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속의 한국사

667명 동포 구해낸 조선 외교관

bindol 2021. 11. 4. 05:01

조선 지키기 위해 대마도 간 두 사람
스스로 왜구에게 잡혀간 관리 '이예'… 협상 통해 군수 구출해 외교관 돼
대마도 정벌에 나선 장군 '이종무'는 왜선 129척 없애 항복시켰어요

얼마 전 한국인 5명이 일본 대마도(쓰시마섬)의 절에서 불상과 불경을 훔치다 붙잡힌 사건이 있었어요. 이에 대해 일본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높았지요. 이렇게 일본에서 문화재를 훔쳐오는 일은 일본이 약탈한 우리 문화재를 돌려받는 데 오히려 방해가 될 수 있다는 염려 때문이에요.

대마도는 우리나라와 일본 규슈의 중간 지점에 있는 섬이에요. 그래서 오랜 기간 우리나라와 일본 간 교류의 중계지가 되었지요. 한때는 우리나라 해안에 침략해 못된 짓을 저질렀던 왜구의 소굴이기도 하였고, 임진왜란 때는 일본 수군의 중심 기지가 되기도 했어요. 그러다 보니 우리 역사에는 '대마도' 하면 떠오르는 두 인물이 있지요. 조선시대 초기에 활동한 이종무와 이예라는 사람이에요. 이들은 과연 대마도와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왜구 소굴인 대마도를 정벌하라"

1419년 5월, 왜선이 충청도 비인과 황해도 해주 등에 나타나 조선의 병선을 불태우고 주민의 재물을 마구 약탈하는 사건이 일어났어요.

"왜구의 침략과 약탈이 끊이질 않고 있소. 아무래도 그들의 소굴인 대마도를 공격해야겠소."

 그림=이창우

상왕(上王) 태종이 군신회의를 열어 이 같은 뜻을 밝혔어요. 대마도를 잘못 건드렸다가는 일본과 전쟁을 치러야 할지도 모른다며 반대한 신하도 있었으나 대마도를 공격하여 왜구의 기세를 꺾어놓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지요. 결국 태종은 대마도 정벌을 결정하고, 이를 세종에게 알렸어요. 태종은 약 9개월 전인 1418년 8월에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났지만, 군대 통솔권은 여전히 태종이 쥐고 있었답니다. 태종은 이종무를 중앙과 좌·우 3군을 모두 지휘할 수 있는 자리에 임명하여 대마도를 공격하게 하였어요. 이종무는 태조 이성계 때부터 왜구를 물리치며 장군으로 용맹을 떨친 인물이랍니다.

1419년 6월, 이종무는 병선 227척에 군사 1만7285명을 거느리고 대마도 정벌에 나섰어요. 느닷없이 조선의 함대가 나타나자 대마도의 왜구들은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몰랐지요. 이종무는 대마도의 우두머리인 대마도주에 항복을 권하며, 다시는 조선 백성을 괴롭히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라고 요구하였어요. 그러나 대마도주는 항복하기를 거부하였습니다.

조선군은 해안가의 왜선 129척을 찾아 20척을 끌고 오고 나머지는 모두 불태웠어요. 해안가의 집 수천 채를 불태워 적군 114명을 죽이고, 20명을 사로잡기도 하였지요. 그래도 대마도주가 항복하지 않자 내륙을 공격하려 했으나, 오히려 왜구의 저항에 큰 피해를 보았어요. 한편 곧 대마도 해안에 태풍이 몰려올 것이라는 말을 들은 이종무는 일단 주력 군대를 이끌고 거제도로 돌아왔지요. 당시 조선군은 대마도 전체를 정벌하지는 못했지만 왜구에게 큰 타격을 주었어요.

이후 조선 조정이 사신을 보내 "대마도는 예부터 조선의 땅이었으니, 본국으로 돌아가거나 항복하라"고 권하자, 대마도주는 위기를 느끼고 항복하였습니다. 조선 백성을 괴롭히던 왜구의 약탈 행위도 크게 줄었고요.

◇"일본에 잡혀간 조선인을 구출하라"

대마도 정벌 말고도 우리 역사에는 왜구와 얽힌 일이 많아요. 대마도 정벌 20여년 전인, 1397년에는 오늘날의 울산 지방인 울주 군수 이은이 왜구에게 납치당하는 일도 있었답니다.

"군수님이 왜구에 납치되어 대마도로 끌려갔다고요? 군수님을 구하러 가야겠소."

"흉악한 왜구가 진을 친 곳에 어떻게 간단 말이오?"

군수를 모시던 사람들은 자기 목숨을 구하기 위해 모두 숨거나 도망쳤으나, 한 젊은 관리만은 달랐어요. 그는 군수를 구하기 위해 제 발로 왜구에게 잡혀 대마도로 갔답니다. 그리고 군수를 납치한 왜구와 협상을 벌여 군수를 구해냈지요. 그 젊은 관리가 바로 '이예'였어요. 이예는 이때의 공로와 충성을 조정으로부터 인정받아 외교관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이예는 울산에서 태어나 여덟 살 어린 나이에 어머니가 왜구에게 붙잡혀가는 불행을 겪었다고 해요. 외교관이 되어서는 어머니처럼 억울하게 일본에 붙잡혀간 사람들을 구하고자 외교적 노력을 아끼지 않았지요. 이를 위해 일본어는 물론 대마도와 일본의 정세, 문물, 제도, 관습 등에 대해 자세히 알고자 노력하였어요.

◇일본을 가장 잘 아는 조선 외교관

외교관으로서 이예의 활약은 눈부셨어요. 1406년 조선통신사로 일본에 파견되어 납치된 조선인 77명을 데려왔으며, 지금의 오키나와인 유구국까지 가서 왜의 포로가 되었다가 팔려간 조선인 44명을 데리고 귀국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1400년부터 71세가 되던 1443년까지 무려 44년 동안 40여 차례나 외교관으로서 일본을 왕래하였고, 일본에 억울하게 붙잡혀간 조선인 667명이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게 힘썼다고 해요. 그뿐만 아니라 조선의 불경 등을 일본에 전파하고, 일본의 물레방아와 사탕수수를 들여오는 등 문화 교류에도 힘썼어요.

이예의 노력으로 조선은 대마도주와 무역에 관한 조약을 맺게 돼요. 이를 계해년인 1443년에 맺은 조약이라 하여 '계해약조(癸亥約條)'라고 부르지요. 이 조약이 맺어짐으로써 남해안 일대와 대마도 인근 지역의 평화를 이룰 수 있었어요. 이예의 뛰어난 외교 능력은 임금까지도 감탄할 정도였답니다. 1426년 세종대왕은 54세의 이예를 일본에 통신사로 보내며 이렇게 말했다고 해요.

"(일본을) 모르는 사람을 보낼 수 없어 그대를 보내는 것이니, 귀찮다 생각하지 마라."

[함께 생각해봐요]

우리나라는 16~17세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차례로 겪고,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수많은 문화재를 약탈당하였어요. 빼앗긴 문화재는 일본·미국·영국·독일·프랑스 등 여러 곳에 흩어져 있지요. 약탈당한 우리 문화재에 대해 알아보고, 이를 되찾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을 해야 할지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여 보세요.



 

지호진·어린이 역사 전문 저술가 |

감수=임학성 교수(인하대 한국학연구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