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윤의 슬픈 중국

中서 권력분립 강연… 학생들 “문화 침략, 정치의도 뭐냐” 공격

bindol 2021. 11. 15. 05:08

中서 권력분립 강연… 학생들 “문화 침략, 정치의도 뭐냐” 공격

송재윤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
입력 2021.11.06 09:00
 

송재윤의 슬픈 중국: 대륙의 자유인들 <5회>

<오늘날 중국의 애국주의/ 신화(神華) 통신>

“중국은 잘하고 있어요...최소 50년간은 승승장구합니다”

이번 주엔 오늘날 중국인들의 일반적 생각을 잘 보여주는 에피소드 두 토막으로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2019년 겨울 중국 중세사를 전공하는 한 중국인 교수와 나눈 대화다. 1년 간 캐나다를 방문하고 돌아가기 직전 그 교수는 작심한 듯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물론 중국은 인권이 제한돼 있지만, 중국 나름의 안정되고 효과적인 치리(治理)의 방법이 있어요. 외부에선 중국이 잘못 가고 있다고 비판해도 중국에서 살아가는 우리로서는 그렇게 인구가 많은 나라가 그 정도로 일사불란하게 잘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지요. 불과 얼마 전엔 상하이서 베이징까지 기차를 타면 밤을 새고 가야 했는데, 이제 고속철을 타면 5-6시간밖에 안 걸리지요. 중국은 아편전쟁을 겪고, 난징대학살을 당하고, 제국주의 열강들에 둘러싸여 ‘박이 쪼개지듯(瓜分)’ 산산 조각났던 나라였는데, 얼마나 큰 발전인가요? 여전히 많은 문제가 있지만, 중국은 매우 잘하고 있고, 향후 최소 50년간은 이대로 승승장구하리라 봅니다. 저는 애국자입니다. 한국인도 모두 애국자가 아닌가요?”

한 ‘애국자’의 진정어린 질문에 먼 타국의 ‘이방인’으로서 나는 겨우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네, 이해가 됩니다! 한국인들도 거의 대부분 다 애국자이겠지만, 문제는 사람들마다 애국하는 방법이 극과 극으로 다르다는 점이겠지요. 중국 역사를 돌아보면, 8년간 항일전쟁을 주도했던 장제스도 애국자이고, 공산혁명을 일으켰던 마오쩌둥도 애국자잖아요? 매번 선거 때만 되면 한국인들은 장제스와 마오쩌둥처럼 두 패로 갈라져서 꼭 전쟁 치르듯이 싸우지요. 모두가 자기편이 옳다고 우겨대면서 말이죠!”

“중국에선 보편가치, 권력분립을 논하지 마라!”

2016년 12월 말 중국의 한 대학에서 남송대(南宋代, 1127-1279) <<주례(周禮)>> 경학(經學)의 “권력분립 이론”에 관해 강연할 기회가 있었다. 유가 13경 중 하나인 <<주례>>는 고대 국가의 이상적 관료조직이 직관별로 매우 상세하게 묘사돼 있다. 정부 조직을 천·지·춘하추동 여섯 부서의 360 관직으로 분류하고, 각 직관마다 맡은 바 역할과 책무를 시시콜콜한 의식, 음식, 의복에 이르기까지 상세하게 규정하고 있다. 360 직관에 달린 관원의 숫자를 모두 합하면 9만 3천여 명을 넘는다. 실로 세계사에 보기 드문 신비로운 고대 관료제의 청사진이다.

<유가(儒家) 13경의 하나인 “주례(周禮)”는 한(漢) 제국 이후 동아시아 여러 국가에서 관료행정 조직의 원형으로 기능했다. / 공공부문>

<<주례>>에서 가장 중요한 직책은 <천관(天官)>의 총재(冢宰) 혹은 태재(太宰)인데, 이후 동아시아 관료제의 재상(宰相), 승상(丞相), 영의정(領議政)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현대어로 풀면 수상(首相, premier) 혹은 총리(總理, prime minister) 정도가 될 수 있다. 800-900년 전 중국의 정치 사상가들은 바로 그 총재(冢宰)의 직책에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무엇보다 총재와 왕(王)의 관계에 주목하면서 양자 사이의 견제와 균형에 관한 정교한 논변을 계발했다. 국가의 권력이 “황제” 일인(一人)에게 집중될 때 발생하는 “남권”(攬權, 권력 전횡 및 남용)의 문제를 지적하면서 남송대 정치 사상가들은 총재는 왕권을 제약하고, 왕은 총재의 권력을 감시하고 통제해야 한다는 논리를 정교하게 발전시켰다. 황권과 신권의 상호견제, 상호감시가 정부의 부패와 실패를 막는다는 명실 공히 권력분립 이론이었다.

