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기의 한중일 삼국지

아편전쟁 지켜본 일본 “중국은 온몸이 병든 환자”

bindol 2021. 11. 20. 04:30

일본, 언제부터 중국을 싫어하게 됐나

아편전쟁이 한창이던 1841년 1월 영국 동인도회사가 만든 철제 증기선 네메시스호(그림 오른쪽)가 청나라 범선들을 공격하고 있다. 일본은 아편 전쟁을 계기로 중국에 대한 선망을 거둬들이기 시작했다. [사진 글항아리]

개황(開皇) 20년, 왜왕(倭王)이 보낸 사신이 궁궐에 찾아왔다. 황제는 담당 관리를 시켜 그 나라의 풍속을 묻도록 했다. 사신은 “왜왕은 하늘(天)을 형으로 여기고 해(日)를 아우로 여겨 날이 밝기 전에 나와 정무를 보는데, 정좌하다가 해가 뜨면 문득 정무 보는 것을 그만두고 ‘나의 아우에게 맡긴다’고 합니다”라고 했다. 고조(高祖)는 “이것은 의리에 크게 어긋나는 것”이라며 가르쳐서 고치도록 했다.

600년 왜국이 중국 수나라에 사신을 파견했을 때 벌어진 상황을 기록한 『수서(隋書)』 동이전의 내용이다. 흥미로운 것은 왜왕이 수에 조공을 바치면서도 자신을 ‘하늘의 동생이자 해의 형’이라 하여 수 황제의 심기를 몹시 불편하게 했던 사실이다.

시대 따라 달라진 일본의 중국관
“문화선진국” 고대부터 동경해와

아편전쟁 이후 중·일연대론 부각
청일전쟁 승리하며 자신감 넘쳐

최근 국력서 밀리며 초조함 증폭
한국의 외교 고민 갈수록 깊어져

일본 열도에 있던 소국들이 중국에 조공을 바치기 시작했던 것은 기원전 1세기경부터였다. 『한서(漢書)』 지리지에는 ‘낙랑(樂浪)의 바다 가운데 왜인이 있고 백여 개의 소국이 있는데 세시(歲時)에 와서 조공한다’고 했다. 또 『후한서(後漢書)』 동이전에는 57년 왜의 노국(奴國)이 와서 조공하자 광무제(光武帝)가 인수(印綬)를 하사했다고 기록했다.

중국행 사신·학자·승려들 끊이지 않아

왜국에서 당나라에 보낸 사신을 태운 견당선 장제스 모형. 후쿠오카시립미술관 소장품이다.

이렇듯 고대 일본인에게 중국은 조공을 바치고 섬겼던 외경(畏敬)의 대상이자 선진국이었다. 7세기 초부터 9세기 초까지 견수사(遣隋使)와 견당사(遣唐使)를 파견했던 것은 선진 문물과 제도, 기술 등을 배우려는 목적이었다. 간혹 일본 측의 오만한 자세 때문에 사달이 빚어지기도 했다. 607년 견수사 오노노 이모코(小野妹子)가 가져간 국서에는 ‘해 뜨는 곳의 천자(日出處天子)가 해 지는 곳의 천자(日沒處天子)에게 보낸다’라는 문장이 실려 있었다. 왜왕이 ‘일출처천자’ 운운하며 자신에게 대등하게 맞서려 하자 수 양제(煬帝)는 격분할 수밖에 없었다.

견당사는 630년부터 250여 년 동안 모두 17차례 파견됐다. 사신뿐 아니라 유학을 목적으로 한 학자·승려들이 동행했다. 유학생 가운데는 수십 년간 머물면서 당의 학술과 문물을 배운 사람도 있었다. 이들이 배워 온 당의 율령과 불교, 각종 기예는 고대 일본이 발전하는 데 중요한 자양분이 됐다.

10세기 이후에도 일본인의 중국과 중국 문물에 대한 동경은 이어졌다. 송과 일본을 오가는 무역선을 타고 많은 승려가 중원으로 건너갔다. 일본 귀족은 당금(唐錦)이라 불린 중국산 비단에 열광했고 도자기·약재·서적·그림 등을 앞다퉈 구입했다. 가마쿠라(鎌倉) 시대 이후에도 중국은 여전히 선진적인 문물이 넘쳐나는 동경의 대상이었다.

쿠빌라이

1274년과 1281년, 쿠빌라이가 주도한 몽골(원나라·元)의 침략을 겪으며 일본인의 원에 대한 적개심과 공포심은 고조됐다. 하지만 침략 이후에도 원과 일본의 경제·문화적 교류는 끊이지 않았다. 1976년 도자기 수만 점 등과 함께 신안 앞바다에서 인양된 선박은 당시 활발했던 양국 사이의 교역 상황을 웅변해 준다. 원나라 말기, 중원으로 건너간 일본의 선승(禪僧)도 수백 명에 이르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1592년 ‘명 정복’을 내세워 임진왜란을 일으켰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기존의 중국 인식에 비춰보면 분명 ‘변종’이자 ‘괴물’이었다. 스스로 ‘태양의 아들’을 칭하고 군사력에 자신감이 넘쳤던 그는 명을 ‘긴 소매의 옷을 입은 나라(장수국·長袖國)’, 즉 군사력이 허약한 나라로 여겼다. 그러면서 장차 명을 장악하면 천황(天皇)을 베이징(北京)으로 이주시키고 자신은 닝보(寧波)에 머물며 인도까지도 정복하겠다고 떠벌렸다. 중국에 대해 극단적으로 자신감을 드러냈다.

