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할 자유를 빼앗는 악당들, 모두 뿌리째 뽑아버리자”
송재윤의 슬픈 중국: 대륙의 자유인들 <6회>
”나랏일 얘기할 땐 좀 작게 말씀하세요”...노래에 담긴 자유의 메시지
1940년대 후반 중국 대학가에서 널리 불렸던 노래 중에 “차관소조(茶館小調)”라는 서사 가곡이 있다. 신바람 나는 리듬에 촌철살인의 풍자가 담겨 있어 꼭 조선 후기의 사설시조 같은 느낌을 풍긴다.
“밤바람 불어오는 싸늘한 시간
동쪽 거리 찻집은 참으로 시끌벅적
위층과 아래층에 손님들이 북적이며
‘주인장, 끓는 물 좀!’ 소리를 치네.
찻잔과 접시 부딪히는 소리
딩딩 당당, 딩딩 당당!
어떤 이는 잡담하고, 어떤 이는 언쟁하고,
어떤 이는 고뇌하고, 어떤 이는 나랏일을 논하고,
어떤 이는 불평을 늘어놓네!”
이렇게 흥겹게 시작한 노랫말은 슬슬 정치판을 비꼬기 시작한다.
“오직 찻집 주인만 간이 작아서
다가와선 작고 가는 목소리로 속삭이는데,
여러분들, 제발 장사 좀 할 수 있게
나랏일 얘기할 땐 좀 작게 말씀하세요!
나랏일을 얘기하면 곤란해져요.
나, 너, 우리 모두 힘들어져요······.
그러다 철창신세를 질 수도 있죠!”
찻집에 모인 사람들이 모두 흥겹게 큰 목소리로 국사(國事)를 논하는데, 겁에 질린 주인장이 손님들에게 다가가서 정치 얘기는 제발 하지 말아달라고 허리를 굽혀 가며 당부하는 장면이다. 바로 그때 담력이 큰 한 손님이 벌떡 일어나선 “통쾌한 큰 목소리로 또렷하게” 소리 지른다.
“우리를 압박하고, 우리를 갈취하고,
우리들의 말할 자유를 빼앗는 악당들,
모두 뿌리째 뽑아버리자!
우리의 말할 자유를 빼앗는 악당들,
모두 뿌리째 뽑아버리자!”
“헌정 민주” 주장하는 이론가 두광 “권력 규제하고 공민의 권리 보장해야”
2015년은 을미(乙未)년, 청양띠의 해였다. 그해 11월 16일 베이징의 한 강연장에서 수십 명의 젊은 청중에게 “양떼(羊群) 강연”을 마친 후, 당시 87세의 두광(杜光, 1928- ) 선생은 청중의 부탁에 호응해 자리에서 일어나서 바로 그 “차관소조”를 흥겹게 불렀다. 노래를 부르기 전 두 선생은 이 노래가 1940년대 쿤밍에서 학생들이 즐겨 부르던 노래라 했다.
당시 쿤밍에는 국립 시난(西南) 연합대학이 있었다. 중일전쟁 발발 후 1938년부터 1946년까지 무려 8년 동안 전란을 피해 캠퍼스를 남방으로 옮겨야만 했던 베이징 대학, 칭화(淸華) 대학, 난카이(南開) 대학 등이 국민당의 지원 아래 세웠던 전시의 국립 합동대학이었다. 1946년 이후 세 대학은 모두 베이징과 톈진으로 복귀했다. 그때부터 이 노래는 베이징과 톈진의 청년들 사이에서도 애창됐다고 한다.
두 선생은 1946년 17세의 나이로 베이징 대학에 입학해서 1948년까지 두 해 동안 수학했다. 국공내전이 한창일 때 베이징의 국민당 정부는 공산당 요원들을 색출해서 처형하는 공포 정치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차관소조”는 사람들의 자유를 탄압하는 국민당 정부를 희화하고 비판하는 풍자의 민요였다.
2015년 11월 15일 두광이 거의 70년 전 그 노래를 기억의 창고에서 다시 불러낸 이유는 무엇일까? 불과 석 달 전인 2015년 8월 25일, 그가 언론사에 기고한 칼럼, “안전부가 노인들의 식사모임을 금지하는 불법 행위에 대한 항의”에 그 이유가 잘 드러나 있다.
두 선생은 5, 6년 전부터 70-80대의 친구들과 함께 봄, 여름, 가을 세 계절 동안 매월 한 번씩 모여서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고 오찬을 한 후 악수를 하고 헤어지는 친목 모임을 열어 왔다. 물론 “우국애민(憂國愛民)”의 충정이 일어나 “정치가 맑아지고 사회가 안정되는 태평의 생활”을 갈망하기도 했지만, 모두가 “세정에 맞고(合情), 이치에 맞고(合理), 법도에 맞는(合法)” 그저 작은 이벤트일 뿐이었다.
