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인의 땅의 歷史

[박종인의 땅의 歷史] 조선 도공의 불씨로 일본은 군함을 만들었다

bindol 2021. 12. 17. 15:57

[159] 세상을 바꾼 서기 1543년 ⑨무본억말(務本抑末)과 조선 도공·下

 

입력 2019.04.03 03:01
 
 
 
 
 

아편전쟁, 조선 그리고 일본

19세기가 왔다. 정치혁명과 산업혁명과 과학혁명이 유럽 대륙을 휩쓸었다. 전 지구를 무대로 시장 개척 전쟁이 벌어졌다. 유럽 전사(戰士)들이 탄 배는 대량 살상 무기로 무장돼 있었다. 협조적 개방이 불가능하면 언제든 폭력을 쓸 욕망이 충만했다.

그 욕망이 폭발한 사건이 1840년 아편전쟁이었다. 청나라와 무역에서 만성 적자에 시달리던 영국이 인도산 아편을 수출해 적자를 해소하고 청나라 사회를 망가뜨렸다. 이에 청나라 관리 임측서가 국제법에 의거해 아편 2만 상자를 태워버렸다. 이를 핑계로 영국이 대포를 쏴댄 사건이 아편전쟁이었다. 부도덕했다. 하지만 패한 청은 홍콩을 영국에 넘기고 서양 군함 출입을 허용해야 했다.

전쟁 전후 사신으로 간 조선 공무원들이 정보를 수집했다. 주된 정보 소스는 청 정부 관보인 '경보(京報)'였다. '적은 퇴각했으니 국민 여러분은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라' 따위가 끄적여진, 방대하고 치밀하게 조작된 신문이었다. 1845년 음력 3월 28일 귀국한 사신 이정응이 헌종에게 보고했다. "無事矣(무사의, 중국은 아무 일이 없다)."('승정원일기') 때는 일가족에 권력이 집중된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시대였다.

1855년 일본 중앙정부인 막부가 나가사키에 세운 해군 전습소(가운데 건물들). 네덜란드 교관이 증기선 제작 교습과 해군 훈련을 맡았다. 네덜란드 국기가 있는 쪽은 네덜란드 상관이 있는 인공섬 데지마(出島)다. 1842년 영국에 청나라가 무릎을 꿇는 아편전쟁과 1853년 함포로 무장한 페리의 미 군함을 실감한 뒤 일본은 쇄국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개국과 강병으로 정책을 전환했다.

일본 또한 다방면으로 정보를 수집했다. 전쟁 와중인 1841년 1월 일본 막부 고위 관료 미즈노 다다쿠니(水野忠邦)가 이렇게 말했다. "이국(異國)의 일이라도 곧 우리 경계가 될 일이다." 또다른 관료가 건의했다. "그 옛날 십만 몽골 강병을 물리쳤듯, 포대를 쌓고 실탄을 터뜨려야 한다." 무사안일과 경계의 갈림길. 1543년 철포(鐵砲)와 성리학을 선택했던 두 나라가 300년 뒤 또 상이한 선택을 하고 만 것이다.

나가사키와 막부의 정보력

일본은 에도(江戶·현 도쿄)에 있는 막부 중앙 정부와 각 번 정부로 나뉘어 있었다. 각 번은 외교권 외에는 권한이 넓었다. 나가사키는 막부 직할지였다. 나가사키 인공섬 데지마(出島)에는 네덜란드 상관이 있었다. 나가사키는 유럽 학문 난가쿠(蘭學)의 성지였다.

1808년 영국 군함이 앙숙지간인 네덜란드 상선을 추적해 나가사키까지 왔다. 영국 배는 데지마를 포격하고 도주했다. '페이튼호 사건'이다. 막부는 나가사키 통역관들에게 영어 학습을 명했다.

