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만물상] 戰場의 음악회

bindol 2022. 3. 14. 05:22

[만물상] 戰場의 음악회

입력 2022.03.14 03:18
 
 

유고 내전이 한창이던 1992년 5월 어느 날,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수도 사라예보 한복판에 적국 세르비아 민병대가 쏜 포탄이 떨어졌다. 빵을 사려고 줄 서 있던 시민 22명이 목숨을 잃었다. 폭발 다음 날, 텅 빈 거리에 한 남자가 나타나더니 첼로를 꺼내 들었다. 사라예보 필하모닉 소속의 이 연주자는 폭격의 잔해 속에서 첼로를 켰다. 그가 연주하는 동안 포격은 중단됐다. 건물 곳곳에 숨어 있던 세르비아 저격수들도 그를 쏘지 않았다. 연주는 22일간 지속됐다.

▶옛 소련 작곡가 쇼스타코비치는 평생 15개의 교향곡을 남겼다. 그 가운데 교향곡 7번은 ‘레닌그라드’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제정 러시아 수도였던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소련 시절 레닌그라드로 불렸다. 2차 대전 당시 나치 독일군이 이 도시를 870여일간 봉쇄하는 바람에 100만명 넘게 아사한 비극의 도시이기도 하다. 교향곡 ‘레닌그라드’는 그곳에서 태어난 쇼스타코비치가 나치에 맞서 싸우는 고향 동포들에게 바친 곡이다.

▶당시 교향곡 연주는 레닌그라드 라디오 교향악단이 맡았다. 아무것도 먹지 못한 단원들이 리허설 도중 쓰러져 목숨을 잃었다. 그때마다 악기를 연주할 줄 아는 시민과 군인이 빈자리를 채웠다. 봉쇄가 한창이던 1942년 8월 9일, 마침내 전쟁터 한복판에서 곡이 연주됐다. 포연 속에 울려퍼지는 연주를 들으며 시민들은 눈물을 흘렸다. 그들은 곡을 감상했다고 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이 곡은 우리가 겪은 교향곡이다.”

 

▶나치 희생자였던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략했다. 이번엔 우크라이나인들이 악기를 들었다. 수도 키이우에선 키이우 클래식 심포니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며칠 전 독립광장에서 야외 콘서트를 열었다. 독립광장은 2014년 유럽연합(EU) 가입을 갈망하던 우크라이나인들이 친러 성향 야누코비치 대통령을 축출한 역사적인 장소다. 남부 항구도시 오데사에선 우크라이나 군인들이 전투가 없을 때면 총 대신 악기를 들고 전란에 휩쓸린 주민들을 위로한다.

▶교향곡 ‘레닌그라드’ 악보는 마이크로필름에 담겨 나치의 봉쇄를 뚫고 서방에 전해졌다. 전 세계가 그 곡을 연주하고 듣는 것으로 침략자를 규탄했다. 전쟁 동안 미국에서만 62회나 연주됐다. 지금 폴란드와 루마니아의 우크라이나 접경 도시에서도 반전과 평화를 기원하는 음악 소리가 연일 울려 퍼지고 있다. 음악은 부드럽지만 그 안에 담긴 평화를 향한 염원은 강철처럼 단단하다. 푸틴이 그 선율을 끝까지 외면했다간 파멸당한 나치의 전철을 밟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