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5] 이하응의 파란만장한 삶과 천자(天子)의 나라
어느 날 흥선군 이하응은 “가야산 가야사 석탑 자리에 선친 묏자리를 쓰면 2대에 걸쳐 천자(天子)가 나온다”는 말을 들었다. 1845년 경기도 연천에 있던 선친 남연군을 충청도 예산에 이장하니, 과연 둘째 아들 명복과 손자 척(坧)은 황제가 되었다. 그럼에도 아들과 아비는 하늘을 함께 짊어지지 못할 원수로 지냈고, 아비는 쓸쓸히 죽었다. 나라도 쓸쓸히 사라졌다. 그 거인(巨人) 석파 이하응이 살아간 파란만장한 삶과 그 아들 손자 대에 끝난 나라를 일별해본다.
[235] 이하응의 파란만장한 삶과 천자(天子)의 나라
모순된 지도자, 이하응(1820~1898)
‘구리 기둥과 쇠 절벽 같은 굳은 습관에 손을 대 부순 대혁명가였으나 쇄국을 행하여 스스로 소경이 되었다. 아픈 역사[痛史·통사]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박은식, ‘한국통사’ 대원군 편)
대원군 시대(1863~1873)는 선례를 찾아보기 힘든 과감한 개혁과 시대를 거스르는 쇄국 정책으로 일관됐다. 노론 일색이던 정치권에는 소론과 남인은 물론 멸종됐던 북인까지 되살아났다. 사대와 당파색의 소굴이던 만동묘(萬東廟)와 서원을 없애 버렸다. 전통적 면세 집단인 양반계급에게 세금을 거두고 문란하기 짝이 없던 삼정을 갈아엎었다. 문관이 장악했던 군 지휘권을 무관에게 돌려준 것도 조선 역사에 유례없는 일이었다. 세도정권에 눌렸던 왕권 회복을 위한 경복궁 중건 공사는 큰 실수였다. 제일 큰 실수는 쇄국이었다.
천주교와 러시아와 권력
처음부터 쇄국을 주장한 것은 아니었다. 부인 민씨는 아들이 왕이 되자 감사 미사를 올린 천주교도였다. 고종 유모 박씨는 마르타라는 세례명도 있었다. 대원군은 원래 천주교를 이용해 두만강을 넘나들던 러시아를 견제하려 했다. 1864년 양력 8월 18일 프랑스 외방전도회 신부 베르뇌가 북경 조선교구 주교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대원군은 운현궁에서 신도인 전(前) 승지 남종삼에게 “러시아인을 몰아내면 종교 자유를 주겠다”고 제안했다.(강상규, ‘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에 대한 정치학적 고찰’, 정신문화연구 30권, 2007)
그런데 1866년 1월 베르뇌가 의금부에 체포됐다. 의금부는 “남종삼이 반란 음모를 꾸몄다”고 보고했다. 노론 대신들은 남종삼을 추국해 진상을 밝히자고 나섰다.(1866년 고종 3년 1월 11일 ‘고종실록’) 가뜩이나 만동묘 철폐(1865년)로 노론에 견제받고 있던 대원군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빠졌다. 그 돌파구가 이후 2년 동안 벌어진 병인박해였고 그 복수극이 9월 11일 프랑스군의 침략, 병인양요다.
그리고 1868년 ‘아들을 천자로 만들어준’ 선친 남연군묘가 독일 상인 오페르트에게 봉분이 파헤쳐졌다. 쇄국은 감정으로 변했다. 쇄국만이 정권과 윤리를 지킬 수 있다고, 대원군은 믿게 되었다.
쇄국의 후속 조치, 강병
병인양요와 신미양요(1871)를 겪으며 대원군은 기존 강병책을 더욱 강화했다. ‘조선의 인후(咽喉)’라 불리는 강화도에 진무영(鎭撫營) 병력을 확대하고, 포병대를 설치했다. 1874년까지 예비군(속오군)이 지키던 진무영에 3500명이 넘는 병력이 확보됐다. 진무영 훈련대장 신헌은 대원군 지시로 수중시한폭탄 격인 수뢰포, 포신 방향과 각도를 자유롭게 조종할 수 있는 마반포거를 비롯해 10가지가 넘는 신무기를 개발했다.(연갑수, ‘고종대 정치변동 연구’, 일지사, 2008, p210) 대원군 자신도 운현궁에 무기창을 설치하고 역시 포신 각도 조절이 가능한 소중대형 대포를 개발했다. 육군박물관에는 ‘운현궁별주(雲峴宮別鑄)’라고 새겨진 당시 화포가 남아 있다. 이 포에는 대원군이 쫓겨난 다음해인 동치 13년(1874년)이라는 날짜가 새겨져 있다. 운현궁별주 화포 이후 조선은 물론 대한제국에서도 무기 수입만 있을 뿐 신무기를 개발한 기록이 없다.
