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하늘 높아 가고 변방의 말이 살찌는구나(秋高塞馬肥·추고새마비)
먹구름이 다 걷혀 요사스런 별은 지니(雲淨妖星落·운정요성락)/ 가을 하늘 높아가고 변방의 말이 살찌는구나(秋高塞馬肥·추고새마비)/ 말안장에 올라앉아 천하명검 번쩍 들고(馬鞍雄劍動·마안웅검동)/ 붓을 들어 깃털 편지 작성하여 띄운다네.(搖筆羽書飛·요필우서비)
당나라 초기 시인 두심언(杜審言·648?~708)의 시 ‘소미도에게 주는 시(贈蘇味道·증소미도)’ 일부로, ‘전당시’ 62권에 수록됐다. 두심언은 시성(詩聖)으로 불리는 두보의 조부이다. 위 시는 변방 정경과 당나라 군대의 빛나는 승전보를 전하는 내용이다. 시 전체 내용을 보면 당나라 중종 때, 두심언이 참군(參軍)으로 북녘에 가 있는 친구 소미도가 하루빨리 장안(長安)으로 돌아오기를 바라며 지은 것이다. 여기서 ‘추고새마비(秋高塞馬肥)’ 구절은 당나라 군대의 승리를 가을날에 비유한 것이다.
‘한서(漢書)’ 흉노전(匈奴傳)에 따르면 ‘추고마비’라는 말은 중국 북방에서 일어난 유목민족 흉노가 활동하기 가장 좋은 계절이라는 뜻이 있다. 흉노는 가을철에 중국 북방 변경 농경지대를 약탈하여 기나긴 겨울 동안의 양식을 마련했다. 북방 변경의 중국인은 ‘하늘이 높고 말이 살찌는’ 가을만 되면 흉노의 침입 때문에 늘 전전긍긍했다. 중국인에게 추고마비는 두려움과 경고의 고사성어로 시작한 말이다.
고대 중국 군왕들에게 흉노의 침입에 대처하는 것이 외치의 가장 큰 과제였다. 춘추전국시대에 연(燕)·진(秦)·조(趙)나라는 각각 북쪽 변경에 장성을 쌓았고,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제는 그 장성들을 증축하고 이어 만리장성을 완성했다. 이렇듯 추고마비는 부정적인 뜻으로 시작했으나 만리장성을 쌓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여 염려할 필요가 없어지자 점차 좋은 의미로 쓰이게 된 것이다.
위 시의 살찐 말은 오랑캐 말이 아니라 요새를 지키는 당나라 군대의 말이므로 ‘추고마비’는 이전 뜻과 달리 오곡백과 무르익고 말도 살찌는 아주 좋은 가을 날씨를 표현하는 말로 그 의미가 바뀌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추고마비보다 ‘천고마비(天高馬肥)’를 일반적으로 쓴다. 요즘 여기저기서 ‘천고마비’라는 말을 많이들 써서 유래를 한 번 더듬어봤다.
시인·고전인문학자·목압서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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