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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 살롱] [1328] Y 장군의 입산

bindol 2021. 12. 27. 05:31

[조용헌 살롱] [1328] Y 장군의 입산

입력 2021.12.27 00:00
 

‘등산 종교’는 중년 남자 신도가 많다. 고갯마루에 앉아 김밥 한 줄과 막걸리 한잔을 들이켠다. 구름 아래 깔린 저 아래의 산촌 마을을 내려다볼 때마다 ‘나는 뭐 한 것도 없이 나이만 먹어 버렸구나!’ ‘가슴을 짓누르는 근심과 걱정을 아무리 해도 벗어 버릴 수가 없구나!’ 하는 한탄을 한다.

등산 종교의 성지인 지리산에도 외지리(外智異)가 있고, 내지리(內智異)가 있다. 구례⋅화개⋅악양이 외지리라고 한다면 남원시 산내와 함양군 마천, 휴천은 내지리에 속한다. 약초꾼에게 마천에 장군이 하나 들어와 살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Y 장군’이라고 했다. 군대 장군 출신이 귀촌해서 산골 원주민들과 잘 어울리기도 어렵다. 그러나 공군 원 스타 출신 Y 장군은 지리산 마천 일대의 산골 사람들의 평판이 좋았다. “장군이 무슨 사연으로 산에 들어와 사나?” “월남전에 갔다 온 전쟁의 상처가 컸다. 상처를 보듬고 산에 들어와서 살았다.”

그는 코브라 헬기를 모는 조종사로 월남전에 참여했다. 헬기에 장착된 20㎜ 기관포는 실탄을 1분에 700발 발사한다. 그는 이 기관포를 적군을 향하여 난사하는 전투를 치렀다. 피가 튀고 살이 튀고 사지가 해체되는 처절한 전투의 연속이었다. “아무리 전쟁이라고 하지만 사람 죽이는 게 처참하지 않으냐?” “전투 중에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 ‘내가 쏘지 않으면 내 동료들이 다 죽는다’는 생각뿐이었다.”

 

같이 월남에 갔던 전투기 조종사 13명 중 6명은 적군의 박격포 공격에 맞아서 죽고 7명만 살아서 한국에 돌아왔다. 사지가 떨어져 나가는 처절한 장면들이 수십 년 동안 따라다녔는데, 지리산에 들어와서 봉우리 수십 개를 넘는 종주 등반을 세 번째 하고 나니까 가슴속 응어리가 좀 풀리는 걸 느꼈다고 한다. 결정적 계기는 산골에서 밭을 매던 80대 할머니들과 나눈 대화였다. 결혼을 많이 한 할머니는 4번, 평균 2~3번 한 할머니들이었다. 빨치산과 토벌대의 총격전 와중에 남편이 계속 죽어 나갔던 것이다. 자식새끼는 딸려 있고 입에 풀칠하고자 또 남자를 만나 같이 살 수밖에 없었다.

호미로 밭을 매면서 험난했던 인생살이를 이야기할 때 Y는 그 할매들 담배에다 라이터로 불을 붙여 주는 동작만 할 수 있었다. 연달아 담배 2대를 피울 동안 할매들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내 상처는 이 할매들 상처에 대면 새 발의 피구나!’ 할매들 살아온 인생 이야기 듣는 것이 입산한 Y의 치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