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윤의 슬픈 중국

‘중국 특색 사회주의’는 사회주의인가

bindol 2021. 11. 15. 05:06

‘중국 특색 사회주의’는 사회주의인가

송재윤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
입력 2021.10.30 09:00
 

송재윤의 슬픈 중국: 대륙의 자유인들 <4회>

<“새로운 시대 중국 특색 사회주의.” 호주에서 활약하는 중국의 반체제 정치 만화가 파듀차오(巴丢草, 1986- )의 풍자작품/ 공공부문>

빈부격차 세계서 가장 큰 나라...중국이 사회주의 국가인가

오늘날 중국이 과연 사회주의 국가인가? 20세기 인류사에 등장한 여러 종류의 사회주의 정권들은 많은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두 개의 핵심적 공통점이 있었다. 생산수단의 공유화와 중앙집권적 명령경제의 추진이었다. 개혁·개방 이래 중국공산당은 “치부광영(致富光榮)”의 구호 아래 생산수단의 파격적인 사유화를 추진했으며, 민영기업을 확장해서 시장경제를 활성화했다.

중공 정부가 급속한 경제 발전의 추진을 위해 낡은 건물을 부수듯 스스로 사회주의의 양대 기둥을 무너뜨린 셈이다.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와 시장경제를 도입한 국가를 사회주의라 부를 수 있나? 현재 중국을 관찰하는 모든 이들이 갖는 강한 의구심이다. 실은 중국의 지식인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가령 중국의 비판적 지식인 덩위원(鄧聿文, 1968- )은 2020년 7월 1일 “중국/중공국가주의의 전면 흥기”라는 칼럼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사실상, 오늘날 중공은 정통의 공산당이 아니며, 오늘날 중국도 마르크시즘의 관점에서 사회주의 국가가 아니다. 수많은 논자들이 지적하듯, 오늘날 중국은 마르크스주의의 얼굴로 등장한 극우(極右) 정권일 뿐이다.”

덩위원은 2013년 2월 27일 영국 파이낸셜 타임즈에 “중국이 북한을 버려야(China should abandon North Korea)”라는 도발적 칼럼을 기고해 세계를 놀라게 했던 중공중앙당교(當校) 기관지 <<학습시보(學習時報)>>의 부편집장이었다. 이 칼럼이 해외에서 떠들썩하게 회자되자 그는 부편집장의 직책을 잃었다고 한다.

<현재 미국에서 망명 중인 중국의 비판 언론인 덩위원의 모습 (2020). 2020년 11월 19일 덩위원은 중공 정부가 자신의 중국 내 은행 계정을 동결했다고 발표했다. 2012년부터 그는 중공 정부를 공개적으로 비판해 온 “대륙의 자유인”이다./ www.asianews.it>

대체 사적 소유제를 인정하고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도입한 나라가 어떻게 사회주의 국가인가? 빈부격차가 OECD회원국 중 최하위인 칠레보다도 더 심각한 중국이 어떻게 스스로 사회주의 국가라 외칠 수 있나? 이러한 근본적 물음에 대한 중국공산당의 대답은 초지일관 확고부동하기만 하다.

바로 “중국 특색 사회주의”이다. 중국공산당에 따르면 현재 중국은 낮은 단계의 사회주의 국가이다. 더 높은 단계로의 비약을 위해 중국은 잠정적으로 자본주의 경제노선을 취했을 뿐이라는 주장이다. 일면 그럴싸하지만 수사학적 속임수일 뿐이다. 사적소유제와 시장경제를 도입한다면, 사회주의의 폐기가 아닐 수 없다. “사회주의 시장경제”란 “착한 악당,” “소리 없는 아우성”처럼 모순어법(oxymoron)에 불과하다.

게다가 “중국 특색 사회주의”는 마르크스주의, 레닌주의, 마오쩌둥 사상, 덩샤오핑 실용주의, 장쩌민(江澤民, 1926- )의 “세 가지 대표” 사상, 후진타오(胡錦濤, 1942- )의 “과학발전관”, 급기야 “시진핑 사상”까지 다 합친 이념의 다발, 사상의 나열일 뿐이다. 마르크스에서 시진핑까지 한 줄로 관통하는 철학적 원리는 무엇일까? 다다익선(多多益善)인가?

