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 실용주의 관리 서유구가 난세에 대처한 자세 ②/끝
정도전과 서유구, 그리고 선비
고려 말기인 1375년 성리학으로 무장한 신진사대부 정도전이 전라도 나주 소재동으로 유배됐다. 유학자가 왔다는 소식에 노인 하나가 정도전을 찾았다. 마중 나온 종에게 유학자가 하는 일이 뭔가 묻자 종이 답했다. “음양과 오행, 초목의 크고 시듦, 삶과 죽음의 이치까지 통달해 아는 사람이외다.” 그러자 노인이 이리 답하곤 돌아가 버렸다. “실상이 없으면서 이름만 있으면 귀신도 미워한다고 했고, 스스로 어질다 하고 남을 대하면 남이 받아들이지 않는다. 알 만하구나.”(정도전 ‘삼봉집’4, ‘금남야인·錦南野人’)
얼굴 화끈해진 정도전이 정신을 차려보니 그들은 순박하고 허영심이 없으며 글자도 약간 알았고 사투리, 속담도 잘 알았다. 생면부지 유배객을 도와 집도 지어주며 두텁게 대접했다.(‘삼봉집’4, ‘소재동기·消災洞記’) 그저 뛰어난 자를 믿고 복종하는 어둡고 우매한 존재들(‘삼봉집’3, ‘정몽주에게 보내는 편지[上鄭達可書·상정달가서]’)이 아니었다.
부끄럽고 감동이 되었던 그는 훗날 경세제민(經世濟民) 즉 ‘부국(富國)’을 하고 천리 밖에서 적의 예봉(銳鋒)을 꺾는(折衝千里之外·절충천리지외) ‘강병(強兵)’을 하는 관리를 이상으로 삼았다. 그런 세상이 오면 남쪽 변방에서 갇힌 채 죽더라도 한이 없겠다고 다짐했다.(‘삼봉집’3, ‘과거 떠나는 조박을 전송하는 서’[送趙生赴擧序·송조생부거서]) 하여 무장 이성계와 신진사대부 연합 세력은 부패한 고려를 타도하고 새 나라를 세웠다.
세월이 까마득하게 흘러 19세기 초, 정계에서 물러나 농사짓던 조선 관리 서유구가 이렇게 기록했다. “곡식이나 축내고 세상에 보탬 되지 않는 자 중에 글 쓰는 선비가 으뜸이다(空蝗黍粟無補於世者 著述之士實爲之最·공황서속무보어세자 저술지사실위지최).”(‘풍석전집’, ‘금화지비집’3, 금석사료서) 왕조들이 흥멸하는 동안에 무엇이 변했으며, 무엇이 변하지 않았는가. 전 지구가 어지럽게 회전하던 19세기에 서유구는 곡식 축내는 선비들에게 무슨 화두를 던졌을까.
[241] 실용주의 관리 서유구가 난세에 대처한 자세 ②/끝
낙향 생활 18년과 대각성
정도전이 귀양살이를 하던 14세기 말, 고려 백성은 좋은 땅을 가지고 있으면 모두 때리고 장을 쳐서 빼앗겨, 송곳 꽂을 땅도 없어 부모와 처자식이 굶주림과 추위에 떨다가 헤어지고 흩어지던 때였다.(1385년 11월 ‘고려사절요’, 1388년 7월 ‘고려사’, 식화1, ‘토지 겸병에 대한 상소’)
조선 왕조가 말기에 접어든 19세기도 마찬가지였다. 민간에서는 고질적 병폐인 삼정(환곡⋅전정⋅군정) 문란이 극단으로 치닫고 있었고 권력 세계에서는 권력을 특정 가문이 독점한 세도정치가 한창이었다. 초계문신 출신인 김조순이 순조 장인이자 후원자로 등장하면서 세도정치 시대는 본격적으로 개막했다.
1806년 초계문신 동료 김달순이 상소 문제로 처벌받았다. 서유구 삼촌 서형수도 이에 연루돼 유배형을 받았다. 서유구는 곧바로 사표를 내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정계 복귀까지 18년이 걸렸다.
