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9] 전주 이씨 시조 묘 조경단
전북 전주 덕진동 전북대학교와 덕진체련공원 사이에 제사 때를 빼고는 늘 닫혀 있는 문이 있다. 문 너머 공간 이름은 조경단(肇慶壇)이다. ‘경사가 시작된 제단’이라는 뜻이다. 또 있다. 옛 전주부성 남문 이름은 풍남문(豐南門)이고 서문 이름은 패서문(沛西門)이다. 풍(豐)과 패(沛)는 한나라 유방이 군사를 일으킨 강소성 패군 풍현을 가리킨다. 즉 제왕의 땅이라는 말이다.
이쯤이면 조경단이 무엇이고 풍남문과 패서문이 무엇인지 짐작이 가리라. 조선 왕실에 전주는 풍패지향(豊沛之鄕), 새 왕조를 일으킨 제왕의 고향이라는 말이다.
조경단은 전주 이씨 시조인 이한(李翰)을 기리는 제단이다. 그리고 강원도 삼척에는 이성계의 5대조 이양무 무덤, 준경묘(濬慶墓)가 있다. 518년 이어진 조선 왕실은 건국 507년 뒤인 1899년에야 이들을 찾아내 단과 묘를 만들었다. 전주에서 시작해 두만강 건너 알동(斡東)까지 이어진 전주 이씨 왕실 흥망사 이야기다.
[239] 전주 이씨 시조 묘 조경단
전주를 떠난 전주 이씨들
성품이 호방하여 천하를 경략할 뜻을 가진 전주 호족 이안사는 때마침 전주에 파견된 산성별감과 관기(官妓)를 두고 다투었다. 이에 이안사는 화를 피해 수하 식솔 170여 호와 함께 강릉도 삼척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런데 그 산성별감이 하필이면 강릉도 안렴사로 부임하자 다시 화를 피해 바다를 건너 북쪽 덕원, 곧 함흥 땅으로 옮겼다. 함흥은 그때 몽골 땅이었다.(‘태조실록’ 총서)
삼척을 떠나기 전 이안사 부친 이양무가 죽었다. 삼척 지역 설화에 따르면 묏자리를 찾는 이안사에게 한 승려가 “소 백 마리를 잡아서 개토제를 하고 금으로 관을 만들면 5대 뒤 임금이 난다”고 했다. 가난한 이안사는 일백 백[百] 대신 흰 백[白]을 써서 흰 소를 제물로 삼고 황금 대신 누런 귀릿짚으로 관을 삼아 장사를 치렀다.(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선원계보 17세 양무) ‘백우금관(百牛金棺)’ 신화다. 예언대로 이안사 5대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했다.
금의환향한 다루가치들
이성계(5대)와 이방원(6대)까지 이들을 세종은 ‘용비어천가’에서 해동육룡(海東六龍)이라 불렀다. 이안사(목조), 이행리(익조), 이춘(도조)과 이자춘(환조)과 이성계(태조)와 이방원(태종)이다. 1254년 이안사는 두만강 건너 지금 러시아 땅인 알동(斡東)으로 옮겨 원나라 지역 관리가 되었다. 그 손자 이춘은 몽골명이 발안첩목아(孛顔帖木兒)였고 그 아들 이자춘은 오로사불화(吾魯思不花)였다. 이들은 몽골 지역 수장인 다루가치로 넓은 영역을 통치했다.(‘태조실록’ 총서)
그러다 이춘이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서 흑룡과 싸우던 백룡을 도와주니 백룡이 ‘큰 경사가 자손에게 있으리라’고 예언하는 것이다. 아들 이자춘이 고려에 귀순해 공민왕 휘하에서 몽골을 격퇴하고, 영흥에서 아들을 낳았다. 그가 이성계다.
이성계 또한 왜구 격퇴에 무공을 세우고 드디어 새 나라를 세웠다. 백우금관 설화가 실현된 것이며 고조 이안사 때 쫓기듯 떠난 고향으로 찬란하게 복귀한 것이다. 그러니 삼척과 고향 전주가 얼마나 소중하겠는가.
제왕의 땅, 풍패지향
전주는 전주 이씨 왕실의 고향이었다. 태종 때 조선왕조는 전주에 어용전(御容殿)을 건립했다. 세종 때 경기전(慶基殿)으로 개칭된 어용전은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를 봉안한 전각이다. 하지만 임진왜란 전까지 제왕의 땅, 풍패지향은 함흥과 함길도(함경도) 일대였다. 함길도 관찰사 정갑손은 “본도(本道)는 우리 조정의 풍패”라 했고(1443년 4월 7일 ‘세종실록’) 선조 때에도 “(함길도는) 풍패의 땅이므로 지키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1605년 5월 29일 ‘선조실록’)
삼척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왕실에서는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제후 조상묘는 4대까지 제사를 지내는 유교 예법에 따라 이성계 5대조인 이양무는 예법 바깥에 있는 존재였다.(이욱, ‘조선시대 왕실 원조의 무덤 찾기’, 종교연구 60집, 한국종교학회, 2010) 1580년 강원도 감사 정철이 “천하 명당에서 이양무 묘를 찾았다”고 보고하며 정비를 요청했지만 묵살됐다.
왜란과 호란 두 전란이 끝나고 양반 사회가 안정되던 조선 후기, 사대부 집안을 중심으로 족보 제작과 시조묘 찾기 열풍이 불었다. 고조까지만 제사를 지내는 ‘사대봉사(四代奉祀)’ 한계를 뛰어넘어 묘 앞에서 제사를 지내는 묘제(墓祭)를 통해 가문을 결속하려 한 것이다.(이욱, 앞 논문)
왕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려면 묘가 필요했다. 자연스럽게 시조 묘가 있는 전주가 풍패지향으로 부각됐고, 백우금관 건국설화를 품은 삼척이 성지(聖地)로 부각됐다.
