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로] 대신 쓰는 유서
한 사람의 죽음은 한 우주가 소멸하는 것이라고 배웠다. 극단적 선택이든 아니든 삶의 경계는 그토록 삼엄한 것이다. 이제 나는 인생에서 결코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을 넘는다. 나라를 구하는 거창한 명분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뒤집어씌우기 때문에 억울함을 이기지 못해 한이 맺힌다.
성남 도개공에서 일해온 김문기 처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세상이 놀랄 것이다. 남겨진 식구들은 원통 절통한 피울음을 울 것이다. “결국 몸통은 놔두고 꼬리 자르기를 한 겁니다.”
나도 안다. 힘없는 조직은 희생양을 찾아서 위기를 모면하려 든다. 그렇게 내몰리면 마지막 구명 요청도 소용없을 줄 알았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깜깜한 절벽만 사방에서 다가선다.
첫째 절벽은 수퍼 집권 여당의 대통령 후보다. 한때 내가 모셨던, 나의 생살여탈권을 쥔 분이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대장동과 관련된 이 모든 것이 누구에게서 시작된 것인지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렇게 믿었다. 모든 게 증거물이고, 모든 이가 증인인 줄 알았는데 착각이었다. 딱 떨어지는 증거는 없고, 모두가 침묵이다.
둘째 절벽은 회사 내부 분위기다. 누구보다 이해하고 감싸줄 줄 알았던 동료와 조직이 등을 돌렸다. 감사실이 중징계 의결 방침을 통보해왔다. 까딱 잘못하면 수천 억 배임 혐의마저 뒤집어쓸지 모른다. 형사 고발이 있을 것이란 소리도 귀에 들린다. 계선 라인에 있었던 사람들 얼굴이 떠오른다. 한 사람은 감옥에 들어가 있고, 또 다른 사람은 열흘 전에 목숨을 끊었다. 그보다 윗선은 이미 넘볼 수 없는 절대적 위치로 옮아가 버렸다. 희생양 찾기에 외통수로 걸렸다는 느낌뿐이다.
또 하나의 절벽은 검찰이다. 그것은 공권력이요, 국가 권력이요, 한마디로 정권을 상징한다. 그런데도 그 검은 속을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사실을 실토하라는 것인지, 적당히 입 다물라는 것인지, 그 속이 음침할 뿐이다. ‘선수들끼리 다 알면서 왜 그러냐’는 눈치도 보인다. 회유와 협박에도 지쳤다.
이때 생각나는 것은 오로지 가족들, 그리고 명예다. 나는 적어도 저들이 몰아세우고 있는 것처럼 살아오지 않았다. 저들은 이런 나를 눈곱만큼도 알아주지 않는다. 아무리 입증 근거를 내놓아도 저들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결론은 내려졌고, 내가 걸려든 것 같다.
뭐라고? 초과 이익 환수 조항을 넣었다 뺐다 했던 것이 내 책임이었다고? 그것이 내 권한으로 내 책임 하에 이루어진 일이라고? 지나가는 성남시 강아지들한테 물어봐라.
그나저나 이 일은 이제 내 손을 떠난 것처럼 보인다. 먼 훗날 진실이 밝혀진다고 해도 그때는 이미 늦었을 것이다. 나와 내 가족은 만신창이가 돼 있을 것이다. 이제 나의 선택은 그것이라도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김만배 유동규 남욱 정영학, 이런 사람들은 엄청난 돈이라도 챙겼다. 대장동 4인방, 그런 사람들이 있는 줄도 몰랐다. 권순일 박영수 곽상도, 이런 이름은 나에겐 구름 위에 있는 세상이었다.
야당에서는 “연쇄 죽음에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했다”고 말하고 있다. 내 억울함을 알아주는 체하지만, 그들은 말만 하고 끝이다. “초과 이익 환수 조항을 삭제해 ‘화천대유 몰빵’을 만든 사람이 누구냐” “검찰이 조사를 안 하고 뭉개고 있으니 애꿎은 사람이 자꾸 죽어 나간다” 이렇게 호통치는 사람들이 때론 더 원망스럽다. 정말 세상을 바꾸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그저 표를 구할 뿐일 것이다.
영화 ‘아수라’에서는 악덕 시장 박성배의 측근인 은충호가 검찰 조사를 받고 나온 뒤 덤프 트럭에 깔려 살해된다. 박성배는 빈소에 가서 “아이고 우리 은충호 불쌍해서 어떡하냐”며 오열한다. 이제 내 빈소에는 박성배 같은 사람을 못 오게 하라. 오로지 가족에게 미안할 뿐이다.
'칼럼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설] ‘사망 김문기 모른다’는 李 후보, 이러니 말을 믿을 수 있나 (0) | 2021.12.28 |
---|---|
"각성되지 않은 정의감은 잔인하다" (0) | 2021.12.27 |
[김창균 칼럼] 文의 분신 공수처, 무능·위선·파렴치도 빼닮았다 (0) | 2021.12.16 |
[윤희영의 News English] 주한미군 장병들이 부대 깃발을 불태운 까닭 (0) | 2021.12.16 |
[선우정 칼럼] 추미애가 수상하다 (0) | 2021.12.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