1863년 12월 5일 자 프랑스 르몽드 일러스트. 1863년 일본 가고시마를 포격하는 영국군함들 삽화다. '사쓰에이(薩英) 전쟁'이라 부르는 포격전 끝에 가고시마는 불바다가 됐고, 사쓰마번은 부국강병을 택했다.

네덜란드 상인들은 정기적으로 막부에 보고서를 제출했다. '화란풍설서(和蘭風說書)'라는 이 보고서에는 싱가포르의 유럽 신문을 정리한 세계 정세가 적혀 있었다. 청나라 상인들도 당풍설서(唐風說書) 제출이 의무였다. 아편전쟁이 터지자 막부는 풍설서를 종합한 끝에 1842년 외국 배는 '두 번 생각 않고(無二念) 격침한다'는 '무이념 타격령'을 '조난당한 선박은 연료와 물을 보급한다'는 신수급여령(薪水給與令)으로 낮췄다. 개방의 준비가 시작되고 있었다.

히젠의 요괴 나베시마 나오마사

1830년 열일곱 먹은 나베시마 나오마사(鍋島直正)가 사가번(佐賀藩) 10대 번주에 취임했다. 아버지 나리나오(齊直)는 사치가 낳은 가난과 태풍이 휩쓸고 간 쑥대밭을 아들에게 물려줬다. 취임 당일부터 빚쟁이에 시달린 나오마사는 첫 방문지로 나가사키를 택했다. 그때 사가번은 나가사키 경비를 맡고 있었다. 난가쿠에 미쳐 '난벽(蘭癖) 영주'로 불리는 나오마사는 그 길로 네덜란드 상선에 올라 샅샅이 구경을 하고 사가로 돌아갔다.

먼저 마을 전체가 태풍과 화재로 사라져버린 아리타(有田)에 세금을 면제하고 흩어져버린 도공들을 불러모았다. 번의 특산물 감독기관인 국산방(國産方)을 확대해 도자기 품질 관리를 실시했다. 태풍 피해가 복구될 때까지 소작료도 3분의 1로 인하하는 개혁도 실시했다.

1866년 병인양요 때 강화도에서 퇴각하는 프랑스 군대.

아편전쟁이 터졌다. 나오마사는 서양 총포술을 도입했다. 1844년 네덜란드 군함 팔렘방호가 나가사키에 기항했다. 나오마사는 관리들과 함께 배에 올라 시설을 견학했다. 이 배에는 네덜란드 국왕이 보낸 국서가 실려 있었다. 국서에는 '조만간 미국 군함이 가서 통상을 요구하면 응하는 게 이롭다'고 적혀 있었다. 네덜란드는 미국 측이 요청했던 사전고지를 전달했을 뿐이다. 나오마사는 무기연구소인 화술방(火術方)을 설치해 무기 연구 개발과 훈련에 착수했다. 1849년 나오마사는 맏아들에게 우두를 맞혔다. 천연두 세균이 번주 아들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근대 종두법이 일본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1850년 근대 용광로인 반사로(反射爐) 제작에 들어갔다. 연료의 열을 천장으로 반사시켜 반대편 철을 녹이는 용광로다. 연료 찌꺼기에 오염되지 않는 고품질 철을 얻을 수 있는 첨단기술이었다. 무기 제작에 필수다. 설계는 네덜란드 장교 휴게닌이 쓴 책 '루이크 왕립철제대포주조소의 주조법'을 참고로, 시공은 아리타의 전통기술을 적용했다. 1300도가 넘는 고열을 만드는 자기 가마 기술이다.

1851년 번립 난가쿠 교육기관인 난가쿠료(蘭學寮)를 설치했다. 유학 교육기관인 고도칸(弘道館) 학생들이 대거 자퇴하고 난가쿠료로 전학했다. 1852년 이화학연구소인 정련방(精鍊方)을 세웠다. 증기기관과 사진과 유리와 화약과 전신기 같은 다방면 연구소다. 그 해 반사로가 완공되고 철제 대포를 쏟아냈다. 대포는 나가사키항에 배치됐다. 막부는 사가번에 철제 대포 50문을 주문했다. 1853년 페리 제독이 몰고 온 미국 군함이 에도 앞바다에서 포격을 하고 돌아갔다. 일본인들은 "흑선(黑船)이 왔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각 번에 반사로 제작 붐이 불었다.

