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훈의 고전 속

[조해훈의 고전 속 이 문장] <151> 윤휴가 이동규에게 시국을 우려하며 보낸 편지

bindol 2022. 6. 1. 06:07

가슴속이 조금 시원해진 것을 느끼겠소(胸中差覺省事耳·흉중차각성사이)

 

병중에 광기가 또 발작해서 공연한 짓을 저질렀다오. 온 나라가 떠들썩한데, 막상 형의 편지를 받아 보니, 이다지도 같은 병을 앓기에 애처러워하고 같은 길을 가기에 탄식하여, 어떻게 이렇게 그 견식이 온 세상 사람들과 정반대로 내달리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소. 저는 평생 하고 싶었던 이 말을 미처 죽기 전에 한번 뱉어버리고 나니, 가슴속이 조금 시원해진 것을 느끼겠소.

病中發出狂, 作一無當之擧. 方擧國哄然, 而得兄書, 乃若有同病之憐, 共道之嘆, 何其見之與一世背馳也. 抑此平生所欲言者, 得一吐於未死之前, 胸中差覺省事耳.(병중발출광, 작일무당지거. 방거국홍연, 이득형서, 내약유동병지련, 공도지탄, 하기견지여일세배치야. 억차평생소욕언자, 득일토어미사지전, 흉중차각성사이.)

위 글은 윤휴(1617~1680)가 벗 이동규(?~1677)에게 시국을 우려하는 마음을 토로한 간찰(편지) ‘答李祖然同揆(답 이조연동규)’로, ‘白湖全書(백호전서)’ 권16 書(서)에 실렸다. 이 글은 남인이었던 윤휴가 1600년(현종 1) 조대비(후일 자의대비 존호 받음)의 복상 문제로 서인과 대립하던 제1차 예송 무렵 적었다. 1차 예송은 1659년(효종 10) 효종이 죽자 효종의 어머니 조대비가 상에 입을 의복을 두고 일어난 분쟁이다. 윤휴 등은 효종이 왕위를 계승했기에 장자나 다름없으므로 3년복을 입어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서인인 송시열 등은 효종은 인조의 둘째 왕자이므로 장자의 예로 할 수 없다며 기년(朞年·만 1년)으로 해야 한다고 반박했다. 서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조대비는 기년복을 입었다. 1674년 현종이 죽고 제2차 예송이 일어나 서인이 몰락하고 남인이 집권하자 윤휴는 여러 관직을 거쳐 1679년 우찬성에 올랐다. 그러나 이듬해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득세하자 윤휴는 갑산으로 유배된 뒤 숙종 때 사사되었다. 대신 허적의 서자인 허견이 숙종 초에 인조의 손자이며 인평대군의 아들인 복선군과 역모를 꾀한다고 고변이 됐다. 이에 허견은 능지처참되고 복선군·허적을 비롯한 윤휴 등 남인 실권자들이 죽음을 당했다. 윤휴의 편지를 읽어보니 반대쪽 당색 선비를 죽이고 귀양 보내는 일이 반복된 정치 상황이 무섭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