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종이 등용한 사림파 선비 조광조… 훈구파 공신 줄이자는 정책 냈어요
이에 반대한 대신들이 거짓 퍼뜨려 조정에서 사림파 몰아냈어요
최근 통계청, 경찰청, 방송통신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여당·야당 의원들이 '가짜 뉴스'를 두고 논쟁을 벌였어요. "가짜 뉴스에 대해 적극적인 수사를 해야 한다"는 주장과 "헌법에 보장된 표현의 자유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맞섰지요.
가짜 뉴스는 누군가가 자기 이익을 위해 사실도 아닌 내용을 사실처럼 써서 기사 형식으로 퍼뜨리는 거예요.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가 가짜 뉴스로 곤욕을 치르고 있죠.
옛날에도 가짜 뉴스가 등장해 백성들을 혼란스럽게 만든 적이 있었어요. 조선시대에는 이 때문에 권력의 흐름이 바뀐 적도 있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조선 전기에 일어난 '주초위왕(走肖爲王)' 사건이에요. 기묘년에 일어나 기묘사화(己卯士禍)라고도 해요.
◇해괴한 나뭇잎
조선왕조실록에 나온 얘기를 토대로 하면, 중종이 즉위한 지 14년째인 1519년에 중종의 후궁인 희빈 홍씨가 중종을 찾아가 이렇게 아뢰었다고 해요. "전하, 제 처소에 있는 나인이 참으로 해괴한 나뭇잎을 주웠습니다." "해괴한 나뭇잎?" 희빈 홍씨가 보여준 나뭇잎을 본 중종의 얼굴빛이 붉으락푸르락했을 거예요.
▲ /그림=정서용
그 나뭇잎에는 벌레가 갉아먹은 흔적이 꼭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한자 글씨처럼 남아 있었다고 해요. 주초위왕(走肖爲王)은 '주초(走肖)가 왕이 된다'는 말인데, 주(走)와 초(肖)를 합치면 조(趙)가 되지요. 이는 곧 '조(趙)씨가 왕이 된다'는 뜻이죠.
여기 나오는 조씨는 당시 중종의 신임을 받아 강력하게 개혁 정책을 펼쳐 나가던 젊은 정치가 조광조(趙光祖·1482~1520)를 가리켰어요. '조광조가 공신들을 몰아내고 스스로 왕이 되려 한다'는 괴소문이 곧 궁궐과 도성에 파다하게 퍼졌어요.
조광조는 왜 이런 소문에 휘말린 걸까요? 그때 조정에는 조선 건국 이래 오랫동안 국가를 운영해 온 훈구파(勳舊派)와 새롭게 정계에 진출한 사림파(士林派)가 치열하게 다투고 있었어요. 훈구파는 태조가 조선을 세울 때, 그리고 세조가 단종을 몰아낼 때 큰 공을 세운 사람들과 그 자손이에요. 한양에서 중요한 관직을 독차지하고 있었죠. 반면 사림파는 조선 건국에 참여하지 않고 지방에서 은거했다가, 성리학을 연구해 과거에 급제해 다시 정치에 참여하게 된 신진 세력이고요. 조광조는 사림파의 대표적인 선비였어요.
◇훈구파가 퍼뜨린 가짜 뉴스
조선시대 전기에는 훈구파와 사림파가 다투는 사건이 반복해서 일어났어요. 왕들이 사림파를 불러들일 때마다 훈구파는 있는 힘을 다해 사림파를 내쫓았어요. 그때마다 사림파 선비들이 큰 화를 당해 '사화(士禍)'라는 말이 생길 정도였어요. 왜 그랬을까요? 중종의 아버지 성종은 훈구파가 너무 강해져서 왕권이 약해질까 봐, 사림파 선비들을 불러들여 중용했어요. 성종이 죽은 뒤 처음엔 장남인 연산군이 왕이 됐다가 폭정을 일삼아 쫓겨나고 차남인 중종이 왕위를 이었어요. 중종이 왕이 되자, 연산군을 밀어내는 데 공을 세운 훈구파 공신들이 막강한 권력을 잡았어요. 중종은 똑똑한 사림파 조광조에게 정권을 맡겨 훈구파를 견제하려 했어요.
이상한 나뭇잎이 발견된 후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희빈 홍씨는 대표적인 훈구파 홍경주의 딸이었어요. 홍경주는 남곤, 심정 같은 다른 훈구파 대신들과 함께 "조광조와 그 일파가 국정을 자기네 맘대로 어지럽히고 있으니 죄를 물어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조광조가 펼치던 개혁 정책 중에는 "훈구파 공신 수를 줄이자"는 것도 있었거든요.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훈구파가 자신들과 뜻이 맞는 후궁들과 짜고 만들어낸 가짜 뉴스가 바로 '조씨가 왕이 된다'고 적힌 나뭇잎이었어요.
중종은 조광조를 높이 평가해 권력을 맡겼지만, 조광조가 너무 급하고 과감하게 개혁 정책을 밀어붙이는 바람에 부담스러워하고 있었어요. 결국 중종은 나뭇잎 사건을 핑계 삼아 조광조를 귀양 보내 사약을 내리고, 조광조를 따르던 많은 사림파 신하들도 조정에서 몰아냈어요.
◇조선판 대자보 '괘서'
조정의 정객들만 가짜 뉴스를 퍼뜨린 게 아니었어요. 괘서(掛書) 사건도 빈번하게 일어나 나라를 뒤숭숭하게 만들었어요. '괘'자는 물건을 건다는 뜻이에요. 여러 사람이 보는 곳에 누군가 몰래 써 붙인 글을 괘서라 했죠. 주로 시장이나 포구, 관아의 대문, 마을 입구 장승 같은 곳에 나붙었어요. 벽에 많이 붙인다고 벽서(壁書)라고도 불렀어요. 특정한 인물이나 당파를 비방하는 내용이 많았지요.
1547년(명종 2년) 9월 양재역에 붉은 글씨로 쓴 벽보가 붙은 사건이 유명해요.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가 친동생 윤원형을 포함한 간신들과 짜고 나라를 망치고 있다는 내용이었죠. '양재역 벽서 사건'이라고 불러요. 범인은 밝혀지지 않았어요. 윤원형은 반대파들이 저지른 일이라고 보고 그들을 모조리 숙청했어요.
그 뒤 조선 후기에도 괘서 사건이 끊이지 않았어요. 괘서는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통로인 한편, 보통 사람이 권력자를 비판할 수 있는 통로였어요. 지금은 헌법에서 언론의 자유를 보장해 기사를 통해 정부가 잘못한 점을 비판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기자도 신문도 없었거든요. 괘서가 오늘날 대자보 같은 역할을 했어요. 정부에서는 그때마다 괘서를 붙인 주동자를 찾아 엄벌하려 했지만, 범인을 잡아내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답니다.
지호진 어린이 역사 저술가 기획·구성=유소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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