 
1917년 일본 아리타(有田)가 세운 도조 이삼 평비 뒷면. '大恩人(대은인)'이라고 적혀 있다. 임진왜란 때 납치한 조선 도공의 기술력은 훗날 일본의 부국강병 씨앗이 됐다.

그사이 나오마사는 네덜란드로부터 군함을 주문하고 정련방에서 완성한 증기기관으로 일본제 증기선을 만들었다. 1855년 네덜란드 군함 게데이호가 입항했다. 나오마사는 "상선을 줄 테니 이 군함을 팔라"고 우겨 함장을 곤혹스럽게 했다. 정치도 안중에 없고 오로지 부국과 강병에 미친 듯이 매달리는 나오마사를, 소설가 시바 료타로는 '히젠(肥前·사가의 옛 이름)의 요괴'라 불렀다. 대포, 증기기관 따위 근대 문물 개발에 열중할 뿐 정치색을 알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런 그가 1852년 반사로 제작에 성공했을 때, 다섯 살 많은 이웃 사쓰마번(薩摩藩) 번주가 이렇게 말했다. "서양인도 사람이고 사가 사람도 사람이고 사쓰마 사람도 똑같이 사람이다. 연구하라." 시마즈 나리아키라(島津齊彬). 역시 '난벽(蘭癖) 영주'라 불렸던 개명된 지도자였다.

난벽 영주 시마즈 나리아키라의 개혁

1851년 11대 번주가 된 나리아키라는 바로 그해 집성관(集成館)을 설치했다. 옷감부터 사진, 유리, 조선과 대포까지 만드는 근대 공업단지다.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마 도시미치, 고다이 도모아쓰 같은 하급무사들도 똑똑하고 비전 있는 사람이라면 끌어 모았다. 나리아키라는 1854년 대포 16문이 달린 370t짜리 군함을 완공해 막부에 헌납했다. 미국과 수호조약을 맺고 문호를 개방한 바로 그해다.

1857년 집성관에서도 반사로 제작에 성공했다. 역시 근대식 설계와 사쓰마 도자기 가마의 내열 기술이 응용됐다. 1858년 사가번주이자 친구 나오마사가 국산 증기선을 타고 나리아키라를 극비 방문했다. 대화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다. 나리아키라는 이 회동 두 달 뒤 죽었다. 이복동생 히사미쓰(久光)가 개혁을 승계했다.

1863년 영국 함대가 가고시마항을 포격했다. 1년 전 벌어진 영국인 살해사건 복수극이었다. 사쓰마는 포격으로 맞섰지만 집성관이 전소되고 가고시마 시가지가 불탔다. '사쓰에이(薩英) 전쟁'이라 한다. 영국도 사쓰마도 서로의 힘에 놀랐다. 양측은 평화협정을 맺었다.

적에게 배운다

1858년 미국과 통상조약을 맺으며 막부는 조약에 '군함 및 무기 구입과 교관 초빙' 조항을 삽입했다. 또 네덜란드와 근대 조약을 맺으며 데지마 시절 간첩 혐의로 쫓아냈던 학자 지볼트를 외교 고문으로 초빙했다. 1855년 막부는 데지마 옆에 훈련소 겸 군함 제작소인 해군전습소를 설치했다. 각 번 인재들이 네덜란드 교관으로부터 근대 무기와 병술을 배워 갔다.

페리 제독이 일본에 오기 1년 전인 1852년 사가번은 이미 철제 대포를 만들었다(왼쪽·사가현 혼마루역사관). 1866년 병인양요 직후 조선은 강화도 덕진진에 '외국 선박 항해 금지'를 선언한 척화비를 세웠다(가운데). 5년 뒤 신미양요 때 덕진진은 미 해군에 의해 쑥대밭이 됐다. 오른쪽은 신미양요 때 미 군함에 오른 조선 관리들(폴게티박물관).