특히 그날 모임은 5년 전 타계한 전 인민대학 부총장 셰타오(謝韜, 1921-2010)의 추모일이었다. 고인의 기일에 맞춰 추모집의 출판을 준비한 딸 셰샤오링(謝小玲)은 그날 모임에 참석해서 별도의 출판 기념식을 열 예정이었다. 그러한 정황을 파악한 베이징 안전부는 셰사오링에게 세 차례나 추모회에 가지 말 것을 요구하고, 사복 경관을 풀어서 식당 문 앞을 감시하고, 식당에 압력을 넣어 예약을 취소하게 했다. 베이징 시 안전부의 노골적인 정치적 탄압에 격분한 두 선생은 공민(公民)의 기본 권리를 박탈한 당국을 향해 항의의 격문을 작성했다.
“베이징 공안부문이 우리에게 가한 박해는 의법치국의 정신을 완전히 위배하고 있다. 묻건대, 그대들이 그토록 권력을 남용해서 우리들의 식사 모임을 갖는 자유까지 박탈하는데, 대체 어느 법률, 어느 조항에 의거하고 있나? 우리가 서로 모여 얼굴을 보는 행위가 대체 어느 법률, 어느 조항에 위배된단 말인가? 설마 우리들의 권리는 헌법과 법률의 보호를 받을 수 없다는 말인가? 대체 왜?”
불과 열 달 전 중국공산당 제18대 중앙위원회 4차 전체회의에서는 “의법치국(依法治國)”을 전면에 내세웠다. “인민을 위한, 인민에 의한, 인민을 행복하게 하고 인민을 보호하는, 기본적인 인민 권익의 보장을 출발점이자 종착점으로 삼는, 인민이 법에 의거해 광범위한 권리와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보장하는 모든 의무를 다해야 함”을 만장일치로 결의했었다. 두 선생은 “의법치국”을 부르짖으면서 자의적으로 권력을 사용하는 바로 그 중공 중앙위원회를 다음과 같이 꾸짖었다.
“우리들이 직접 겪어 느낀 바로는 이는 10개월 전 [중공중앙의] 승인한 바에 정면 위배되는 불법적 행위이다. 소위 ‘의헌치국(依憲治國, 헌법에 근거한 국가의 통치),’ ‘의법치국(依法治國)의 기본 정신은 공민 권리를 보장하고, 권력의 집행을 규제하는 데 있다. 혹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권력의 운용을 규제함으로써 공민의 권리를 보장한다는 뜻이다. 공민의 권리를 침해하는 행위는 결국 정치권력에 그 뿌리가 있다. 예컨대 권력과 지위를 가진 자산계급에서 발생하는데, 우선 그들이 권력을 갖기 때문이다. 권세를 믿고 횡포를 부리는 호강(豪强) 자산계급이 출현하면 그들은 정경유착을 통해 권력을 매수한다.”
중 당국, 지인들과 함께하는 ‘식사 모임’까지 감시하고 제재
베이징 공안부가 두광 선생의 사회 활동을 감시하고 제재한 이유는 쉽게 설명된다. 두광 선생은 이미 1990년대부터 줄기차게 중국공산당 일당독재를 비판해 왔던 대표적인 헌정-민주주의자(constitutional democrat)이기 때문이다.
2013년 이래 중공중앙은 당시 중국 지식계에 거세게 타오르던 “헌정-민주”의 불길을 잡기 위해 이념적 진화 작업에 나서고 있었다. 두광 선생은 2010년대 “헌정 논쟁”의 중심인물이었다. 보편가치, 사법독립, 중국공산당의 어두운 과거사, 개혁개방 이후 정부의 문제점, 입헌주의, 권력분립, 등등 중국공산당이 금기시하는 민감한 주제들을 그는 논설, 서간, 강연, 논문 등의 다양한 형식으로 꾸준히 논해 왔다.
2015년 8월 급기야 베이징 안전부는 두광 선생이 지인들과 함께 하는 “식사 모임”까지 감시하고 제재하는 무리수를 두고 있었다. 불과 두 달 전인 2015년 6월 11일 중공중앙의 거물 저우융캉(周永康. 1942- )이 뇌물수수, 직권남용, 국가기밀 누설의 죄명을 쓰고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저우융캉은 중공중앙 정치국 상무위원회 9인 중 한 명으로 중국의 사법부와 경찰을 담당하는 국가 안전부문의 책임자였다. 베이징 시 안전부 역시 저우융캉의 관할 하에 있었음도 관련자의 구속·수사를 통해 밝혀진 상황이었다.