냉철하게 따져보면 마르크스가 개탄했던 “철학의 빈곤”에 불과하지만, 중국공산당의 주장 밑엔 도도하게 흘러가는 중화문명의 오랜 지적 전통이 깔려 있음을 간과해선 안 된다.

모순된 제도와 원칙의 공존 “절충과 봉합”은 중국사의 전통

“절충(折衷)과 봉합(縫合)”은 중국 역사의 깊은 전통이다. 명백히 모순돼 보이는 제도나 원칙이 중국 역사에선 별 무리 없이 공존하는 경우를 흔히 본다. 한(漢)제국(기원전 206-기원후 220) 초기 유생(儒生)들은 진(秦)제국(기원전 221-206)의 폭정을 비판하는 과진론(過秦論)을 개진해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秦始皇)을 역사의 악인으로 만들었다. 덕분에 진나라는 암흑기로 폄하됐지만, 한나라 황제들은 진시황이 창건한 제국의 시스템을 계승·발전시켰다.

겉으로는 유교의 도덕교화를 표방하면서 중앙집권적 관료제의 법가전통을 폐기하지 않았다. 학자들은 흔히 중화제국이 속으론 법가이면서 겉으론 유가를 가장하는 내법외유(內法外儒)의 통치술을 썼다고 해석한다. 이후 중국의 역대 황실은 정면(正面)에선 공맹(孔孟)의 이상주의를 선양하면서 배면(背面)에선 한비(韓非)와 이사(李斯)의 모략을 활용했다.

“절충과 봉합”을 보여주는 중화문명의 대표작은 중화인민공화국의 헌법이다. 물과 기름처럼 혼합될 수 없고, 불과 얼음처럼 공생할 수 없는, 상호 모순된 강령들과 이율배반의 원칙들이 중국 헌법을 가득 메우고 있다. 공산주의와 실용주의, 사회주의와 시장경제, 인민민주와 인민독재, 인민주권과 일당독재, 애국주의와 국제주의, 집단주의와 공민 권리, 사적 소유와 국가 소유, 마오쩌둥 사상과 덩샤오핑 실용주의, 다민족 공동 발전 이론과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 등등. 창을 팔 땐 못 뚫는 방패가 없다고 하고선, 방패를 팔 땐 못 막는 창이 없다고 외쳐대는 무기상의 궤변을 연상시킨다.

<1964년 6월 14일, 헌법을 제정하는 중앙인민정부 위원회/ 공공부문>

명백한 모순임에도 중국 헌법 속의 “절충과 봉합”은 놀라운 힘을 발휘한다. 중국 헌법은 자유, 민주, 평등, 공정, 법치 등을 “사회주의핵심 가치관”이라 부르짖는데, 중국공산당은 “인민민주독재”의 이름 아래 전일적인 일당독재를 시행할 수 있다.

 

오늘날 중국의 비판적 사상가 두광(杜光, 1928- )이 지적하듯, 중국 헌법은 인민주권의 민주성과 일당독재의 전제성을 동시에 지향하지만, 현실 정치에선 언제나 전제성이 민주성을 억누르고 공민의 권리를 박탈한다. “절충과 봉합”의 오랜 전통이 중국공산당 일당독재의 정치선전으로 면면이 흘러내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덩샤오핑의 “도광양회(韜光養晦)” 실용주의 버린 시진핑

1978년 12월 최고영도자의 지위에 올라 개혁개방의 시대를 연 덩샤오핑은 “절충과 봉합”의 대가였다. 그는 마르크스-레닌주의, 마오쩌둥 사상, 공산당 일당독재의 리더십은 그대로 둔 채로 오로지 “실용주의”의 이름으로 자본주의 방식의 경제개혁을 과감하게 추진했다. 사적소유와 시장경제를 전면 수용한 후 중공 정부는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건설하겠다고 선전했다.

1980년대 초반 영국과 홍콩 문제를 논의할 때 덩샤오핑은 일국양제(一國兩制)의 묘안을 제시했다. 중국의 특별행정자치구로서 홍콩이 1997년 이양 이후 50년간에 걸쳐 독자적인 법적, 경제적, 정치적 자치권을 누린다는 국제사회와의 약속이었다. 일국양제는 두 체제의 근본적 상호차이를 교묘히 “절충”하고 잠재적 갈등의 소지를 적당히 “봉합”하는 기발한 시스템이었다.

