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속의 한국사

[뉴스 속의 한국사] 고려 6부에서 유래… 태종, 육조직계제로 왕권 강화

bindol 2021. 11. 6. 05:05

[조선시대 '육조']

최고 행정기관 의정부 역할 줄이고 6조 판서에 직접 보고하도록 해
육조 중 이조, 지금의 행정자치부… 호조는 금융위원회·기획재정부
공조는 국토교통부와 비슷하대요

지난 17일(4월 셋째 주 일요일)부터 서울시는 매달 1, 3주 일요일 세종대로 550m 구간(정부서울청사·세종문화회관 앞)을 차가 없는 '보행 전용 거리'로 지정했어요. 걷기와 다양한 행사를 통해 삶의 여유를 느끼기 위해서지요. 이때는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세종대로 일부 구간에 차량 통행이 통제돼요. 대중교통을 이용한다면 버스 대신 지하철을 이용하거나, 서울지방경찰청·서울역사박물관 옆 등으로 이동해 우회해서 다녀야겠죠?

세종대로는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을 상징하는 중심 도로로 조선 시대에는 '육조거리'라고 불렀어요. '육조(六曹)'란 조선 시대에 나랏일을 나누어 맡아보던 6개의 중앙 관청(이조·호조·예조·병조·형조·공조)을 말해요. 육조거리에는 육조 관청, 의정부(국무총리실), 한성부(서울시청) 등의 관아(官衙·벼슬아치들이 모여 나랏일을 처리하던 곳)들이 서로 마주 보며 늘어서 있었대요. 오늘은 육조와 의정부, 그리고 육조의 권한을 높여줘 왕권을 강화한 태종 임금의 '육조직계제'에 대해 알아볼까요?

오늘날 정부 기관과 비교해볼까?

고려가 멸망한 뒤 세워진 조선은 고려의 행정제도를 크게 바꾸지 않고 이어받았어요. 고려에는 모든 관원을 통솔하는 최고 행정 기관 '문하부', 왕의 명령을 각 기관에 전달하고 왕궁의 호위와 군사 무기를 관리하는 '중추원', 국가 재정을 담당한 '삼사', 그리고 이 세 기관의 종2품 이상 고위급 관원이 한자리에 모여서 국가의 중대한 일을 의논하는 최고 회의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도당)'가 있었어요.

 그림=이혁

정종 임금은 1400년에 도평의사사를 '의정부(議政府)'로 고쳤어요. 또한 중추원에서 군사 업무를 전담하는 '삼군부'를 분리해 호위와 군사적인 업무를 완전히 나누었죠. 또한 왕명을 각 기관에 전달하는 비서실 역할을 하는 '승정원'을 설치했답니다. 그리고 1401년, 문하부를 없애면서 '의정부'를 최고 행정 기관으로 쐐기를 박아요. 의정부가 모든 관원을 통솔하고 나라의 모든 일을 맡아 관리하게 되었고, 영의정·좌의정·우의정이라는 3정승이 의정부의 우두머리가 되어 이들의 합의에 따라 조선의 정책이 결정됐어요.

의정부 아래에 있는 행정 기관인 육조도 고려 때의 6부 제도가 발전한 거였어요. 육조는 각자 맡은 분야에 따라 '이조(吏)' '호조(戶)''예조(禮)''병조(兵)''형조(刑)''공조(工)'로 나뉘어요. '이조'는 문관을 임명·관리하고 근무 성적을 평가하는 일을 했어요. 지금의 행정자치부, 인사혁신처 등이지요. '호조'는 나라의 재정을 관리하는 일을 했어요. 기획재정부, 금융위원회, 한국은행 등과 비슷하지요. '예조'는 교육(과거 시험 거행), 사신단에 대한 예절, 음악, 천문(물시계 제작 등)에 관한 업무를 했어요. 지금의 교육부, 외교부, 문화체육관광부, 미래창조과학부 등에 해당해요. '병조'는 지금의 국방부와, '형조'는 법무부와 비슷했고요. '공조'는 토목과 건설에 관한 일을 맡아 국토교통부, 해양수산부와 비슷하지요. 그런데 조선 건국 초기에는 육조의 우두머리가 '조정(朝廷·임금과 신하들의 의논 기구)'에 참여하지 못했어요. 어떻게 된 일일까요? 조정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정2품 이상이어야 했기 때문에, 그보다 지위가 낮은 정3품 육조의 우두머리 '전서'들은 참여할 수 없었다고 해요. 그래서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매우 불편했지요. 1405년 태종은 육조의 우두머리 '전서'를 더 멋있는 이름인 '판서'로 고치고, 품계도 정2품으로 올려 조정 회의에 직접 참여할 수 있게 했답니다.



의정부서사제와 육조직계제

1414년 태종은 육조에서 의정부를 거치지 말고 업무에 대한 의견을 왕에게 직접 올리라고 명령했어요. "지금부터 육조의 판서들은 그 업무를 임금인 내게 직접 고하도록 하라." 그전까지는 육조가 의정부를 거쳐 왕에게 보고를 올렸거든요. 우선, 육조가 의정부에 보고를 하면, 왕보다 먼저 의정부가 문제를 파악하고 논의했어요. 임금은 의정부가 다듬은 내용을 바탕으로 명령을 내렸지요. 의정부는 임금의 명령을 다시 육조로 보내 업무를 처리하게 했죠. 그러다 보니 의정부의 권한이 매우 강했어요. 이렇게 모든 업무가 의정부를 통해야 하는 제도를 '의정부서사제(議政府署事制)'라고 불렀죠.

태종은 육조가 직접 왕에게 보고하고, 바로 명령을 받는 '육조직계제(六曹直啓制)'로 바꾼 거예요. 의정부서사제에서는 의정부가 왕이 내리는 명령이나 왕에게 올리는 일에 관여하기 때문에 왕이 마음대로 나랏일을 처리하지 못하지요. 그래서 육조직계제로 제도를 바꿔 일부러 의정부의 역할을 줄이고 왕권을 늘렸어요. 그런데 1436년 태종의 아들 세종은 육조직계제를 다시 의정부서사제로 전환했어요. 왕권이 충분히 안정되어서 의정부서사제를 통해서도 충분히 세종 자신의 뜻을 펼쳐나갈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어요.

태종처럼 육조직계제를 실시한 왕이 또 있답니다. 바로 조카 단종을 폐위하고 왕이 된 세조예요. 수양대군 시절 그는 단종을 지지하던 정승 김종서와 황보인을 못마땅하게 여겼어요. 1453년엔 김종서, 황보인을 죽이고 권력을 잡는 '계유정난'을 일으켰고, 후일 다시 육조직계제를 실시했지요.



기획·구성=김지연 기자

지호진·어린이 역사전문 저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