현상수배 준경묘
삼척을 중심으로 강원도 지역에서 이양무 묘를 찾았다는 제보가 잇따랐다. 1640년 인조 때는 풍기 사람 박지영이 “묘를 꿈에서 찾았다”며 몽서(夢書)를 올렸고, 이듬해 최명길은 “가끔 꿈이 들어맞기도 한다”며 조사를 요구했다.(1640년 7월 15일, 1641년 5월 3일 ‘인조실록’) 인조는 사람을 보내 지형을 조사하고 땅을 파봤으나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후 인조는 관련자들에게 상을 줘 제보를 권장했다.(1649년 3월 24일 ‘인조실록’)
‘찾는 사람에게 백금(百金)과 판윤 벼슬을 준다’는 말에 제보가 봇물처럼 터졌다. 하지만 아무런 증거가 나오지 않자 허망(虛妄)한 말을 한 혐의로 벌을 받곤 했다.(1704년 1월 12일 ‘숙종실록’) 대신 이양무와 그 아내 이씨 묘로 추정되는 분묘 주변을 깔끔하게 정비하는 선에서 세월이 갔다.
진정한 제왕의 땅, 전주
1767년 영조 43년 전주성이 대화재로 불탔다. 그러자 전라관찰사 홍낙인은 남문과 서문을 재건하고 이름을 각각 풍남문과 패서문이라 이름 붙였다. 진정한 제왕의 성이 된 것이다.
1771년 영조 47년 전주 경기전 북쪽에 조경묘(肇慶廟)가 건립됐다. 그해 10월 7일 영조는 시조 이한 사당 건립을 전격 지시했다. “내가 여든이 되어 거의 13세 할아버지 얼굴을 뵙게 될 판인데 다시 어느 때를 기다리겠는가?”(1771년 10월 7일 ‘영조실록’) 그달 21일 터 닦이 공사가 완료되고 11월 24일 사당이 완공됐다.
왕족인 전주 이씨들 상소가 이어진 데다 영조 본인 또한 흔들리는 왕권을 강화할 필요가 있었다. 시조 이한의 묘역을 전혀 찾을 수 없는 탓에 사당만 지었다. 완공 사흘 뒤 특별 과거를 실시했는데, 급제자 가운데 전주 이씨와 (시조모인) 경주 김씨가 없었다. 그러자 다음 날 두 성씨만 대상으로 또 시험을 치러 4명을 급제시켰다. 전주는 조선 창업자 태조의 본향에서 조선 창업의 땅으로 격상됐다.(이동희 ‘조선왕실의 시조사당 조경묘 창건과 그 역사적 의미’, 국가 문화재 승격을 위한 조경단·조경묘 학술대회 자료, 전주역사박물관, 2020)
고종이 해결한 준경묘와 조경단
한참 세월이 흐른 1898년 10월 24일 의정부 찬정 이종건이 시조묘를 모시지 못해 원통하다고 상소를 했다. 고종이 답했다. “일반 백성도 조상을 모시는데 하물며 황제 집안인데 못하겠는가.”(1898년 양력 10월 24일 ‘고종실록’) 1899년 1월 25일 대한제국 황제 고종은 “전주 건지산에 제단을 쌓고 조경단이라 부르라”고 명했다. 동시에 삼척에 있는 이양무 부부묘를 준경묘와 영경묘로 이름하고 이를 정비하라고 지시했다. 물증이 없어서 500년을 미루던 대역사가 한번에 해결된 것이다.
어울리지 않았던 ‘경사의 시작’
‘매천야록’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고종이 시조 묘를 알리기 위해 거창한 역사를 시작했는데, 너무 거창하여 원성이 행인들 입에 오르내렸다. 그런데 함경도에서 온 지관 주씨가 몰래 참서를 묻어놓았다가 발굴하였다. 참서에는 “황제를 칭한 뒤 300년 동안 국조가 이어진다”고 돼 있었다. 고종은 크게 기뻐하였다. 서울에서 감독관이 내려왔고 전북에서는 관찰사 이완용이 주관했다.’(황현, ‘매천야록’ 3권 1899년① 3.’조경단 신축', 국사편찬위)
고종은 자기 금고인 내탕고에서 5000원을 공사비로 하사했다.(1899년 양력 1월 25일 ‘고종실록’) 턱없이 부족했다. 탁지부에서는 1만원을 예비비로 추가 요청했다.(각사등록 근대편 각부청의서존안11, ‘영건청 소관 조경단 건축비 지출 청의’ 1899년 6월 20일, 국사편찬위) 이래저래 조경단 공식 공사비는 3만8058원57전이었다.(각부청의서존안14, ‘조경단 건축비 증액 지출 건’ 1900년 4월 28일) 대한제국 정부는 모자라는 공사비 보충을 위해 ‘김창석, 정귀조 등을 감독으로 임명해 비용을 지불하게 하였다. 이 두 사람은 모두 전주의 거부(巨富)였다.’(황현, 위 책)
참 허망한 것이, 그러고 6년 뒤에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또 5년 뒤 나라가 사라졌다. 뿌리는 찾았는데 그 뿌리에서 움터 창대하였던 그 나라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전주에 가면, 웅지(雄志)로 세운 나라가 어떤 경로로 어떤 흥망을 겪었는지 한번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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