1875년 고종 친정 선언 2년 뒤 일본 군함 운요호가 강화도를 공격했다. 궁궐 수비대를 강화하려는 고종 명에 의해 강화도 진무영은 대폭 축소된 상황이었다. ‘전의를 상실한 초지진 첨사 이민덕은 즉시 도주하고 35명이 전사하며’ 참패로 끝났다. 더 이상 병인·신미양요에서 사생결단으로 싸우던 조선군이 아니었다.
임오군란, 납치된 대원군
1882년 6월, 열석 달 동안 월급이 밀린 하급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의 타도 대상은 왕비 민씨였고, 그 척족들이었다. 이들은 대원군을 지도자로 추대하고 궁궐로 난입했다. 이들을 진압하러 온 군사는 청나라 군사들이었다. 7월 13일 청나라 사령관 오장경이 자기네 병영으로 대원군을 유인한 후 필담을 나눴다. 이상한 낌새를 느낀 대원군이 이리 말했다. “장군은 지금 구름 속에서 꿈을 꾸며 노닐 참인가!”(원세개 제자 심조헌, ‘용암제자기·容庵弟子記’, 1910) 대원군은 청나라 천진으로 납치됐다. 7월 30일 천진에서 대원군을 세 살 연하 이홍장이 다그쳤다. “각하가 난의 괴수다.” 대원군이 말했다. “기름 가마솥이 앞에 있어도 나는 결백하다.”(흥선대원군 사료휘편 4권 ‘대원군 체진 비망록’, 현암사, 2005)
8월 12일 대원군은 ‘감사안치(減死安置·사형을 대신한 유폐형)’를 선고받았다. 사흘 뒤 대원군은 천진 옆 보정부성 치안지서에 연금됐다. 출발 전 대원군은 황실 전문 사진관인 ‘양시태 조상관’에서 천진성 영무처 공식 사진을 촬영했다. 11월 2일 그는 보정부성에서 관리 오여륜과 필담을 가졌다. 대원군은 예순셋이고 오여륜은 마흔넷이었다.
필담에는 상남자 냄새가 난다.
“잘못을 사죄하라.”(오)
“불량 소년을 만나 곤욕을 치르는구나.”(대)
“무슨 책을 읽는가.”(오)
“강목 9권을 보았다.”(대)
“그런 책은 좋은 데 쓰지 않으면 사람 죽이는 책이다. 덮어라.”(오)
“글을 써내려가는 형세가 또 욕설이구나.”(대)
“악한 짓을 하고도 남의 욕설을 막으려 하는가.”(오)
“내가 이미 악에 처했는데 당신 입도 악하고 날씨까지 악하니 세가지 악이 한 데 모였구나.”(대)
대원군이 말했다. “양왜 배척이 오늘날 정세에는 옳지 않다. 천하의 대세이니, 좋은 것은 인정해야 한다.”(대)
“천하라니, 당신은 그저 일국(一國) 얘기나 하라.”(오)
한참 기싸움 끝에 대원군이 말했다.
“욕설을 들었지만, 날마다 대화를 하면 고향을 잊겠구나.”(이상 대원군, ‘보정부담초·保定府談草’)
대원군의 귀국과 유폐
그 사이 조선에서는 대원군을 겁박해 끌고 갔던 젊은 원세개가 섭정을 했다. 고종과 왕비 민씨와 그 처족들은 청나라 보호 속에 무사안일하게 살았다. 1884년 갑신정변이 터졌다. 정변 주도자들은 청으로부터의 독립과 대원군 귀국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46시간 만에 정변은 청나라 군사에게 진압됐다.
1885년 고종 정권이 러시아에 기대려는 한러 밀약이 두 차례 폭로됐다. 청 정부는 고종 정권 견제를 위해 대원군을 귀국시켰다. 납치된 지 만 3년이 지난 1885년 8월 27일 대원군이 남대문을 통해 서울로 돌아왔다. 아들 고종은 남대문까지 나가서 아비를 맞이했다.(1885년 고종 22년 8월 27일 ‘고종실록’) 그날 고종이 대신들에게 말했다. “기쁜 마음을 어떻게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잡류(雜類)들이 까닭 없이 거짓말과 비방으로 대원군에게 누가 되게 하였다. 각별한 분이니 예조에서 의정부와 상의하여 예절 절차를 마련하라.”
