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속 정치이야기

[고전 속 정치이야기] 애도왕열(哀悼王烈)

bindol 2022. 4. 6. 05:13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삼국시대의 왕열은 병원(邴原), 관녕(管寧)과 함께 명사로 이름을 날렸다. 천하의 조조마저도 차마 그를 초빙하지 못할 정도로 재야에서 깨끗하게 살다가 죽었다. 그는 다양한 지식과 도에 통달했지만, 정의가 아니면 돌아보지 않았다. 영천(穎川)의 진태구(陳太丘)를 스승으로 모셨다. 많은 학우들이 진태구에게 배웠으나, 왕열의 기량이 워낙 출중해 모두 감복하며 따랐다. 그의 이름은 해내에서 더욱 유명해졌다. 조부의 상을 당해 귀향했다. 마침 대기근이 닥쳐서 사람들이 굶주리자 자신의 창고를 풀어 읍민들을 구했다. 종족들은 효자라 불렀으며, 읍민들은 어질다고 칭송했다. 교육에 전념해 학교를 세웠다. 각자의 성품과 기질에 맞춰 선을 따르고 악을 멀리하도록 가르쳤다.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더욱 교화를 철저히 하자 모두 소중한 인재로 바뀌었다. 그의 문인들은 모두 반듯했기 때문에 행동거지만으로 왕열의 문인임을 알았다.

소를 훔치다가 잡힌 사람이 있었다. 그는 죄를 뉘우치며 제발 왕열의 귀에 들어가지 않게 해달라고 사정했다. 소식을 들은 왕열은 도둑에게 베 한 단을 주었다. 누군가 도둑은 선생님의 귀에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하는데 왜 베를 주느냐고 물었다. 왕열이 말했다.

“옛날에 진목공은 준마를 훔쳐서 잡아먹은 사람에게 술을 주었다. 나중에 도둑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진목공을 위기에서 구했다. 지금 저 도둑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으며, 나에게 그 소문이 들어갈까 겁을 먹었다고 하니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다.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은 착한 마음도 생겨난다. 내가 베를 준 것은 착한 마음을 장려하기 위함이다.”

어떤 노인이 무거운 짐을 지고 길을 가는데, 어떤 사람이 대신 집까지 짐을 날라주었다. 노인이 이름을 물어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 노인이 이번에는 길에서 칼을 잃어버렸다. 뒤에 오던 사람이 칼을 발견하고 주인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 해질 무렵 노인이 칼을 찾으러 와서 보니 전에 짐을 져다 준 사람이 칼을 지키고 있었다. 노인이 그의 옷자락을 잡고 물었다. “전에는 대신 짐을 져주고도 이름을 가르쳐 주지 않더니, 이번에는 내 칼을 지켜주셨소이다. 이번에는 반드시 이름을 가르쳐 주시오. 내가 왕열 선생에게 알리겠소.”

노인은 그의 이름을 듣고 왕열을 찾아가 그 사실을 알렸다. 왕열은 이렇게 말했다.

“세상 사람들은 어진 사람이 있다고 하는데 나는 아직도 만난 적이 없소.”

왕열이 사람을 시켜 그 사람을 데려왔더니 전에 소를 훔쳤던 사람이었다. 왕열은 사람을 감동시키면 이러한 경지까지 이른다고 감탄했다. 왕열은 그를 남달리 대했다. 사람들은 시비를 다투다가 왕열을 찾아갔다. 그러나 막상 왕열의 초려가 보이면 도로 돌아갔다. 다투던 사람들은 서로 당신이 옳았다고 말하면서 자기들이 다툰 사실이 왕열의 귀에 들어가지 않도록 조심했다. 관리들도 직접 찾아와 자문을 구했다. 효렴으로 천거하자는 논의가 잇달았으며, 삼부에서 모두 왕열을 정중히 모시고자 했지만 그는 한 번도 가지 않았다.

동탁의 난이 발발하자 요동으로 피난한 그는 몸소 농기구를 잡고 백성들과 어울렸다. 사람들은 그를 군주처럼 받들었다. 당시에는 세상이 몰락해 참된 지식인이 별로 없었으며, 붕당을 이루어 서로를 비방하는 일이 만연했다. 이러한 세상을 피해 요동으로 온 사람들 가운데에는 그러한 일로 피해를 입었던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왕열과 함께 살자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왕열이 있을 때 요동에서는 강자가 약자를 함부로 대하는 경우가 없었으며, 다수가 소수를 억압하는 경우도 없었다. 장사꾼들도 시장에서 물건을 팔 때 함부로 바가지를 씌우려고 하지 않았다. 7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필자가 사는 산중에는 벌써 냉기가 느껴진다. 왕열을 생각하니 기온은 떨어져도 가슴은 따뜻하다.

출처 : 천지일보(http://www.newscj.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