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그렇구나

文人 으로서 圃隱 先生을 말하다

bindol 2022. 4. 9. 03:42

高麗末의 代表的인 문인이요, 정치외교가, 동방 성리학의 조종, 충절의 표상 등 수많은 수식어가 말해주듯 포은 정몽주 선생은 문・사・철(文・史・哲)을 아우르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럼에도 선생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에 있어서 충절(忠節)의 상징으로만 강조되어온 탓에 시문학 분야에 대해서는 크게 주목을 받지 못했다.

즉 고려 말의 대표적인 정치외교가이면서 성리학자라는 위상이 그의 시문학을 가려 세인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조선 중기의 문신인 노수신(盧守愼) 선생이 『포은선생집』 서(序)에서 밝힌 바와 같이 포은 선생은 302편의 훌륭한 시작품을 남기고 있다. 태조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이 선생을 회유하기 위해 ‘하여가(何如歌)’를 지어 보이자 선생은 고려 왕조에 대한 굳은 절의를 ‘단심가(丹心歌)’로 화답한 것은 너무도 유명하다.

단심가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선생의 시에는 호방한 기상과 함께 낭만적인 면모를 엿볼 수 있는 구절이 많다. 그래서 선생은 목은(牧隱) 이색(李穡),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 선생과 함께 고려 말의 대표적 시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특히 다섯 차례나 명나라 사행(使行)을 다녀왔는데, 이때마다 두고 온 고국과 고향을 그리는 마음을 시로 달랬으며, 돌아오는 길에도 수많은 시를 남겼다.

선생의 시를 세심히 살펴보면, 가장 많이 등장하는 시어(詩語)가 ‘춘풍(春風)’, ‘우(雨)’ ‘매화(梅花)’ 등이다. 중국으로 사행을 떠난 객지에서의 봄은 친구와 고향을 생각하게 하고 귀거래(歸去來)의 갈망을 고조시켰으리라 짐작된다.

또 선생의 시에 ‘호(豪)’자의 빈도가 높다는 것도 우연이 아닌 듯싶다. 선생이 왜구의 침입 때마다 종군하여 혁혁한 공을 세웠고 일본과 중국을 사행(使行)하며 나그네의 길을 걸었던 것은 선생의 타고난 ‘호기(豪氣)’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제가들이 포은 시의 품격을 평하면서 ‘호걸(豪傑)’, ‘호걸(豪傑)’, ‘호매(豪邁)’, ‘호방(豪放)’, ‘호장(豪壯)’, ‘호창(豪暢)’, ‘호탕(豪宕)’ 등의 평어(評語)를 사용하고 있는데, 포은의 호매(豪邁)한 성품과 시에 나타난 ‘호기(豪氣)’는 포은 선생의 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관건이 된다.

오는 5월 10일(금)부터 3일 동안 영리는 제11회 포은문화제에 한국서도협회 용인지부에서 포은 선생의 시 작품 30여 점과 포은문화제 전국한시백일장 1회 대회부터 10회 대회까지 대상을 수상한 10점을 함께 전시하게 되었다. 문인으로서 포은 선생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


용인문화원 사무국장 김 장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