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속의 한국사

[뉴스 속의 한국사] 조선 휩쓴 베스트셀러… 합천·구례 '살기 좋은 곳' 꼽아

bindol 2021. 11. 9. 04:29

[택리지]
이중환이 벼슬 잃은 후 전국 답사… 지형·기후·인심·교통 분석했어요
강원 동해안 여행 추천하거나 당시 환경 문제 지적하기도 했죠

"인구가 점차 늘어나, 그만큼 자연이 조금씩 피해를 입는 정황이 보인다. 홍수가 나고 산사태가 일어날 때마다 흙이 한강으로 유입돼 수위가 얕아지고 있다."

요즘 신문에 실린 환경 기사처럼 보이죠? 놀랍게도 18세기 조선 학자가 267년 전에 쓴 글이랍니다. 실학자 이중환(1690~1756)이 1751년에 쓴 '택리지(擇里志)'라는 글에 나오지요. '택리지'라는 제목은 '어느 마을(리·里)에 살면 좋을지 고르는(택·擇) 일을 돕는 기록(지·志)'이라는 뜻이에요.

이 책은 조선 후기, 우리 국토에 대한 관심이 새삼 높아지던 시대에 나온 지리서예요. 얼마 전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팀이 이 책을 새롭게 번역해 '완역 정본 택리지'를 출간했어요. 택리지는 조선 후기의 베스트셀러였어요. 이 책을 읽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그땐 지금처럼 똑같은 책을 수천, 수만 권 찍어서 파는 서점이 없던 시대라 여러 사람이 원본을 베껴서 퍼뜨렸어요. 그래서 서로 조금씩 다른 판본이 200종 넘게 나왔지요. 안 교수팀이 정본을 낸 건, 그런 수많은 판본을 대조해 원본을 정확하게 복원하고 해설하기 위해서예요. 도대체 어떤 내용이기에 그렇게 많이들 찾아 읽으려 했던 걸까요?

◇선비는 어디 살아야 하는가

택리지를 쓴 청담(淸潭) 이중환은 남인 계열의 명문가 출신 선비였어요. 23세에 과거에 급제해 서른 안팎 촉망받는 관료로 성장했지만 30대 중반을 넘기면서 당쟁에 휘말려 고생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38세 되던 해(1728년)에 '이인좌의 난'이라는 반역 사건에 연루돼 관직을 빼앗기고 조정에서 쫓겨났지요. 그는 이후 어디에도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떠돌아다녀야 했어요.

 /그림=안병현

당시에 선비가 벼슬을 잃는다는 것은, 단순히 출세길이 막히는 게 아니라, 먹고살 방도가 없는 실업자가 된다는 뜻이었어요. "도대체 어디로 가야 굶지 않고 살 수 있단 말인가!" 이 문제가 이중환에겐 아주 절박한 상황이었답니다.

이중환은 그래서 '택리지'란 책을 썼어요. 원래 책 제목은 '사대부가거처(士大夫可居處)'였대요. '사대부가 살 수 있는 곳'이라는 뜻이지요. 이중환은 우리나라 곳곳을 돌아다니며 전 국토를 지형, 기후, 물자, 교통, 인심, 산수 같은 여러 시각으로 분석하고 '여기는 살 만하다' '여기는 살 만하지 않다'는 판단을 내렸어요.

◇조선 사회를 강타한 베스트셀러

이중환이 책을 쓴 뒤 여기저기서 '나도 그 책을 좀 구해볼 수 없겠느냐'고 아우성쳤어요. 왜 그랬을까요? 이중환이 현대에 택리지를 썼다면 서점에서 '경제·경영서'나 '실용서' 칸에 해당했을 거예요. 우리나라 국토 지리에 대한 사람들의 궁금증을 속 시원하게 풀어준 책이었거든요.

책을 쓴 목적부터가 '어디 사는 게 좋을까'였어요. 산수가 빼어난 곳을 소개하는 여행 가이드북이자, 어느 지역에 살아야 농사도 잘 짓고 장사도 잘할 수 있는지 알려주는 부동산 서적이었지요. 각 지역의 물산과 교통 상황을 자세히 소개한 지역 경제서이자, 지역 전설 40여 가지를 수집해서 기록한 구비문학의 보물 창고였어요. 조선 시대 독자들은 열광했어요. TV도 신문도 인터넷도 없던 시절, 이런 책이 좀처럼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정보에 목말라하고 있었던 거예요. 지금 간혹 '택리지는 풍수지리 서적이 아니었느냐'고 오해하는 사람도 있어요. 풍수지리 개념이 많이 들어 있긴 하지만 유교적 시각으로 쓴 인문지리서라고 보는 게 정확해요.

◇우리 국토가 이렇게 아름다웠다니

그럼 과연 '택리지'는 어디에 사는 것이 좋다고 말하고 있을까요? 수확량이 많고 토지가 비옥해 경제가 활성화된 곳, 그러면서도 인심이 좋고 산수가 아름다운 곳을 꼽았습니다. 어때요, 지금 사람들도 역시 그런 곳에서 살고 싶어 하지 않나요? '택리지'는 경남 합천, 전남 구례, 전북 전주, 대전 유성, 경북 하회 같은 곳을 이상적인 장소로 추천했어요.

또 '택리지'가 우리나라 국토에서도 아름다운 곳이라고 극찬한 곳은 지금도 많은 사람이 휴가철에 찾는 강원도 동해안이었어요. "이 지역을 한 번 유람하면 저절로 다른 사람이 되고, 거쳐 간 사람은 10년이 지나도 얼굴과 몸가짐에 신선 세계의 기운이 남아 있다"고 썼지요.

하지만 '택리지'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중환은 이젠 조선 팔도 전체가 각박해져 점점 살 수 없는 땅이 돼 가고 있다고 한탄합니다. 만약 이중환이 수백 년 뒤 지금 우리가 사는 국토를 본다면 절망한 나머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을 것 같네요.

하지만 '택리지' 덕분에 21세기의 우리는 "아, 산과 강이 자연적인 도로망을 만들었던 옛날 우리 땅이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었구나" 하고 깨닫게 될 수 있는 셈이지요. 요즘도 신문사 여행 담당 기자가 가이드북 삼아 '택리지' 문고판을 들고 취재를 다닐 정도랍니다.


유석재 기자

기획·구성=유소연 기자

유석재 기자 기획·구성=유소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