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관련 역사적 사건]
병인양요·조불수호통상조약 있었지만 일제강점기엔 실상 알리는 무대로 활용
1919년 파리평화회의 '민족자결주의' 3·1운동에 결정적 영향 주었어요
지난 11월 13일 금요일 밤, 프랑스의 수도 파리에서는 끔찍한 연쇄 테러 사건이 일어났어요. 극장과 식당 등 여러 곳에서 총기 난사와 폭발, 인질극 등의 테러가 한꺼번에 벌어졌어요. 세계 각국에서 수많은 사람이 파리의 희생자들을 애도하며, 슬픔과 충격에 빠진 파리 시민들에게 위로를 보내고 있어요. 또 이런 일은 저지른 IS 즉 '이슬람국가'라는 이름의 극단주의 무장 단체를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고요. 프랑스 파리는 세계인들의 큰 사랑을 받는 예술·문화·자유·역사의 도시예요. 프랑스는 우리 근대 역사 속 중요한 사건과도 깊은 관계를 맺고 있기도 하고요. 과연 어떤 사건들일까요?
◇병인양요, 강화도서 프랑스 군함을 무찌르다(1866)
1866년 9월, 프랑스의 로즈 제독이 이끄는 3척의 군함이 서해에서 한강으로 거슬러 양화진 부근에서 정찰하다가 돌아갔어요. 다음 달인 10월에 다시 7척의 군함과 병사 1000여 명을 이끌고 강화도에 침입했고, 강화성을 공격하여 교전 끝에 강화도를 점령했고요. 이에 조선 정부는 이용희, 이경하, 양헌수 등을 지휘관으로 삼아 군대를 조직해 문수산성, 정족산성 등지에서 승리를 거두고 프랑스 함대를 물러가게 했어요. 이렇게 프랑스 함대가 강화를 점령하고 조선군과 전투를 벌인 사건을 병인양요라고 해요.
▲ /그림=이혁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공격한 것은 병인박해 때 조선에 와 있던 프랑스 선교사 12명 중 9명이 처형당했기 때문이었어요. 병인박해는 1866년부터 1871년까지 무려 8000여 명의 천주교 신자가 붙잡혀 목숨을 잃은 사건이었어요.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흥선대원군은 서양 선교사들을 서양 세력의 앞잡이로 보았고, 천주교가 퍼지면 조선의 전통이 무너질 것으로 여겨 천주교를 믿는 사람들을 탄압했지요. 프랑스 선교사들이 학살을 당한 사실을 알게 된 프랑스는 중국 톈진에 주둔하고 있던 프랑스 함대를 보내 조선을 공격한 거고요.
◇프랑스와의 첫 수교, '조불수호통상조약'(1886)
1875년 9월 운요호라는 일본 군함이 강화도 앞바다에 나타나 보트 몇 척을 내려 조선군의 공격을 받은 뒤, 인천의 영종도에 상륙해 조선군을 공격한 일이 있었어요. 그 후 일본은 강화도 앞바다에 잇달아 군함을 보내며 조선에 항구를 개방하라는 요구를 했고요. 결국 1876년 2월 강화도에서 조선과 일본 사이에 불평등한 '강화도조약'이 맺어졌고, 조선은 일본에 부산·원산·제물포(지금의 인천) 세 곳의 항구를 개방하였어요. 쇄국정책을 펼쳤던 흥선대원군은 1873년 물러나고 고종이 직접 나랏일을 결정할 때였지요. 조선의 문이 열리자 서구 열강은 잇달아 조선과 수호통상조약을 맺고 조선에 외교관을 보냈어요. 프랑스도 1886년에 조선과 통상조약을 맺었는데 이를 조불통상조약이라고 해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조선과 프랑스의 외교관계가 시작되었지요. 내년 프랑스와 한국이 수교 130주년이 되는 건, 조불통상조약이 맺어진 1886년부터 수교가 시작된 것으로 계산했기 때문이에요.
▲ 1919년 파리평화회의에 참석했던 독립운동가들이에요. 신한청년당에서 한국 대표의 자격으로 참석한 김규식(앞줄 오른쪽)을 비롯해 여운홍(여운형의 동생·앞줄 왼쪽), 이관용(뒷줄 왼쪽에서 둘째), 조소앙(뒷줄 왼쪽에서 셋째), 황기환(뒷줄 오른쪽)이 함께 사진을 찍었어요. /조선일보 DB
◇대한제국이 참가한 파리 만국박람회(1900)
1900년 4월에 프랑스 파리에서 만국박람회가 열렸어요. 만국박람회는 세계 여러 나라가 참가하여 각국의 생산품을 전시하는 국제 박람회예요. 나라 이름을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바꾸었던 고종은 이 소식을 듣고 적극적으로 참가하여 대한제국의 모습을 세계에 알리고 서양의 앞선 기술도 보고 배워오고자 했어요. 청나라와 일본, 러시아 등 주변 열강의 간섭으로 땅에 떨어진 나라의 권위를 되찾고, 자주독립국가로서의 모습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였지요. 서양 문물을 배워 근대화를 이루려고 했던 고종은 산업이 발달한 세계 여러 나라의 공산품이 한자리에 모이는 만국박람회에 관심을 갖게 되었어요. 그래서 대한제국도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참가했어요. 이때 대한제국의 전시관을 둘러본 사람들은 우리나라가 일본·중국과 다른 고유한 문화와 역사를 지닌 국가라고 여기게 되었지요.
◇파리평화회의의 민족자결주의와 3·1운동(1919)
1919년 1월, 파리에서는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파리평화회의'가 열렸어요.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이어진 제1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이 승리를 거두자, 전쟁이 끝난 후 남아 있는 여러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회의가 파리에서 열린 거예요. 이때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각 민족은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고 해결해야 한다'는 민족자결주의 내용이 담긴 평화 원칙을 주장했어요. 민족자결주의는 3·1운동이 일어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어요.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받는 우리 민족도 우리나라의 정치적인 미래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죠. 파리평화회의에 우리나라 대표로는 누가 파견되었을까요? 독립운동단체였던 신한청년당에서 김규식을 한국 대표로 파견했고, 김규식은 파리에 가서 평화회의에 참석한 각국 대표들·외교관들·언론에 일제 식민지 통치의 실상을 폭로하고 한국의 독립을 호소했어요.
[당시 세계는?]
19세기 후반 서양은 산업혁명을 통해 막대한 부를 쌓았어요. 서양의 여러 강대국은 더 큰 이익을 얻기 위해 다른 나라를 침략하고, 식민지로 삼으려고 했어요. 강대국 국민들 사이에서는 약소국을 식민지로 지배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배타적인 민족주의가 널리 퍼져 있었고요. 이런 분위기가 제국주의로 발전하게 되면서 유럽 각국은 아프리카와 아시아에 대한 무역을 장악하고 식민지를 넓히려고 하였죠. 일본은 1868년 메이지 유신을 통해 근대화를 했고 제국주의에 동참하면서 우리나라를 희생양으로 삼았어요.
지호진 어린이 역사전문 저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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