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속의 한국사] 성벽 둘러싼 거대한 도랑… 돌고래·상어 뼈도 발견됐죠
경주 월성해자(月城垓子)
신라시대 왕궁·관청 등 있던 곳
나뭇조각에 쓴 문서 남아있고 제물로 바친 인골도 묻혀있어요
문화재청과 경주시가 이달 중순부터 경주 월성(月城)을 둘러싼 방어 시설인 '해자(垓子)'를 일반인에게 공개한다고 해요. 3년여에 걸친 정비를 마친 거예요. 해자는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곽 주위를 둘러서 판 커다란 도랑이나 연못을 가리켜요.
월성은 신라 왕궁이 있던 곳인데요. 남쪽에는 자연 하천인 남천이 흐르고 있고, 나머지 동·서·북쪽에는 성벽을 따라 커다란 도랑을 파서 물을 채운 인공 하천인 해자가 있어요. 경주 월성이 어떤 곳이고, 그 주변에서 어떤 재미난 것들이 발견됐는지 알아볼까요?
신라의 왕궁, 경주 월성
경주는 1000년 역사를 간직한 신라의 중심지로 수많은 고분과 사원·성곽이 남아 있어요. '월성'은 초승달처럼 생겼다고 해서 반월성(半月城)이라고도 하고, '재성(在城)'으로도 불렀어요. '재성'은 '겨신(在) 성'이라는 이두(한자의 음과 훈을 빌려 한국어를 적던 표기법) 표현으로, 왕이 '계신 성' 즉 왕궁을 뜻하는 신라말이에요.
5세기 무렵 월성이 세워지고 그 주변에 변화가 일어나는데요. 월성 내부를 평평하게 만들어 대형 건물이 들어설 수 있는 기반 시설을 마련하고, 월성 북쪽의 대지를 파서 해자를 만든 뒤 이 흙을 이용해 성벽을 축조한 거예요. 이때부터 월성은 왕궁으로서 모습을 갖춰 가는데, 소지왕 10년(488)에 '월성을 수리한 뒤 국왕의 거처를 옮겼다'는 삼국사기의 기록과도 잘 맞아떨어져요.
월성 성벽과 인간 제물의 흔적
경주 월성은 동서 890m, 남북 260m, 바깥 둘레 2340m 크기로 흙을 쌓아 만든 토성(土城)이에요. 흙으로 쌓은 성벽이 1000년이 지나도록 허물어지지 않은 까닭은 무엇일까요. 기초를 다지는 일과 성벽을 쌓는 일에 많은 공력을 들였기 때문이에요.
성벽을 본격적으로 쌓기 전에는 성벽 기초를 견고하게 만들기 위해 식물 잎이나 줄기 등 식물성 재료를 깔았어요. 석회 성분인 조개껍데기를 얇게 깐 흔적도 남아 있었는데, 이렇게 하면 흙의 인장력이나 지지력이 높아져 기초가 단단해진대요. 성벽을 쌓을 때는 점성이 많은 흙과 점성이 적은 흙을 번갈아 가면서 쌓고 다졌는데, 가장 윗부분에 돌을 쌓고 점성이 강한 점토를 덮어서 흙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했어요.
2017년에는 월성 서쪽 성벽의 기반층 경계면에서 인골이 2구 발견됐어요. 이 인골들은 땅의 신에게 제사를 드리며 바친 제물로 보여요. 집을 짓거나 성벽을 쌓을 때 사람을 희생(犧牲)으로 드리는 풍습은 고대 중국에서 성행했는데, 우리나라에서도 사람을 주춧돌 아래 묻으면 건물이나 제방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인주(人柱)' 설화가 남아 있어요.
인골은 몸을 반듯하게 편 채로 나란히 누워 있었어요. 이들은 50대 남성과 여성으로 밝혀졌는데요. 지난해에는 20대 여성 인골이 추가로 발굴돼 훨씬 많은 사람이 성벽 축조를 위한 희생으로 바쳐진 것을 알게 됐어요. 고도의 토목 기술을 활용해서 너비 약 40m, 높이 10m 이상을 쌓아 올린 월성 성벽은 고대국가로 성장해 가던 신라의 기술 발전과 왕권의 성장을 잘 보여주지만, 성벽을 축조하면서 사람까지 제물로 바쳤다는 사실은 큰 충격을 주고 있어요.