그 사이에 서유구는 고향 파주 장단을 시작으로 여러 차례 이사를 하며 가난하게 살았다. 농사를 짓고 땔감을 줍고 ‘7척이나 되는 몸뚱어리가 조그만 거처조차 빌리지 못하며’ 살았다. 못이 박인 아들 손을 보고서 어머니 한산 이씨는 이렇게 말했다. “도시에 살면서 호미도 못 알아보며 배에 곡식 채우고 몸에 비단 두르는 이들은 천지를 훔치는 도적놈이로다!”(정명현 등, ‘임원경제지, 조선 최대의 실용백과사전’, 씨앗을 뿌리는 사람, 2012, p176~179) 그리고 서유구가 각성을 했다. 정도전처럼, 세상을 보는 다른 눈이 열려버린 것이다.
“흙 국과 종이 떡은 가라”
워낙에 실용적 가풍 속에 성장한 서유구였다. 뇌속에 박혀 있는 그 실용주의적 시각과 18년간 몸으로 겪은 백성들 삶이 융합되면서 서유구에게는 고담준론하는 사대부들이 메뚜기처럼 보였다.
‘(사대부는) 조상 중 1명이라도 벼슬한 이가 있으면 눈으로는 고기 어[魚]와 노나라 노[魯]자도 구별 못 하면서 손으로는 쟁기나 보습을 잡지 않는다. 처자식이 굶주려 아우성쳐도 돌아보지 않고 손 모으고 무릎 꿇고 앉아 성리(性理)를 이야기한다.’ 독설은 이어진다. ‘왕은 앉아서 도를 논한다는데 뭘 논하는지 모르겠고 사대부는 일어나 행한다고 하는데 뭘 행하는지 모르겠다.’ 그리하여 서유구가 결론을 내린다. ‘(조선이) 천하의 가난한 나라가 된 것은 참으로 어쩔 수 없는 추세일 뿐이다.’(‘임원경제지’ 예규지 서문, 섬용지4 공업총정리, 정명현 등, 앞 책, p426, 427 재인용)
그래서 서유구는 방향을 틀었다. 공자 왈과 맹자 왈을 담은 경서와 현실적 준비 없이 세도정치 모순을 깨뜨리겠다는 이상주의적 경세론은 ‘먹지 못할 흙국이요 종이로 만든 떡(토갱지병·土羹紙餠)’이니, 자기는 백성이 현실에서 스스로 부국(富國)할 길을 트겠다는 것이다. 세상은 엄혹했다. 대표적인 경세론 학자인 정약용도 ‘내가 쓴 목민심서는 반 구절도 다른 사람에게 보여선 안 된다’고 두려워할 정도였다.(정약용, ‘약암 이재의에게 보낸 편지')
서유구는 경세론을 포기하고 먹을 수 있는 국과 떡을 만들었다. 그게 ‘임원경제지’다. 농촌 경제를 열여섯 분야로 나눠 2만7000개가 넘는 표제어를 자그마치 250만자가 넘는 분량으로 설명한 책이다.