9월 10일 예조가 발표한 대원군 예우 규정은 이러했다. 첫째, 대문 밖에 하마비(下馬碑·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말에서 내리라는 표지)를 설치할 것. 둘째, 대문에 차단봉[橫杠木·횡강목]을 설치할 것. 셋째, 대문은 습독관이 윤번으로 입직할 것. 넷째, 조정 신하들은 사적으로 감히 대원군을 만나지 말 것.(1885년 고종 22년 9월 10일 ‘고종실록’)
대문 개폐 차단은 물론 출입은 24시간 감시당하고 면회는 통제됐다. 아들에 의하여 아비는 다시 유폐당한 것이다. 고종에게 흥선대원군은 정적(政敵)이었지 아버지가 아니었다.
황은(皇恩)에 감격한 아들
또 한 해가 지난 1886년, 주차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駐箚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라는 직책으로 고종 옆에서 조선국을 통치하던 원세개가 고종에게 편지를 보냈다. 이런저런 충고와 청나라를 따돌리고 러시아 같은 다른 나라와는 손잡을 생각 말라는 반협박 반조언 문서였다. 고종이 답했다.
“글자마다 약석(藥石)이 되어 감격스러움을 금할 수 없었나이다. 천조(天朝)를 섬겨온 지 200여 년이 되므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황은(皇恩)을 입지 않는 것이 없었나이다. 근래 외교 관계가 더욱 넓어져가나, 이 나라는 문을 닫고 스스로 지키면서 아무 말도 듣지 못한 것처럼 홀로 지냈나이다. 이런 때에 천조에서 이끌어주고 일깨워주며 친목을 도모하고 협약을 토의 체결하여 서로 의지하게 했으니, 여기에서 천지가 만물을 덮어주듯 지공무사(至公無私)한 마음을 알 수 있었나이다.”(1886년 고종 23년 7월 29일 ‘고종실록’)
실질적인 청나라 속국 상태는 1894년까지 8년을 더 갔다. 동학혁명이 터지자 고종은 민씨들과 함께 청군을 불러들였고, 청군과 동시에 들어온 일본군은 청일전쟁을 벌였다. 일본은 대원군을 앞세워 민씨 정권을 무너뜨리고 갑오정부를 세웠다. 한 달 뒤 정권이 안정된 갑오정부와 일본은 대원군을 하야시켰다. 거인의 발걸음은 거기서 멈췄다.
“주상이 아직 오지 않았느냐”
3년 뒤 1897년 10월 12일 아들 고종은 대한제국을 세웠다. 황제가 되었다. 넉 달 뒤인 1898년 2월 22일 대원군이 죽었다. 죽기 전 대원군은 고종의 형인 장남 재면에게 “주상을 알현하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세 번을 물었다. 대원군은 “아직 주상 가마가 오지 않느냐”고 묻고는 긴 탄식을 하고 죽었다.(황현, ‘매천야록’ 2권 1898년① 2. 흥선대원군 사망) 고종은 임종도, 5월 15일 치른 장례도 참석하지 않았다.
1907년 7월 19일 아들 광무제가 강제 퇴위되고 손자 이척이 융희제에 등극했다. 대원군이 남연군 묘를 이장한 목적이 완수됐다. ‘2대천자지지’ 발복은 거기까지였다.
1918년 한자리에 모인 아들, 손자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조약이 공포됐다. 총성 한 번 없었다. 조선 통감부 외사국장 고마쓰 미도리는 이렇게 기록했다. ‘병사 한 명도 움직이지 않았고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담판 개시일부터 조약 조인까지 딱 일주일 걸렸다.’(고마쓰 미도리, ‘明治外交祕話·명치외교비화’, 原書房, 1976, p295)
8년 뒤 1918년 정초 일본으로 떠났던 대원군 손자 영친왕 이은(李垠)이 귀국했다. 1918년 1월 13일 고종이 사는 덕수궁 석조전에서 대원군 아들과 손자들이 총독부 관리들과 귀국 기념 오찬을 했다.(‘순종실록 부록’) 그리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맨 앞줄 한가운데에 왕공족(王公族)들이, 양옆으로 조선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와 총독부 정무총감 야마가타 이사부로(山縣伊三郎)가 앉았다. 그때 고종은 태황제가 아니었고 순종은 황제가 아니었다. 영친왕도 황태자가 아니었고 순종 동생 의친왕 이강도 마찬가지였다. 일본 천황가의 조선 왕족과 공족이었다.
1873년 아들은 친정을 선언하며 아비가 강화도에 구축했던 진무영(鎭撫營)을 축소하고 궁궐 수비대로 전환시켰다. 그때 아비 대원군은 “그 군영이 국가에 무슨 해를 끼쳐서 장성(長城)을 파괴하는가?”라며 울었다.(황현, ‘매천야록’ 1권 1894년 이전④ 12. 강화도 무위영의 철폐) 이후 벌어진 역사를 우리는 모두 안다. 총성 한 번 울리지 않고 나라가 사라진, 이유가 뿌리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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