홍콩은 홍콩대로 자유무역 금융자본의 논리에 따라 발전하고, 대륙은 대륙대로 공산당 일당독재 아래서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추진한다는 타협책인데, 전 세계는 노회한 지략가의 복안을 흔쾌히 수용했다. 물론 그 밑에는 실제적으로 시장경제를 수용한 중국이 자본의 논리를 따라 점점 더 개방적이고, 더 자유롭고, 더 민주적인 사회로 진화하리라는 닉슨 시대의 낙관론이 깔려 있었다.

톈안먼 대학살 직후 전 세계는 중공 정부의 만행을 규탄했다. 북미, 서유럽, 동유럽, 호주, 동남아, 남미의 수십 개 나라들이 비판 성명을 발표하고 중공 정부를 규탄했다. 당시 중국은 외교적 고립의 늪에 허리까지 잠긴 꼴이었다. 상황을 예의주시하던 덩샤오핑은 장고에 들어갔다. 석 달 후 그는 드디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는데······.

1989년 9월 4일 덩샤오핑은 중공중앙의 지도자들을 향해 중국 외교 전략의 3대 원칙을 발표했다. 각각 1) 냉정관찰(冷靜觀察), 2) 온주진각(穩住陳脚), 3) 침착응부(沈着應付)이다. 국제 정세를 냉정하게 관찰하고 중국 국내에 단단한 발판을 마련한 후 변화무쌍한 현실에 침착하게 대응하라는 주문이었다. 덩샤오핑은 그러한 실용주의 외교 전략의 정신을 한 마디로 압축해서 도광양회(韜光養晦)라 했다.

<1982년 9월 베이징 인민대회당 덩샤오핑와 대처의 만남/ 공공부문>

도광이란 스스로 재능, 재물, 명성 등을 가리고 숨기는 지혜를 말한다. 양회란 제 때가 올 때까지 세상에 나타나지 않고 내공을 쌓는 슬기를 이른다. 개혁개방이 추진되어 급속도로 경제가 발전하고 있지만, 마오쩌둥 시대처럼 과장되게 단기간의 성과를 떠벌리는 대신 내실을 다지며 묵묵히 사회주의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을 때를 기다려야 한다는 메시지였다. 사회주의 기치를 견지하되 높이 쳐들기 보단 조심조심 자세를 낮추고 경제성장의 길을 가라는 당부였다.

덩샤오핑의 도광양회는 절묘한 시기에 쏘아올린 낮은 포복의 신호탄이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불과 두 달 전이었다. 구소련의 붕괴 조짐도 가시화되고 있었다. 견고한 냉전의 질서에 큰 균열이 생길 때였다. 냉전 시대는 종언을 고하고 있었다. 마르크스의 사회주의는 시효를 상실한 19세기적 환상으로 판명이 났다. 변화의 바람이 중화대륙을 휩쓸 듯 거세게 일어났다. 중국 밖의 많은 논자들은 중국 붕괴가 임박했다며 묵시론과 예언서를 남발하고 있었다.

세계는 도광양회의 정치 마술에 다시 한 번 속았다. 자존심 거센 비대한 대륙국가의 저자세 외교가 효력을 발휘했다. 덕분에 중국은 전 세계의 눈앞에서 자국민을 탱크로 짓밟은 후에도 “중국 특색 사회주의”의 돛을 올리고 조심조심 국제 무역의 격랑을 헤치고 나아갔다.

2021년 바로 오늘 중국공산당은 “절충과 봉합”의 지략을 내팽개친 듯하다. 덩샤오핑이 고안한 일국양제는 이미 허물어졌다. 도광양회의 저자세 지략 외교 대신 벼랑 끝 치킨 게임을 일상화한 듯하다. 세계인의 반중정서가 하늘로 치솟는데, 시진핑은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외치며 전 중국에서 56개 민족 14억 5천 만의 공민들을 옭아매는 디지털 전체주의의 고삐를 더 세차게 당기려 한다. 낮은 포복 대신 “돌격 앞으로!”만 외쳐대는 꼴이다. “절충과 봉합”의 지략을 모두 망각했나? 항룡유회(亢龍有悔), 하늘 모르고 끝까지 오른 용은 반드시 후회한다. <계속>

<1989년 6월 4일 톈안먼 대학살 당시의 사진/ http://xahlee.org/Periodic_dosage_dir/tiananmen_64_198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