서유구가 겪은 참담한 나라
그 나라는 본인이 겪은 풍상은 유도 아니었다. ‘임원경제지' 가운데 생활용품을 다룬 ‘섬용지’ 서문은 이러했다. ‘한 항목이라도 한숨 나오지 않는 것이 없다. 벽돌 굽는 제도는 들어본 적이 없고 배는 겨우 다닌다는 이름만 있다. 수레는 아예 막막하다. 이래서 온 나라 사람이 지지리도 힘들게 이고 지고 다닌다. 우리 것이 이처럼 거칠고 졸렬하여 바다 건너 오랑캐 일본(海中之一醜·해중지일추)에게서 상품을 수입하게 될 줄 누가 생각했겠는가.’ 지식인들의 나태함과 비현실성을 한탄했던 서유구는 아예 독자에게 이렇게 주문한다. ‘섬용지 독자들이여, 분개하는 바가 있을지어다(其有所興慨者與·기유소흥개자여)!’(이상 국역: 정명현 등, 앞 책, p937)
이 모든 원인은 사대부, 바로 조선의 지식인들이었다. ‘우리 사대부들은 벌레와 물고기 이름을 고증하는 학문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하여 어부와 나무꾼이 비속어로 전하도록 내버려둔다. 그래서 (잘못된 지식을) 시정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풍석전집’, 금화지비집 ‘낙랑칠어변’, 김대중, ‘풍석 서유구 산문연구’, 서울대 박사논문, 2011, p118, 재인용)
서유구가 존경하고 따랐던 연암 박지원 눈에도 세상은 똑같았다. 박지원이 쓴 ‘열하일기’에는 ‘호질(虎叱·호랑이가 꾸짖음)’이라는 소설이 나온다. 창귀들이 선비를 잡아먹자고 추천했으나, 호랑이는 “유자(儒者)는 딱딱해서 체하거나 구역질이 난다”고 망설인다. 그러다 북곽선생이라는 고상한 유자를 만났는데, 그가 호랑이를 극구 칭찬하자 호랑이가 이리 말했다. “유자가 아첨꾼이라더니 참말이구나!”(박지원, ‘열하일기’ ‘호질’) 지식을 담당한 선비들의 나태함에, 결국 ‘사용하는 기구는 간편해지는데 조선은 옛 방법을 고집해 백배로 힘들면서 깨닫지 못하니 온 나라가 궁핍해진 이유가 이것이다.’(‘임원경제지’ ‘전공지 서문’)
백성의 백과사전, 임원경제지
그래서 ‘임원경제지’에는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국을 끓이는 방법과 사람이 씹어 삼킬 수 있는 떡 만드는 법들이 구체적으로 적혀 있다. 과거와 현재, 나라 안과 밖이 다 다르므로, 오로지 조선에 필요하고 시행 가능한 정보만을 담았다고 했다.(‘임원경제지’ ‘예언’) 밭고랑 간격과 깊이는 어찌해야 하며 화훼를 심을 때는 어찌해야 하며 도배는 어떤 종이와 기름과 풀과 아교를 써야 하며, 금과 은, 구리와 철 따위 금속을 어떻게 채취하고 가공하고 활용해야 하는지 적었고, 물건을 사고팔 때 가까운 장터는 몇 리쯤 되는지 거리표까지 삽입해 설명해 놓았다. 임원경제연구소 소장 정명현은 이렇게 평했다. ‘어떻게 전국 자료를 이렇게 자세히 조사했는지는 잘 모르겠다.’(정명현 등, 앞 책, p1459)
그 모든 분야에 서유구는 중국과 조선, 일본 책까지 인용해 가장 실용적인 정보를 골라서 설명해놓았다. 현대 논문처럼, 출처는 명쾌하게 밝혀놓았다. 이 가운데 요리법을 다룬 ‘정조지’는 최근 풍석문화재단 음식연구소에서 그 몇 메뉴를 그대로 재현해 호평을 받기도 했다.<2020년 11월 17일 본지 ‘조선 셰프’ 서유구 비법, 그대로 재현했죠' 기사 참조>
허망했던 백과사전의 종착지
그런데 세상은 쉽게 변하지 않았다. 18년 시골 생활 후 관직에 복귀했으나 세상은 소란했다. 훗날 그가 스스로 쓴 묘지명 ‘오비거사생광자표(五費居士生壙自表)’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근심스러운 처지에 근심을 잊기 위해 온갖 서적을 널리 수집해 임원경제지를 편찬했으니 이 일에 골몰한 것이 앞뒤로 30여년이다. 그런데 인쇄를 하자니 재력이 없고 장독대 덮개로나 쓰기에는 충분하니 이 또한 낭비로다.’(김대중, 앞 논문, p165, 재인용)
결국 ‘임원경제지'는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세상에 나오지 못했다. 나라가 망하고 암울한 식민 시대, 1930년대에 조선 지식인계에 국학(國學) 부흥 운동이 벌어지면서 다른 실학자들 저서와 함께 전질 필사되며 햇빛을 보았다. 그나마 그때도 각광받은 인물은 다산 정약용이었다.
이제 21세기가 20년이 흐른 지금에야 서유구와 임원경제지와 그가 품었던 실용주의 철학이 눈길을 끈다. 게다가 그가 관찰한 ‘가난한 나라 되는 법’은 지금도 유효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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