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현진의 돈과 세상] [55] 싸우면서 건설했다
1962년 시작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대성공이었다. 기간 중 연평균 경제성장률이 8.3%를 기록하여 목표인 7.1%를 훌쩍 뛰어넘었다. 남북한의 경제력이 그때 뒤집혔다. 1967년 시작된 제2차 계획은 출발부터 순조로웠다. 1964년 베트남 파병에 이어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로 상당한 외자가 유입되었기 때문이다. 자신감을 얻은 정부는 경공업을 뛰어넘어 중공업까지 지향했고, 거기 맞춰 현대자동차(1967년 12월)와 포항제철(1968년 4월)이 설립되었다. 그 기간의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11.5%에 이르러 다섯 번의 개발계획 중 최고를 기록했다.
그러나 호사다마(好事多魔)였다. 체제경쟁에서 뒤처지는 것이 초초했는지, 북한의 도발이 유난히 잦아졌다. 1968년 1월 북한 특수공작원들이 서울로 내려와 청와대 기습을 시도했고, 이틀 뒤에는 동해 공해상에서 미 해군 소속 정찰함 푸에블로 호를 나포했다. 11월에는 120명의 무장공비가 민중봉기를 꾀한다면서 울진·삼척 지역에 침투하여 많은 민간인들을 살상했다. 아홉 살 생일을 맞은 이승복 어린이와 그 가족들도 희생되었다. 이듬해 4월에는 동해에서 미 해군 정찰기(EC-121)가 격추되어 30여 명의 승무원들이 전원 사망하기도 했다.
그러자 남한 정부도 강하게 대응했다. 간첩신고와 반공사상 고취를 위해서 전국의 산악과 해안 지역에 ‘멸공소년단’과 ‘멸공부녀단’을 조직했다. 1961년 제정된 이래 사실상 사문화되었던 향토예비군설치법도 발동했다. 1968년 4월 창설된 향토예비군의 모토는 “싸우면서 건설한다”였다.
1968년과 1969년은 실로 싸우면서 건설하는 시기였다. 안팎의 온갖 시련과 도전 속에서도 경제성장률이 13.2%와 14.6%를 기록했다. 모레는 그 대장정의 계기가 된 날이다. 1968년 1월 21일 김신조를 포함한 31명의 무장 게릴라들이 청와대 코앞까지 다가와 소총을 쏘고 수류탄을 던졌다. 학생들까지 희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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