“중국 대신 동양의 맹주 됐다” 환호

임진왜란 직후부터 19세기 후반까지 이어진 도쿠가와(德川) 시대에는 중국을 존숭하고 동경하는 인식과 더불어 중국을 상대화하거나 열등하게 여기고 일본을 찬미하는 인식이 함께 나타난다.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1561∼1619) 등의 유학자들이 전자를 대표한다면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1730∼1801)나 히라타 아쓰타네(平田篤胤·1776∼1843) 등 국학자들은 후자를 대표한다. 특히 히라타는 “천황이 있는 황국(皇國) 일본이야말로 태초 이래 가장 뛰어난 나라로 세계에 군림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1840년 발생했던 아편전쟁에서 청나라가 영국에게 굴복했던 것은 일본인의 중국 인식 변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당시 청을 여전히 대국이라 생각했던 지식인들은 이 전쟁을 계기로 청을 ‘유약한 나라’이자 ‘온몸이 병들어 나을 가망이 없는 환자’로 여기게 됐다. 또 청을 제압한 영국 등 서구 열강의 마수가 일본으로 뻗쳐 올 것에 대비해야 한다는 위기의식이 고조됐다. 한때 청을 치자고 주장했던 사토 노부히로(佐藤信淵·1769∼1850)는 아편전쟁 이후 “청 황제를 설득해서 영국에 복수할 수 있는 힘을 키우게 하는 것이 일본의 안전을 위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일종의 중·일연대론이었다.

전쟁 이후 ‘유약하고 망가진’ 중국에 대한 자신감은 급속히 커졌다. 1862년 상하이(上海)를 방문한 다카스키 신사쿠(高杉晉作·1839∼1867)는 청의 현실을 직접 살펴볼 기회를 갖게 된다. 그는 상하이에서 공자사당이 영국군 병영으로 전락한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또 “지나인(支那人)은 전부 외국인에게 사역당하고 있다”거나 “청 정부의 난정(亂政) 때문에 중국의 참상이 빚어졌다”고 기록했다. 동행했던 또 다른 일본인은 청군의 무기력함을 거론하고 “일본인 한 사람이 다섯 명의 청인을 대적할 수 있으니 1만 기병만 있으면 청을 종횡으로 유린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급기야 1894년 청일전쟁을 계기로 중국에 대한 멸시와 우월감, 자신감은 굳어졌다. 청일전쟁 승리 이후 일본 국민 사이에서는 “지나는 지도상으로만 커다랄 뿐 실력이 없다”는 인식이 퍼져갔다. 나아가 일본이 이제 중국을 대신하여 ‘동양의 맹주’가 됐다는 자부심이 하늘을 찔렀다.

시간이 더 흐르면서 위태로운 청을 독립국으로 보전시킬 의무가 일본에 있다고 강조하는 주장도 나타난다. 청이 열강에 넘어가 일본의 국익이 침해되는 것을 막기 위해 ‘중국 영토를 보전하고(支中)’ ‘ 중국을 올바른 길로 이끄는 데’ 일본이 앞장서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1874∼1937)는 1911년 발생한 신해혁명을 지원하고, 중국을 ‘요리’하려는 목적에서 이른바 지나개조론(支那改造論)을 제시한 바 있다.

중국에 대한 우월감과 자신감은 만주사변이 일어날 무렵 극에 이른다. 1929년 이케자와 주코(池崎忠孝)는 중국과 전쟁을 벌일 경우 육군 3~4개 사단과 함정 3~4척만 있으면 대륙을 장악할 수 있다고 호언했다. 그리고 주지하듯이 일본은 1937년 중국에 대한 전면적인 침략에 나선다. 비록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2000년 가까이 ‘동경의 대상’이었던 대국을 ‘정복’하겠다는 무모한 모험을 감행했다.

장제스

1945년 8월 15일, 국민당 주석 장제스(蔣介石)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 항일전 승리와 관련된 연설을 했다. 핵심은 항복한 일본에 대해 보복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구체적으로는 “일본의 폭행을 폭행으로 되갚거나 일본의 그릇된 우월감을 그들을 모욕하는 것으로써 응징하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중국 공산당은 장제스의 선언에 반발했지만 일본은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인 90% “중국 인상 좋지 않아”

오늘 일본인의 중국 인식은 어떤가. 그것은 친애와 혐오가 뒤섞인 모습을 보여준다. 1980년대까지는 패전 이후 30여년 만에 세계 2위 경제대국으로 올라서면서 되찾은 자신감을 바탕으로 아직 여러 분야에서 뒤처진 중국을 도와야 한다는 친애의 자세가 두드러졌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 중국의 경제력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면서 상황은 달라진다. 더욱이 2010년 GDP에서 중국에 추월당하고, 중국과의 국력 격차가 점점 벌어지면서 일본의 초조감이 커지고 있다. 힘이 세진 중국이 역사 문제와 영토 문제를 바탕으로 일본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면서 일본 우익 사이에서는 ‘중화제국주의를 분쇄하자’라는 구호까지 등장했다.

2021년의 상황은 점입가경이다. 얼마 전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중국에 대한 인상이 좋지 않다”고 답한 일본인의 비율이 90%에 달했다. 날로 격화되는 미·중 패권경쟁의 구도 속에서 일본은 철저하게 미국 편에 서기로 작심한 듯하다. 미국은 물론 중국·일본과의 관계를 제대로 풀어야만 안전과 번영을 유지할 수 있는 한국의 고민이 갈수록 깊어지고 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