이미 수편의 논문을 통해 학계에 소개한 내용이기에 나는 더욱 설레는 마음으로 중국의 학인들에게 남송대 권력분립 이론을 알리고 싶었다. 근대 입헌주의 논쟁보다 수백 년 앞서 권력분립 이론을 구성했던 남송대 경학자들을 칭송하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권력분립을 용인하지 않는 중국공산당의 일당독재에 대한 이의제기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800년 전 중국의 학자들도 권력분립을 역설했다”는 점을 중국 인민들에게 말하고 싶었다.

강연이 시작되자 곧 대부분 청중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어 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발표가 끝나자 질문이 쏟아졌는데, 경계와 적의가 섞인 문책성 질문의 연속이었다. 내용과 상관없이 제목부터 시빗거리였다. 강연의 제목을 “<<주례>>와 보편가치: 남송대 권력분립 이론”으로 뽑았던 게 화근이었다. 그 제목에는 보편가치와 권력분립이라는 두 개의 금칙어가 포함돼 있기 때문이었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주제임은 알고 있었지만, 그 정도 거센 반발이 일지는 예상하지 못했다.

공산당원이 아닐까 의심되는 한 청년이 오늘날 중국에서 구미 대학의 현직 교수가 권력분립을 강조하는 행위 자체가 “문화 침략”이 아니냐고 따졌다. 이에 대해 나는 서구의 근대 입헌주의보다 수백 년 앞서서 “황제 중심체제”의 중화제국에서 더 먼저 권력분립 이론이 구성됐다면 중국인으로서 자랑스러워 할 일이 아니냐고 대답했다.

이어서 다른 학생이 날카롭게 따지는 목소리로 질문했다. “제목을 <<주례>>와 보편가치라고 붙였는데, 정치적 의도가 대체 무엇인가?” 그 질문에 대해 나는 <<주례>>의 세계사적 의의를 인류 보편의 관점에서 적극적으로 해석하려는 의도일 뿐이라 답했다. 질세라 그 학생은 다그치듯 물었다. “대체 그 보편가치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순간 머리가 텅 빈 느낌이었다. 큰 청중 앞에서 말문이 막혀 궁지에 몰리는 느낌이었는데, 머리에서 위기를 빠져나갈 묘한 꾀가 떠올랐다. 나는 겨우 어색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요사이 중국 어디나 붙어 있는 ‘사회주의 핵심 가치관 12가지’가 생각나네요. 부강·민주·문명·화해, 자유·평등·공정·법치, 애국·경업(敬業)·성신(誠信)·우선(友善), 이 열 두가지 모두가 보편가치가 아닐까요? 캐나다 대학생들도 이 열두 가지 가치관을 흔쾌히 받아들일 듯합니다. 특히 민주, 자유, 평등, 공정, 법치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라고 유엔 헌장에 나와 있지요.”

<2012년 시진핑 정권 등장 이래 중국 어디서나 흔히 보이는 사회주의 핵심가치관 12가지/ 중국인터넷>

내가 그렇게 말하자 청중은 비로소 웃음을 터뜨리고 나에 대한 적의를 어느 정도 거둬들였다. 강연이 끝나고 만찬이 이어질 때 주최 측의 담당 교수가 내게 다가와 넌지시 말했다. “보편가치”와 “권력분립”은 모두 정치적으로 매우 민감한 용어니까 상부에 강의 내용을 보고할 때는 제목을 좀 바꾸려 한다며 동의를 구했다. 결국 그날 강연의 제목은 주최 측의 뜻에 따라 “남송대 주례 경학사 논쟁” 정도의 무색무취한 평범한 학술 상투어로 사후 수정되었다.

