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속의 한국사

2000년 전 백제 성벽, 아파트 5층 높이였대요

bindol 2021. 11. 4. 05:02

바닷가 미추홀에 도읍 정한 비류… 신하 10명 반대하며 한강유역 추천
온조, 위례성 쌓고 수도 삼아 번영

축구장 20개만큼 컸다는 '풍납토성' 백제 위례성일 가능성 높답니다

최근 서울 송파구의 풍납토성이 아파트 5층 높이의 거대한 성벽이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어요. 이 성벽을 쌓기 위해 모인 인원만 해도 1년에 138만명에 달했을 것이라고 하니, 정말 엄청난 규모이지요. 이러한 연구 결과는 유적·유물을 분석하여 역사적 사실을 밝히는 고고학에 영상공학·핵물리학 같은 첨단 과학의 힘이 더해져 나올 수 있었다고 해요. 그런데 이렇게 엄청난 규모를 가진 풍납토성을 과연 누가, 언제, 왜 건설한 것일까요?

◇갑자기 나타난 고구려 주몽의 아들 '유리'

"제가 바로 대왕님의 아들입니다. 이 부러진 반쪽 칼이 그 증거이옵니다."

기원전 19년, 한 젊은이가 고구려의 왕 주몽을 찾아왔어요. 그러고는 자기가 주몽의 아들이라고 주장하였지요. 그 젊은이의 이름은 '유리'로, 주몽이 부여에 살 때 예씨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어요. 주몽은 자신을 찾아온 아들을 보자 몹시 반가웠답니다. 하지만 기뻐한 주몽과 달리, 유리의 등장으로 입장이 무척 난처해진 사람들이 있었어요. 왕비인 소서노와 그녀의 두 아들이었지요.

 /그림=이창우

소서노는 본래 졸본, 즉 오늘날 중국 랴오닝성의 환런(桓仁)현 지방에서 큰 세력을 키운 여인이었어요. 주몽과 결혼하여 고구려를 세울 때 큰 공을 세웠지요. 그런데 주몽과 결혼하기 전 그녀는 이미 두 아들을 키우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이름은 비류와 온조였어요.

주몽은 친아들인 유리를 태자로 삼았어요. 그리고 6개월 만에 죽음을 맞았지요. 유리가 왕위를 잇게 되자, 소서노와 두 아들의 앞길은 더욱 캄캄해졌습니다. 소서노는 과연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였을까요?

◇남쪽으로 내려가 새 나라 세운 비류와 온조

"유리왕과 권력 다툼을 벌일 것인가, 아니면 권력에 따돌림당하는 존재가 되어 불편하게 지낼 것인가?"

소서노는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전혀 다른 새로운 길을 선택하였어요. 주몽이 부여를 떠나 졸본에 와서 새 나라를 세운 것처럼, 그녀 역시 두 아들을 데리고 남쪽으로 내려가 새 나라를 세우겠다고 결심하였지요. 소서노와 비류·온조는 만주 땅을 떠나 한반도로 향했습니다. 오간·마려 등 10명의 신하와 많은 백성이 그들의 뒤를 따라왔고요. 그들은 한반도에 내려와 새 나라를 세울 만한 터를 살펴보았어요. 그때 비류 왕자가 바닷가에 살자고 제안하였습니다. 그러자 10명의 신하는 다음과 같은 의견을 내놓으며 반대하였어요.

"이곳 하남의 땅은 북으로는 한강을 띠처럼 두르고, 동쪽에 높은 산이 솟았으며, 남쪽으로는 너른 평야가 펼쳐졌고, 서쪽은 바다로 막혀 있습니다. 도읍을 세우기에 좋은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림=이창우그러나 비류 왕자는 신하들의 말을 듣지 않고 백성을 나누어 바다가 있는 미추홀에 가서 살았어요. 온조 왕자는 신하들의 말에 따라 한강유역에 위례성을 쌓아 새 도읍으로 삼았습니다. 나라 이름은 10명의 신하가 함께 한강을 건너와서 나라를 세웠다는 뜻으로 '십제(十濟)'라고 지었고요. 소서노 역시 한강유역이 나라의 도읍으로 더 적합하다고 생각하여 큰아들 비류 대신 작은아들 온조를 따랐습니다.

그런데 비류가 도읍으로 정한 미추홀은 땅에 습기가 많고 물이 짜서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어요. 비류는 자기를 따라와 고생하는 백성을 생각하며 근심에 싸였지요. 더구나 동생 온조를 따라간 백성은 모두 편안하게 잘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자기 선택을 부끄러워하며 후회하다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대요.

◇초기 백제의 강성한 힘 보여주는 풍납토성

"비류왕도 죽었는데 이곳에서 고생하며 살 필요가 있겠소? 우리도 위례성으로 갑시다."

비류왕이 죽자 그를 따랐던 백성은 온조가 다스리는 십제의 위례성으로 향했어요. 온조왕은 미추홀에 살던 백성이 찾아오자 크게 기뻐하며 받아들이고, 나라 이름도 '백제(百濟)'로 바꾸었어요. '모든 백성이 즐겁게 따랐다'는 뜻을 담은 이름이라고 해요. 다른 한편으로는 원래 이 지역에 자리했던 마한의 소국 중 '백제국(伯濟國)'이 있었는데, 이들과 함께 나라를 더 크게 키웠다는 뜻으로 나라 이름을 바꾸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역사학자들은 비류가 향했던 바닷가 근처의 땅 미추홀을 지금의 인천 지역으로 보고 있어요. 그렇다면 온조가 도읍으로 정한 위례성은 어디일까요? 사실 위례성의 위치는 아직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어요. 다만 역사적 기록과 발굴된 유적·유물 등을 바탕으로 볼 때, 풍납토성이 바로 위례성일 가능성이 크다고 여기는 학자가 많아요. 위례성에 도읍을 정한 뒤 백제인이 나라를 발전시키고 국력을 키우며 풍납토성을 더 크고 튼튼하게 지은 것으로 추측한답니다. 약 2000년 전 아파트 5층 높이에 축구장 20개가 들어갈 정도로 큰 성을 쌓았다니, 우리 조상의 기술은 정말 대단하지요?


[함께 생각해봐요]

나라가 도읍을 옮기는 것을 '천도(遷都)'라고 해요. 백제는 건국 후 위례성→웅진→사비 순으로 천도하였지요. 백제가 천도한 이유와 그 과정을 더 자세히 알아보세요.

지호진 어린이 역사 전문 저술가 |

감수=서영대 교수(인하대 사학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