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 중원경]
교통·군사의 요지인 충주 지방, 장수왕 남진정책으로 고구려 땅 돼
국원성 설치·중원 고구려비 세우고 통일신라 때 중원경으로 부르며
5소경 중 하나의 거점 삼았어요
이달 말 국보 제6호인 충북 충주시 탑평리 칠층석탑을 전부 해체하여 재복원할지를 결정하는 안전 진단 결과가 나올 예정이래요. 탑평리 칠층석탑은 통일신라 시대 세워진 가장 큰 7층 규모의 석탑이에요. 지붕돌 네 귀퉁이 끝이 경쾌하게 치켜 올라가 활기찬 분위기를 주지요. 1917년 일제가 탑을 보수하겠다면서 한 번 해체한 적이 있었는데, 건립 당시 모양과 거리가 먼 부실 복원이었어요. 그래서 충주시가 나서서 소중한 중앙탑을 원래 모양에 가깝게 수리 또는 재복원하려고 하는 거죠. 그리고 이웃 마을인 충주시 중앙탑면 용전리에는 '중원 고구려비'가 있답니다. 오늘은 이 두 탑이 세워진 삼국시대 교통·군사의 요충지, 충주에 대해서 알아볼까요?
◇충주 중원경, 통일신라 국토의 중심지
신라 제38대 임금인 원성왕과 조정 신하들이 모여 신라 영토의 남쪽과 북쪽의 가운데 지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우리 신라 땅의 가운데가 어디쯤일까?" "그야 중원경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그곳을 중원(中原·넓은 들판의 중앙)이라 이름 지었겠지요." "그럴 것 같기는 한데 정확하게 어디인지가 궁금하오." "그러면 남북의 끝 지점에서 같은 날 같은 시각에 같은 보폭을 가진 사람을 출발시켜 두 사람이 어디서 만나는지 알아보면 어떻겠습니까?"
8세기 후반 원성왕은 신라 땅 남북 끝 지점에서 같은 날 같은 시간 보폭이 같은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출발하게 했어요. 여러 차례 실험해보니, 그들이 만난 곳은 항상 일정했다고 해요. 원성왕은 그곳이 바로 통일신라 국토의 중앙이라는 표시를 하기 위해 탑을 세우기로 했어요. 그 탑이 바로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인 중앙탑이랍니다. 충주 지방에서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이지요. 중앙탑이 자리한 충주는 통일신라 시대 '중원경'이라고 불렸어요.
▲ 그림=이혁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넓어진 영토를 제대로 다스리기 위해 신문왕 때(685년) 지방 행정 구역 제도를 개편했어요. 전국을 9주로 나누고, 중요한 거점 5곳을 다섯 개의 작은 서울이라는 뜻의 5소경(小京)으로 승격시켰죠. 그리고 '사대' '사신'이라고 불리는 장관을 파견해 다스렸어요. 5소경으로 지정된 곳은 충주(중원경)·원주(북원경)·청주(서원경)·남원(남원경)·김해(금관경)였어요. 통일신라의 중앙정부가 있는 수도인 금성(지금의 경주)이 너무 남동쪽에 치우쳐 있어서 전국을 재조직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죠.
◇장수왕도 욕심내… 중원 고구려비 세우다
충주 지방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 전부터 고구려·백제·신라가 모두 탐내는 곳이었어요. 교통·군사의 요충지이기에 삼국 중 충주를 차지하는 나라가 강국이 된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지요. 서로 뺏고 빼앗기는 통에, 충주는 고구려·백제·신라의 지배를 두루 받았답니다. 처음에는 마한의 영토에 속했던 충주는 그 후 마한을 점령한 백제의 영토가 됐어요. 그러다가 5세기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 정책으로 고구려 땅이 돼요. 고구려 장수왕은 서북쪽 국가들과는 외교적으로 친선 관계를 맺어 안정을 이루고, 남쪽의 백제와 신라를 공격하여 남쪽으로 영토를 넓혔거든요. 427년 장수왕은 도읍을 국내성에서 대동강 유역의 평양성으로 옮겼지요.
고구려의 남진 정책으로 백제와 신라는 큰 위협을 느꼈어요. 그래서 서로 힘을 합쳐 고구려에 맞서려고 두 나라 국호의 끝 글자를 딴 '나제동맹'을 맺었지요. 백제와 신라의 동맹에도 남쪽으로 뻗쳐가는 고구려의 기세는 꺾이지 않았어요. 475년에는 백제의 수도였던 한성을 점령한 뒤 충주·제천·단양 등지까지 진출하며 한강 유역을 차지하였죠. 480년엔 신라의 북부 지역을 공격해 강원도와 경상북도 일대를 빼앗기도 했고요.
성공적으로 남쪽 영토를 넓힌 고구려는 한반도의 중앙 충주에 '국원성'을 설치해요. 그리고 남진 정책의 성공을 기념하기 위해 국보 제205호인 '충주 고구려비'를 세웠어요. 현존하는 국내 유일의 고구려비인 충주 고구려비는 중원 고구려비로도 불리지요.
그러나 70여 년의 세월이 흘러, 충주는 신라의 영토가 되지요. 통일신라의 기틀을 마련한 진흥왕은 6세기 신라가 더는 한반도 동남쪽의 작은 나라에 머물 수 없다고 생각해 영토를 넓히는 팽창정책을 폈어요. 551년, 진흥왕은 백제의 성왕과 연합군을 이루어 고구려를 공격하여 한강 유역을 빼앗아 왔어요. 지금의 충주와 단양 등 남한강 상류 지역은 신라가 차지했고 한강 하류는 백제가 차지했지요. 그러다가 진흥왕은 동맹국인 백제를 기습 공격하여 한강 하류 지역까지 신라 땅으로 만들었지요. 그 뒤로 남북으로 계속 영토를 넓혀 경상남도와 함경남도까지 진출하며 한반도 땅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답니다. 만약 여러분이 충주로 놀러가게된다면 탑평리 칠층석탑과 충주 고구려비 두 국보를 한 번에 볼 수 있겠죠? 꼭 한번 방문해 보세요.
기획·구성=김지연 기자
지호진·어린이 역사 전문 저술가 |
'뉴스 속의 한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뉴스 속의 한국사] 짧은 시 형식의 역사책… 왕에게 충언하려 만들었죠 (0) | 2021.11.06 |
---|---|
[뉴스 속의 한국사] 고려 6부에서 유래… 태종, 육조직계제로 왕권 강화 (0) | 2021.11.06 |
[뉴스 속의 한국사] 세금으로 나라 살림 대신 자신들 배만 불린 관리들 (0) | 2021.11.06 |
[뉴스 속의 한국사] 350여 년간 시행… 책 읽으러 떠나시오, 독서당으로 (0) | 2021.11.06 |
[뉴스 속의 한국사] 나라 이끌 사람, 가난해도 능력만 있다면 추천해 보시오~ (0) | 2021.11.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