2013년 ‘헌정민주’ 논쟁...”무책임한 자유파의 서구 추종주의” 비난

2013년 여름 “헌정 민주” 논쟁이 뜨겁게 중국의 인터넷을 달구고 있었다. 중국 안팎에서 법학, 역사학, 철학, 정치학 등 다양한 학술분야의 전공자들이 참여하면서 논쟁이 일대의 정치 담론으로 확산되는 상황이었다. 당시 나는 항저우(杭州) 사범 대학에서 단기 방문학자 자격으로 강의를 하고 있었는데 주변의 지식인들이 흥분된 목소리로 내게 정치 개혁을 둘러싼 큰 논쟁이 진행 중이라 알려 왔다. 얼마 후 중국공산당은 부랴부랴 산불을 진화하듯 “헌정 민주” 논쟁을 잠재우기 위해 중앙 당교(黨校)의 이론가들을 “헌정 민주” 논쟁에 투입했다.

 

당교의 이론가들은 “헌정 민주” 논쟁이 서구 자유민주주의를 동경하는 무책임한 “자유파”의 줏대 없고 무분별한 서구 추종주의일 뿐이며, 무엇보다 “중국 특색 사회주의”에 대한 심대한 도전이라고 일갈했다. 이미 그해 5월 중국공산당은 중국 대학에 일곱 가지 사항에 대해선 아예 언급조차 하지 말라는 “칠불강(七不講)”의 비밀 지시를 하달한 상태였다. 상하이 화둥(華東) 정법대학의 법학자 장쉐중(張雪忠, 1976- ) 교수가 그 사실을 인터넷에 폭로하면서 구미 언론에까지 “칠불강” 관련 보도가 잇달았다. 중국공산당이 직접 나서서 금지한 그 일곱 가지 주제는 바로 서방식 헌정민주, 보편가치, 공민사회(시민사회), 신자유주의, 서방언론관(언론자유), 역사허무주의(중국공산당의 역사적 착오), 개혁개방 비판 등이었다.

중국공산당의 개입으로 이후 “헌정민주” 논쟁은 꽤나 위축되었지만, 적어도 그해 여름까지는 논쟁의 불길이 거세게 타오르고 있었다. 1989년 톈안먼 대학살 이래 잠잠했던 중국의 지식계가 다시금 “헌정민주”의 화두를 들고 정치 개혁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특히 1920-30년대 태어난 80대 원로들의 맹활약이 돋보였다. 이들 원로들은 “해방” 이후 태어나 문혁을 겪은 세대와는 달리 1930-40년대 중국의 다양한 사상 논쟁을 체득한 세대였다.

<중·영 이중 언어로 출간되는 미국 캘리포니아 소재 비판 언론 “中國數字時代(Chinese Digital Times)의 2015년 5월 1일 기사, https://chinadigitaltimes.net/chinese/391123.html>

“헌정민주” 담론 이끄는 80대 두 거장, 두광과 위잉스

1919년 5.4운동 이후 1920-30년대 중국의 지식인들은 다양한 사상과 이념의 격랑 속에서 다채로운 논쟁을 벌였다. 그 당시 중국 지식계를 휩쓸고 갔던 다양한 사조들을 열거해 보면········. 공화주의, 계몽주의, 자유주의, 합리주의, 경험주의, 실증주의, 회의주의, 실용주의, 민족주의, 애국주의, 범(泛)아시아주의, 세계주의, 공리주의, 자유주의, 자유방임주의, 개인주의, 평등주의, 상대주의, 니힐리즘, 공동체주의, 염세주의, 휴머니즘, 다윈 진화론, 사회진화론, 복고주의, 전통주의, 모더니즘,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낭만주의, 박애주의, 마르크시즘, 레닌이즘, 트로츠키주의, 무정부주의, 반제국주의, 반봉건주의, 반전통주의, 반외세주의 등등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그 많은 사상 사조 중에서도 청나라 말기부터 유입된 입헌군주제, 입헌민주주의(constitutional democracy) 등은 근대 국가의 기본 제도를 짜는 중요한 논쟁을 촉발시켰다. 1949년 중국공산당의 승리는 중국역사에서 다시금 백가쟁명의 다양성을 모두 죽이고 공산주의 이념으로 통일하는 사상의 암흑기를 열었다.