두광 선생은 70-80대 노인들의 식사모임까지 문제 삼는 베이징 시 안전부의 무리수가 저우융캉의 구속과 무관하지 않다고 판단한 듯하다. 항의서의 말미에서 두광 선생은 만약 공민의 권리 회복을 바라는 자신의 기대가 수포로 돌아간다면, “중국 사회는 여전히 저우융캉이 없는데도 저우융캉의 어두운 그늘에 덮여 있음을 보여 줄 뿐”이라며 한탄했다.
두광 선생의 항의가 중국공산당을 움직였기 때문일까? 그해 가을 베이징 시 안전부는 두광 선생에 대한 감시와 제재의 고삐를 살짝 늦췄던 듯하다. 2015년 8월 말, 두광 선생의 항의서는 홍콩, 대만의 언론에 보도되면서 중공정부에 적잖은 부담이 됐다고 사료된다. 상세한 내막을 알 수 없지만, 2015년 11월 16일 두광 선생이 수십 명의 젊은 관객들 앞에서 흥겹게 큰 목소리로 “차관소조”를 부를 수 있었다. 그 사실만으로 불과 2-3개월 만에 상황이 극적으로 바뀌었음을 느낄 수 있다.
계급적인 인민, 민족주의적 국민 아니라 공적 담론에 참여하는 ‘공민’ 내세워
위의 항의서에서도 잘 드러나지만, 두광 선생은 “헌정 민주”의 정신을 쉽고 간단하게 요약한다. 바로 “헌정”이란 국가 권력을 제약하고 공민의 기본권을 확대하는 인류의 보편가치다. 민주란 공민이 자발적인 정치 참여를 통해 정당한 권력을 창출하는 공민 주권주의의 실현이다.
두광 선생은 인민도 국민도 아닌, 공민을, 공민 사회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왜일까? 인민은 마르크시즘에 입각한 계급적 개념이다. 중국 초중고 교과서에 따르면, 인간은 사회주의 혁명에 동조하는 “인민”과 반대하는 “적인”으로 나뉜다. 국민은 1920-40년대 중국에서 국민당이 이미 선점한 개념인데다 개인보다 국가를 우선시하는 뉘앙스가 있다. 인민은 계급적인 의미가 강하고, 국민은 민족주의 색채가 짙다.
반면 공민이란 공공(公共) 영역에서 공익을 위해 자발적으로 공적 담론에 참여하는 깨어있는 사람들의 범칭이다. 누구나 생득적 권리로 공화국의 시민이 될 수는 있지만, 그 자체로 충분할 순 없다. 공민이 되기 위해선 공적 시민으로서의 교육을 받고, 공적 담론에 참여해야 한다. 그 과정을 통해서 인간의 기본권과 인류의 공공선을 인식할 때, 개인은 공화국의 시민, 곧 공민으로 거듭날 수 있다.
“공인”이 아니라 “공민”이라 쓰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연원을 추적해 보면 바로 1911년 신해년 “민국(民國) 혁명”으로 소급된다. 1911년 황제의 지배 속에서 2천 간 훈습돼 온 중국인들이 떨쳐 일어나 “제국”을 부수고 “민국”을 건설했다. 황제의 나라가 공민의 나라로 바뀌었다. 두광 선생은 20세기 초반부터 100년 역사를 파헤쳐 “헌정 민주”를 부르짖고 있다. 그 속에 중국공산당 일당독재를 해체할 수 있는 무서운 사상의 폭약이 내장돼 있다. 두광 선생의 저서를 읽어보면 더 분명히 알 수 있다. 이제 두광 선생이 말하는 “헌정 민주”의 내용을 더 깊이 살펴보자. 언제 읽어도 두광 선생의 글은 명쾌하고, 강렬하고, 건강하다! “우리의 말할 자유를 빼앗는 악당들, 모두 뿌리째 뽑아버리자!”는 70년 전 대학가의 노랫말처럼. <계속>
'송재윤의 슬픈 중국'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윗 대만’ 민주주의를 무기로 ‘골리앗 중국’에 맞서 싸우다 (0) | 2022.01.10 |
---|---|
빈곤 벗어난 역사적 위업 이뤘다” 중국 공산당의 영구집권 논리 (0) | 2022.01.10 |
中서 권력분립 강연… 학생들 “문화 침략, 정치의도 뭐냐” 공격 (0) | 2021.11.15 |
‘중국 특색 사회주의’는 사회주의인가 (0) | 2021.11.15 |
중국공산당은 왜 ‘인민’ 대신 ‘민족’을 부르짖을까 (0) | 2021.11.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