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아더가 해산한 일본군, 동아시아 ‘태풍의 눈’으로
입력 2021.12.03 00:28
역사 속 3차례 일본인 무장해제
1945년 9월 2일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도쿄항에 정박 중인 미 태평양 함대 소속 미주리호 선상에서 일본의 항복 문서에 서명하고 있다. [중앙포토]
1587년 전국시대(戰國時代)를 끝내고 일본의 패권을 차지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는 본래 미천한 출신이었다. 소년 시절 가출하여 바늘 행상 등을 하며 각지를 떠돌던 그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를 섬기면서 군사적 재능을 인정받아 출셋길에 들어선다. 1582년 노부나가가 가신(家臣) 아게지 미쓰히데(明智光秀)의 배신에 휘말려 자살하자 히데요시는 곧바로 미쓰히데를 응징한 뒤 경쟁자들을 잇달아 제거하고 주군 자리에 올랐다.
오로지 실력과 지략으로 배신과 하극상(下剋上)이 난무하던 난세를 평정한 히데요시는 집권 이후 자신의 권력을 영구히 유지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우선 주목되는 것은 1582년 시작한 검지(檢地, 토지조사 사업)였다. 농경지 면적과 품위를 측정하여 연공(年貢) 부과의 기준을 정하고, 경작자를 검지장(檢地帳)에 등록하는 것이었다. 등록 토지를 매매하거나 저당 잡히는 것이 금지됐고, 경작자 또한 농작을 포기하거나 농촌을 이탈할 수 없었다. “논밭을 팽개치고 장사나 품팔이에 나서는 백성이 있을 경우, 본인은 물론 나머지 촌민(村民)도 처벌할 것”이라는 으름장도 곁들였다.
권력 기반 다지려 무사에만 허용
1868년 메이지유신 때도 추진
칼 빼앗긴 지방세력들 반발 거세
1947년 일본군대 금지령 무너져
전력 키우며 선제타격론도 등장
검지 때문에 토지에 묶여 항상적으로 착취당할 처지에 몰린 농민들, 과거의 기득권을 상실할 위기에 처한 지역의 토호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곳곳에서 일규(一揆)라 불리는 격렬한 저항운동을 벌였다. 1587년 규슈의 비후(肥後, 현재 구마모토(熊本) 지역)에서는 수백 정의 조총과 궁시 등으로 무장한 농민 1만5000여 명이 들고일어났다. 격앙된 히데요시는 비후 주변의 다이묘(大名)들에게 총동원령을 내려 농민을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칼을 사냥한다’ 뜻하는 도수령(刀狩令)
태평양 전쟁 패전 직후 바다에 버려진 일본군 무기들. [중앙포토]
비후의 봉기를 진압했던 히데요시는 향후의 저항 운동을 원천 봉쇄하기 위해 1588년 7월, 전국적으로 이른바 도수령(刀狩令)을 발포한다. 문자 그대로 ‘칼을 사냥한다’는 뜻으로, 민간이 보유한 각종 무기를 몰수하는 것이었다. 칼·궁시·창·조총 등을 소지하는 것을 엄금하여 백성들을 무장해제하려 했다. 오직 무사들에게만 무기를 허용함으로써 신분 사이의 차별과 위계를 명확히 하려는 법령이기도 했다.
몰수된 무기는 녹인 뒤에 방광사(方廣寺) 대불전(大佛殿)에 필요한 못이나 걸쇠 등을 만드는 데 충당됐다. 도수령을 준수하라고 강조하는 과정에서 “백성들은 농기구만 갖고 경작에 열심히 종사하다가 사후에는 부처의 가호를 받아 안락을 누릴 수 있다”거나 “자자손손 영화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등의 선전과 이데올로기 조작이 벌어지기도 했다.
오다 노부나가
히데요시는 검지와 도수령을 통해 국내 통치 기반을 안정시키고 대외 침략을 위한 군역(軍役) 체계를 확립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도수령은 모든 백성에게 철저하게 관철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백성들 사이에 퍼진 무기 소지 열망이 워낙 강했기 때문이었다. 1550년대 이래 일본 사회를 예민하게 관찰했던 예수회 선교사는 “열세 살 이상 남자들은 장검과 단검을 항상 갖고 있으며 그것을 대단히 소중히 여겨 잠잘 때도 풀어놓지 않는다”고 기술한 바 있다. 장기간 이어진 험악한 내전 시대에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마지막 수단으로써 무기는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실제로 도쿠가와(德川) 시대에는 농민들이 위해조수(危害鳥獸)를 퇴치하는 데 필요하다는 명목 등을 내세워 조총과 장검 등 각종 무기를 소지하고 있었다. 또 농촌에서 살인·절도 등을 저지른 범인들을 체포하는 것은 촌민들에게 공동으로 부과된 임무였는데 그 과정에서 무기 사용이 허용되고 있었다. 나아가 여행하거나 축제·제례 등을 벌일 때 칼을 소지하는 것도 공인됐다. 이런 정황을 근거로 도쿠가와 시대에는 칼 길이, 칼날 형태, 칼집 색깔 등 외관에 대한 규제가 있었을 뿐 백성과 정인(町人)들이 칼을 소지하는 것은 문제가 없었다는 학설도 존재한다. 요컨대 근세 일본에서 백성들을 완전히 무장해제하는 것은 여의치 않았던 셈이다.