2013년 당시 “헌정민주” 논쟁이 일자 80대 원로 학자들 몇 명이 논쟁의 핵심에 섰다. 그들은 아마도 젊은 시절 자신들을 경동시켰던 5.4운동의 지적 혁명을 다시금 구현하고 싶어 한 듯하다. 그중 특히 두 명의 활약이 매우 두드러졌다. 1990년 은퇴할 때까지 중앙 당교 이론연구소의 부주임을 역임했던 두광(杜光, 1928- )과 프린스턴 대학 명예교수 위잉스(余英時, 1930-2021)이다.

<중국의 “헌정민주” 담론을 주도하는 두광(1928- ) 교수, 2015년 사진/ scmp.com>

1928년 저장성에서 태어난 두광은 1946년 베이징 대학에서 수학한 후 자발적으로 화북 지방의 공산군 해방구로 들어갔다. 신념 있는 청년 마르크시스트였던 두광은 1957년 반우파 운동 때 우파로 몰려서 20여년의 세월 정치적 박해를 당했다. 20년을 음지에 묶여 있던 그는 1979년에야 겨우 당교로 복귀해 정치 이론가로서의 삶을 재개했다. 1990년 퇴직한 후 그는 왕성하게 “헌정민주” 담론을 이끌었다. 두광은 정통 마르크시즘의 관점에서 중국공산당 일당독재의 이론적 모순과 반인류적 전제성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중국 현행 헌법을 근본적으로 뜯어고치는 전면적 정치 개혁을 요구해 왔다.

두광은 여러 편의 글을 통해서 오늘날 중국에서 정치 개혁의 중책을 감당해야 할 “개혁파” 혹은 “민주파”의 정신적 계보를 밝혀 왔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중국의 “민주파”는 5.4운동에서 기원했으며, 이후 중국공산당 치하에서도 질기게도 명맥을 이어왔다. 특히 1957년 백화제방 당시의 5.19 학생민주운동, 1976년 톈안먼 광장의 4.5 민주운동, 베이징 시단(西單)의 민주장 운동, 1986년 민주운동, 1989년 톈안먼 민주화 운동으로 중국의 민주파는 면면히 이어졌다. 두광은 보편가치에 입각한 입헌민주주의의 실현이야말로 중국헌정사의 종착점이라 주장하고 있다.

2013년 당시 위잉스는 이미 10년 넘게 일당독재를 비판하고 보편가치를 선양하는 중후한 시론들을 꾸준히 발표하고 있었다. 특히 “민주 중국”이란 제목 아래 연재된 위 교수의 문장은 대륙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널리 회자됐다. 그 당시 중국 지식인들은 위잉스의 학술 저술뿐만 아니라 정치 평론을 탐독하고 있었다. 2014년 9월 27일 위잉스가 홍콩 중문대학의 좌담회에서 발표한 “대륙에서 제창하는 유교는 죽음의 입맞춤(kiss of death)”이라는 제목의 짧은 글은 큰 파장을 일으켰다. 결국 2014년 10월 중국공산당은 위잉스의 저작들을 금서 목록에 넣을 수밖에 없었다.

<2021년 8월 타계한 세계 중국학의 거장 프린스턴대 명예교수 위잉스(1930-2021)의 모습/ caixinglobal.com>

1930년 톈진에서 태어나 안후이(安徽)성에서 유년기를 보낸 위잉스는 젊은 시절 5.4운동의 거장 후스(胡適, 1891-1962)의 영향 아래서 자유주의의 분위기를 익혔던 “신청년(新靑年)” 세대라 할 수 있다. 1950년 홍콩으로 탈출한 후 그는 중국학의 거장 첸무(錢穆, 1895-1990) 밑에서 공부했고, 1955년 도미해서 하버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위잉스는 영미 학계에서 최고의 영예를 누린 중국학의 거장이 되었다.

2010년대 중국에서 5.4운동의 정신을 기억하는 80대의 거장들이 “헌정 민주” 담론을 이끌었다는 사실은 오늘날 중국 사상사에서 매우 커다란 의미가 있다. “슬픈 중국”에서는 앞으로 2-3주에 걸쳐 척박한 대륙의 사상계에 5.4운동에서 태동했던 헌정, 민주, 자유의 불씨를 새롭게 되살린 두광과 위잉스의 저서와 정치평론을 보다 상세히 소개하고자 한다. 생애 마지막까지 인류의 보편가치를 선양하며 중국공산당의 인권유린과 정치범죄를 비판한 두 사람이야 말로 진정한 “대륙의 자유인들”이기 때문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