해자 안에서 발견된 갖가지 동식물
월성 바깥쪽 해자 내부에는 넓게 퇴적된 펄 흙이 두껍게 남아 있었는데요. 이 때문에 물이 고여 있던 담수 시설로 추정돼요. 이곳에는 항상 물이 채워져 있었기 때문에 유기물이나 금속 제품이 썩지 않고 잘 남아 있는데요. 이를 분석해서 신라인의 생활 모습이나 월성 주변의 환경을 복원할 수 있죠.
이곳에서는 벼·밀·콩 등의 곡식류뿐 아니라 박·참외 같은 채소류, 복숭아·자두 같은 과실류, 가시연꽃·마름·개연꽃 등의 수생식물이 발견됐어요. 이를 통해 신라 월성 주변은 봄이면 화사하게 분홍색 꽃을 피우는 복숭아나무, 자두나무가 자라고 해자에는 가시연꽃, 마름 같은 수생식물이 자라던 풍경을 상상해 볼 수 있답니다.
수천 점이나 되는 동물 뼈도 발견됐는데요. 가축인 소나 말·개뿐 아니라 사슴·멧돼지·곰·강치·돌고래·상어 뼈도 출토됐어요. 신라 왕경인들이 가축을 사육했을 뿐 아니라 사냥이나 고기잡이를 이용해 먹을거리를 확보한 것을 알 수 있죠. 이곳에 먹고 남은 뼈를 버린 거예요.
흙으로 만든 말을 탄 사람이나 동물 모양 토우(土偶)도 발견됐어요. 5.3㎝밖에 안 되지만 터번을 쓴 인물 토우는 눈이 깊고 발목까지 내려오는 장옷을 입고 있어요. 당시 신라나 중국 사람의 복식과 달라 고대 서아시아 소그드인 모습으로 생각돼요. 신라와 서역의 교류를 추정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예요.
30점이 넘는 '목간(木簡)'도 발견됐어요. 목간은 종이가 보편화되기 전에 정보 전달이나 글씨 연습 등을 목적으로 글자를 쓴 나뭇조각을 가리켜요. 월성 해자 일대에는 왕궁뿐 아니라 관청도 자리했는데요. 그곳에서 활동하던 신라의 하급 관리들이 남긴 각종 문서가 목간 형태로 남아있던 거예요.
그 내용을 보면 신라의 중앙과 지방 통치 체제의 정비 과정을 보여주는 것도 있고, 여러 마을에서 세금을 거두거나 노동력을 동원한 기록도 있어요. 종이를 구입하고 그것을 보고한 시시콜콜한 기록이나 쌀·피 등을 보내면서 사용한 물품 꼬리표 같은 것도 있고요. 이런 목간은 고대사의 비밀을 푸는 열쇠로 평가되며 역사책에는 기록되지 않은 신라인들의 생생한 삶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어요.
[월성에는 어떤 시설이 있었을까]
월성은 왕궁이 만들어진 488년 소지왕 때부터 935년 신라가 멸망할 때까지 신라 왕이 살던 곳이에요. 월성 안에는 국가적 의례가 이뤄지는 공간, 관리들이 사무를 보는 공간이 있었어요. 진덕여왕은 651년 정월 초하루 월성의 정전(正殿)인 조원전(朝元殿)에 나아가 여러 신하의 하정례(賀正禮)를 받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요. '하정례'는 유교적 국가 의례의 하나로, 정월 초하룻날 신하들이 정전에 모여 임금에게 인사를 드리는 의식을 말해요. 월성 내부에 경복궁 근정전처럼 커다란 건물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지만, 아직 정전 건물의 흔적은 찾지 못했어요. 다만 2014년부터 이뤄진 발굴에서 통일 신라 시대 건물터 17곳과 수만 점에 이르는 기와·토기·벼루 등이 발견됐어요. 이를 통해 왕궁에 공무를 수행하던 관청이 있었음을 알 수 있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