1860년 막부는 바로 그 미국과 유럽으로 견학단을 보냈다. 사쓰에이 전쟁에서 영국의 힘을 경험한 사쓰마는 2년 뒤 무사급 3명과 통역관 1명, 유학생 15명을 영국으로 보냈다. 이들의 동상이 가고시마역 앞에 서 있다. 가고시마시는 이름을 '젊은 가고시마의 군상(群像)'이라 지었다. 유학생을 이끌었던 하급 무사 고다이 도모아쓰는 런던에서 방적기와 소총 3000정을 구입했다. 집성관은 재건돼 영국 기술이 총집결했다. 적의 힘을 경험하고 바로 그 적에게 기술을 배운 것이다. 그렇다면 돈은 어디에서 나왔나.

각성과 준비의 힘, 도자기

1867년 파리박람회가 열렸다. 사가번과 사쓰마번이 도자기를 출품했다. 사가번 아리타 도자기는 일본 열풍을 일으킬 정도로 인기였다. 아리타초사(有田町史)에는 박람회가 종료되고 11월 29일 박람회 대표단 통역가 고이데 센노스케(小出千之助)가 보낸 편지가 실려 있다. '귀국편 화물은 철포(鐵砲)를 본체로 하고 나사 등이며 여기에 따로 구입한 물품을 더해서 다음 달 나가사키로 가는 배에 싣고 갈 예정입니다.' 아리타초사를 쓴 사가 미야타 고타로(宮田幸太郞)는 "막부 마지막 15년간 아리타 도자기 무역 자료는 한 조각도 남아 있지 않다"고 했다. 인멸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도자기로 국내외에서 번 돈이 저 거대한 군수산업 운용에 투입됐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사가현 혼마루역사관 마당에는 나베시마 나오마사가 만든 철제 대포가 서 있다. 전시실에는 근대 과학기술 열매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다. 나오마사가 부활시킨 도자기마을 아리타 산꼭대기에는 도조(陶祖) 이삼평 기념비가 서 있다. 글씨를 쓴 사람은 나베시마 나오미쓰(鍋島直映)다. "일본의 보물을 만든다"며 이삼평을 납치해간 나오시게(直茂)의 후손이다. 뒷면에는 찬사가 가득하다. 세 글자가 눈에 띈다. '대은인(大恩人)'. 그냥 은인이 아니라 '대은인'이다. 서양 그 어느 국가도 이후 일본을 침략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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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6년 프랑스군의 병인양요를 치르고 조선은 강화도 덕진진에 외국 선박 항해 금지 선언비를 세웠다. 1871년 페리 제독의 외손자 로저스가 이끄는 미국 함대가 조선 강화도 염하(鹽河)에 진입했다. 조선 수군이 김포와 강화 양안에서 선제 포격을 퍼부었다. 조선 수군은 전멸했다. 각성과 준비와 실천의 부재가 만든 전사들의 장엄한 죽음이었다.

〈주요 참고 자료〉 1. 논문: ‘일본 사가현 아리타의 조선 도공에 관한 일고찰’(허성환)’일본의 군사 기록에 대한 고찰'(박지영) ‘아편전쟁과 조선, 일본’(하정식) ‘동아시아의 개항: 난징조약에서 강화도조약까지’(강진아) ’19世紀後半の伊萬里燒生産におけるヨ―ロッパの影響'(阿久津マリ子) ‘近代における有田陶業技術の變遷’(鈴田由紀夫) 2. 단행본: ‘有田町史-陶業編1’(有田町) ‘조선을 탐한 사무라이’(이광훈) ‘메이지유신이 조선에 묻다’(조용준) ‘明治日本の産業革命遺産’(岡田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