관리·군인에만 칼 허용한 폐도령(廢刀令)
동중국해에서 연합훈련 중인 일본 전함과 미국 로널드 레이건 항공모함(오른쪽). [사진 일본 해상자위대 트위터]
일반인에 대한 무장해제 시도는 1868년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후 재현된다. 메이지 정부는 1870년 12월, 농공상(農工商)이 칼을 차는 것을 금지했다. 이어 1875년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는 군인에게만 무기를 휴대할 수 있도록 하자는 의견서를 제출한다. 논의 끝에 정부는 1876년 3월 이른바 폐도령(廢刀令)를 내린다. 대례복(大禮服)을 착용한 관리, 군인, 그리고 경찰 이외에는 칼을 차는 것을 금지하는 법안이었다. 사무라이 출신의 사족(士族)들은 격렬하게 반발했다. 일찍이 히데요시의 도수령에 맞서 봉기했던 구마모토의 사족 190여 명은 1876년 10월, 폐도령에 반발하여 다시 들고일어난다. 이들의 봉기는 정부군에 의해 곧 진압됐지만, 후쿠오카(福岡)와 야마구치(山口) 등에서도 불만 사족들의 저항은 이어진다.
1941년 12월, 일본 연합함대가 하와이의 진주만을 기습 공격함으로써 태평양전쟁이 일어난다. 일본군이 초전에 기세를 올렸지만 날이 갈수록 전황은 암울해진다. 급기야 마리화나 제도에서 항공모함이 전멸하고 사이판이 함락된 1944년 7월 이후 일본의 이른바 절대 방공권(防空圈)이 와해하기 시작했다. 1945년 3월 유황도(硫黃島), 6월 오키나와가 무너지고 도쿄·오사카 등지를 B29가 맹폭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일본의 패망은 시간문제가 됐다.
같은 해 7월 포츠담 선언이 공포됐지만 일본이 곧바로 수락하지 않으면서 원자폭탄이 떨어지고, 소련까지 선전포고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최악의 상황으로 내몰린 뒤에야 일본은 항복하기로 결정한다.
8월 16일 일본 대본영(大本營)은 국내외 부대에 전투정지령을 내린다. 하지만 현장 군인들의 반발은 이어졌다. 당장 도쿄 근처 아츠키(厚木) 비행장에 주둔하던 해군 항공대가 격렬하게 저항했다. 그들은 총을 난사하여 시설물을 파괴하는가 하면 결사항전을 호소하는 전단을 뿌렸다. 심지어 수상 관저 상공에 비행기를 띄워 위협했다. 항복을 선언한 일본 정부는 점령군이 들어왔을 때 혹시라도 충돌이 발생하지나 않을까 우려할 수밖에 없었다.
점령군으로 진주할 예정이던 미군 역시 바짝 긴장했다. 선발대를 들여보내 현지의 안전 여부를 확인했다. 이윽고 8월 30일 맥아더가 아츠키 비행장에 도착하면서 미국의 점령 정책이 시작된다. 맥아더와 그가 이끌고 온 GHQ(연합국 최고 사령관 총사령부)의 임무는 항복한 군국주의(軍國主義) 일본을 철저하게 개조하여 다시는 미국에 함부로 도전하지 못하는 나라로 만드는 것이었다.
전범 체포, 군수공업 폐지 등 실행
도요토미 히데요시
맥아더가 가장 먼저 착수한 것은 일본군의 무장해제였다. 비록 패전했지만 당시 일본군은 720만 명이나 되는 어마어마한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맥아더는 1945년 10월 말까지 먼저 일본 국내의 군대를 해산했다. 그들이 갖고 있던 각종 병기와 중장비들을 압수하고 개인 화기들을 몰수·폐기했다. 전범(戰犯) 체포, 비밀경찰 폐지, 군국주의자 공직 추방, 관련 단체 해산, 재벌 해체, 군수공업 폐지 등도 실행했다. 일본인의 반항과 테러 등을 예방하기 위해 민간이 소지한 총포와 도검류도 모조리 압수했다.
미국은 일본의 미래도 규정했다. GHQ가 주도해 만들고 1947년 공포된 일본의 새 헌법(평화헌법)에는 ‘일본은 전쟁을 영구히 방기하고 군대를 보유하지 않고 국가의 교전권(交戰權)도 포기한다’는 조항이 명시됐다. 그것은 새로운 도수령이었다. 나아가 히데요시나 아리토모가 제시한 것보다 훨씬 철저하고 강력한 제3의 도수령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안팎의 정세가 변하면서 평화헌법에 명시된 군대 보유 금지와 교전권 포기 원칙은 야금야금 무너졌다. 이미 막강한 전력을 보유한 해상자위대(自衛隊)를 비롯한 일본의 군사력은 불안정한 동아시아 정세 속에서 태풍의 눈으로 떠오르고 있다. 더욱이 지난 11월 일본 정부는 이른바 국가안보전략(NSS)를 개정하여 ‘적 기지 공격 능력 보유 문제’를 논의하겠다고 밝혔다. 상대의 공격 징후가 보이면 선제적으로 타격하겠다는 것이다.
일본은 과연 ‘제3의 도수령’을 폐기하고 군사대국의 길로 회귀할 것인가. 중국·북한과의 관계가 여의치 않고 일본과의 관계 또한 최악인 오늘, 국가 안보를 지키기 위해 한국이 풀어야 할 방정식의 난도(難度)는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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