일으킨 반란을 막아내며 무장으로 이름을 떨쳤어요. 그 후로도 최영은 고려의 장수로 눈부신 활약을 펼칩니다.
◇홍건적·왜구 막아내며 성장한 신흥 무인 세력
당시 고려의 정치적 상황을 살펴볼까요? 중국에서는 몽골이 세운 원나라가 내분으로 어수선해진 틈을 타 한족 출신인 주원장이 명(明)나라를 세웠어요. 공민왕은 원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 나라의 기틀을 새롭게 다지려고 하였지요. 그러나 안에서는 권문세족(權門勢族)의 횡포가 계속되고, 밖에서는 홍건적(紅巾賊)과 왜구의 침입이 잦아 나라와 백성의 살림은 점점 어려워졌습니다.
권문세족은 원래 '벼슬이 높고 권세 있는 귀족'이란 뜻이지만, 우리 역사에서는 고려 말 정치 상황하에서 권력을 얻은 귀족을 말해요. 홍건적은 중국에서 원나라의 힘이 약해진 틈을 타서 반란을 일으킨 농민군이고요. 머리에 붉은(紅) 수건(巾)을 두르고 활동하여 홍건적이라 불렀지요. 왜구는 우리나라와 중국의 바닷가에 나타나 사람들을 해치고 재산을 약탈하던 일본의 해적 집단이고요.
최영은 공민왕 때인 1359년과 1361년에 고려를 침략한 홍건적을 물리쳤으며, 우왕 때인 1376년에는 60세의 나이에도 직접 전투에 나가 지금의 충청남도 부여 지역인 홍산에서 왜구를 크게 무찌르기도 했어요. 그런데 당시 최영과 함께 홍건적과 왜구를 물리치며 크게 이름을 떨친 젊은 장수가 있었어요. 그가 바로 조선을 세운 이성계이지요. 이처럼 고려 말에는 홍건적과 왜구를 막아내는 데 큰 공을 세우며 성장한 무인들이 많았는데, 이들을 '새롭게 등장해 힘을 키운 무인(武人)'이라는 뜻으로 '신흥 무인세력'이라고 불러요. 최영은 대표적인 신흥 무인세력으로, 훗날 나랏일을 총괄하는 문하시중이라는 벼슬까지 오릅니다. 그의 딸이 우왕의 비(妃)가 된 후로는 권력이 강화되었을 것이고요.
◇요동 정벌과 위화도회군
그러던 중에 중국의 새 주인이 된 명나라가 철령 이북의 땅을 자기 영토로 삼으려고 했어요. 철령은 함경도와 강원도의 경계 지역으로, 그 북쪽 땅은 예로부터 고려의 영토였는데, 원나라가 강제로 점령하여 쌍성총관부라는 통치기관을 설치하였지요. 공민왕 때 고려가 되찾았는데, 명나라가 원나라의 땅이었던 곳은 모두 자기네 땅이라며 철령 이북 지역을 내놓으라고 요구한 것이에요. 명나라의 요구에 반발한 최영은 요동 정벌을 주장해요. 명나라가 세워진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은 전쟁에 제대로 힘을 쏟을 수 없다고 판단하고, 이 기회에 요동까지 쳐들어가자는 주장을 폈지요.
1388년 최영은 팔도도통사가 되어, 이성계와 조민수를 각각 우군도통사와 좌군도통사로 삼고 요동을 정벌하려 했어요. 그러나 요동 정벌에 나선 이성계가 이를 불가능한 일로 여기고, 압록강 하류 지역인 위화도에서 군대를 되돌리고 말아요. 이 사건을 '위화도회군'이라고 하지요. 군대를 이끌고 개경으로 돌아온 이성계는 최영을 따르던 군사들을 물리치고 정권을 손에 쥐었어요. 이성계는 1392년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왕조를 열었습니다. 최영은 이성계에 의해 유배를 떠났다가 참형을 당하였는데, 죽기 전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고 해요.
"내 평생에 단 하루라도 나 자신을 위해 탐욕을 품었다면 내 무덤에 풀이 날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풀이 나지 않을 것이다."
최영은 처형당한 후 경기도 고양에 묻혔는데, 그의 유언처럼 그 무덤에 풀이 자라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지금은 풀이 무성한데, 후손이 묘를 정비하며 풀을 심어 놓았기 때문이래요.
[함께 생각해봐요]
위화도회군은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는 데 결정적 계기가 되었어요. 위화도회군 이후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기까지의 과정을 자세히 알아보세요.
지호진·어린이 역사 전문 저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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