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현진의 돈과 세상

[차현진의 돈과 세상] [50] 어음과 디지털금융

bindol 2021. 12. 15. 05:16

[차현진의 돈과 세상] [50] 어음과 디지털금융

입력 2021.12.15 00:00
 

어음은 순우리말이다. 어험(魚驗) 또는 어음(於音)이라고 적기도 했지만, 베다(자르다)는 뜻의 ‘엏’에서 나온 순우리말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한 장의 채무 증서를 반으로 잘라 채권자와 채무자가 한쪽씩 나눠 가진 관습에서 ‘엏’이라는 어원과 이어졌다. 에누리의 ‘에(에다)’와 뿌리가 같다.

 

일본에서는 어음을 데가다(手形)라고 부른다. 채무자가 손바닥에 먹을 묻혀 어음 뒤에 손 모양(手形)을 남긴 때문이다. 둘로 잘라 나눠 갖는 한국의 ‘엏’이 융통(약속)어음이라면, 서양식 배서 절차가 강조된 데가다는 상업어음이다. 상업어음은 끊임없이 유통되는 반면, 융통어음은 그렇지 않다.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나라의 ‘엏’ 또는 어음은 차용증이라서 장롱 속에 깊이 숨었다. 서양과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어음만 있고, 어음교환소가 없었던 이유가 바로 거기 있었다. 그런데 1910년 7월 서울에 어음교환소가 설치되었다. 일본이 조선 강점을 염두에 두고 구(舊) 한국은행과 함께 설치한 핵심 금융 인프라였다. 어음 교환소가 설립되자 상업어음이 등장하여 상거래가 급격히 커졌다.

 

이후 어음부도율이 아주 오랫동안 시중 자금 사정의 온도계 역할을 했다. 부도율이 조금만 튀어도 정치권과 정부가 민감한 반응을 보이며, 이유를 캐묻고 대책을 요구했다. 정치권의 눈치를 살피는 한국은행은 ‘타입대’니, ‘일시대’니 하는 이름으로 사실상의 숫자 조작을 통해서 가끔씩 부도율을 낮췄다.

하지만 외환 위기 뒤에는 아무도 어음부도율을 신경 쓰지 않는다. 상거래에서 어음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요즘에는 어음 대신 스마트폰 앱으로 돈을 주고받는다. 그런데 스마트폰으로 돈을 주고받으려면, 지문부터 입력해야 한다. ‘손 모양(手形)’ 시대의 부활이다.

 

손 모양의 시대에도 스마트폰과 앱은 말단지엽일 뿐이다. 디지털 금융의 핵심 인프라이자 중추신경은 현대화된 어음교환소와 컴퓨터 설비다. 바로 금융결제원과 타행환 시스템이다. 1989년 12월 16일 금융결제원의 타행환 시스템이 개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