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5. 조선 대표 건달 권력자, 선조 아들 임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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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롱당한 선조와 그 아들
임진왜란 소강상태가 지지부진하게 이어지고 정유재란이 임박한 1597년 가을이었다. 장소는 국립중앙박물관이 있는 서울 동작진 포구였다. 서대문에 있는 모화관에서 명나라 총사령관 양호가 행선지를 밝히지 않고 남대문을 나가버렸다. 만류하는 사람들을 뿌리치고 말을 몬 양호가 동작진에 도착했다.
양호를 붙잡으라는 신하들 성화에 선조는 가마를 타고 서둘러 남대문을 나섰다. 급한 걸음으로 성문을 나서는 왕을 보면서 길 위에 한성 주민들이 몰려나와 통곡을 했다. “명나라로 달아나겠다”며 북쪽으로 도주했던 왕이었던지라 이번에도 또 백성을 버리고 도망칠까 두려웠던 것이다. 그 순진한 백성은 “중국 장수를 따라 강가까지 갔다 온다”는 선조 말에 ‘서로 조아리며 감격하여 울지 않은 백성이 없었다.’ 신뢰를 잃은 지도자는 그렇게 초라했지만, 순진한 백성이 기댈 언덕은 그 지도자밖에 없었다.
둔지산(현 대통령 집무실 북쪽)을 넘어 동작진에서 선조가 양호를 만났다. 양호는 강 건너 대기 중인 1000여 명군 기마부대를 지휘해 대규모 군사 훈련을 선보였다. 그리고 이 명나라 사령관은 조선 국왕을 이리 책망했다. “왜 활 잘 쏘는 조선이 한 방에 일본에 무너졌는가.” 선조는 “천군(天軍) 위력이면 왜적쯤이야 굳이 평정할 것도 없겠다”고 공치사를 하며 겨우겨우 양호를 한성으로 복귀시켰다.(1597년 9월 12일 ‘선조실록’)
그런데 선조와 양호 대화 도중 뒤쪽에서 누군가가 말 한 마리를 거칠게 몰고 달려와 양호를 가로막았다. 왕과 명나라 장수 대화를 끊어버린 이 용감무쌍한 사내는 선조 맏아들 임해군이다. 연산군과 함께 조선을 대표하는 건달 권력, 그래서 조선 백성이 붙잡아 일본군에 넘겨줘버린 폭력의 상징 임해군 이야기.
[박종인의 땅의 歷史] 305. 조선 대표 건달 권력자, 선조 아들 임해군
건달로 자라난 왕자들
1583년 가을날 왕자를 가르치는 사부 하낙(河洛)이 사표를 내며 이리 말했다. “임해군(臨海君)이 역사서 공부를 거의 마쳐 가는데도 아직 그 줄거리(강령·綱領)조차 알지 못합니다. 제 죄이옵니다.”(1583년 음 8월 5일 ‘선조실록’) 열한 살짜리 다 큰 사내아이가 글 읽을 줄을 모른다는 말이었다.
임해군은 성질이 거칠고 게을러 학문에 힘을 쓰지 않고 종들이 제 마음대로 하도록 놔두어 폐단을 더욱 심하게 일으키곤 했다. 반면 동생 광해는 행동이 조심스럽고 학문에 부지런해 백성들이 마음으로 따랐다.(1592년 음 4월 14일 ‘선조수정실록’) ‘선조수정실록’은 인조 때 반(反)광해파인 서인이 편집한 책이니, 광해군과 임해군에 대한 이 평가는 객관적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1589년 선조 슬하 왕자들이 결혼을 하고 궁 밖에 집을 짓는데 저마다 남의 논밭을 빼앗아 땅을 넓혔다. 임해군만 아니라 여러 왕자들이 땅을 빼앗았고 뇌물을 대놓고 받았는데, 임해군은 연장자로서 가장 횡포해 조야가 근심스럽게 여겼다.(1589년 음 4월 1일 ‘선조수정실록’)
여러 왕자 가운데 여섯째 순화군도 마찬가지였다. 순화군은 ‘임해군이나 정원군 행패보다는 덜했다 하더라도 도성 백성이 그를 호환(虎患) 피하듯 하였다.’(1607년 음 3월 18일 ‘선조실록’) 여기 나오는 ‘정원군’은 훗날 인조가 된 능양군의 아버지며 선조의 다섯째 아들이다. 이 세 왕자는 실록 도처에 백성을 괴롭히고 사욕을 취한 대표적인 건달 권력자로 묘사돼 있다.
백성이 일본군에 넘긴 건달 왕자들
정부 내에서는 근심거리요 백성에게는 두려움과 공포였던 장남 임해군은 결국 세자가 되지 못했다. 1592년 음력 4월 28일, 전쟁 개전 직후 선조는 맏아들 대신 둘째 광해군을 세자로 선택했다. 그리고 임해군과 순화군에게 전국 각지로 가서 근왕병을 모집하라고 명했다. 세자 광해군은 국정을 대리해 국내에 머물라고 명했다.(1592년 음6월 1일 ‘선조수정실록’ 등) 본인은 명나라를 목표로 의주를 향해 떠났다.
근왕병 모집을 위해 함경도로 떠난 임해군과 순화군은 ‘좋은 말이나 보화를 보면 반드시 이를 빼앗았고’ ‘적이 바로 보이는데도 백성을 흩어지게 할 생각밖에 없었다.’(이호민, ‘오봉선생집’24, ‘정문(呈文)’, 정례부대당(呈禮部大堂)) 또 ‘사나운 종들을 부려서 민간을 노략하고 어지럽히는가 하면’ ‘수령들을 몹시 핍박해 인심을 크게 잃었다.’(민인백, ‘태천집’ 2, ‘용사일록(龍蛇日錄)’ 계사년 10월) 전시(戰時)를 분간 않는 만행 행각 속에 두 왕자가 회령에 도착했다. 기다리고 있던 회령 사람들은 이들을 밧줄로 꽁꽁 묶은 뒤 성문을 열고 일본군에게 넘겨줘버렸다.(이호민, 앞 책)
반란을 주도한 회령 아전 국경인과 그 무리는 두 왕자를 객사 방 안에 꽁꽁 묶어서 물건처럼 차곡차곡 쌓아 놓았다. 혼자 말을 타고 입성해 이를 본 가토 기요마사가 “이들은 너희 국왕 친자(親子)인데 어떻게 이렇게까지 곤욕을 가하는가?”라고 놀랄 정도였다.(1592년 음7월 1일 ‘선조수정실록’: 이긍익, ‘연려실기술’ 15, ‘선조조고사본말’, 북도의 함락과 정문부의 수복)
기이한 북관대첩
석 달 뒤 함경도 북평사 정문부가 의병을 모집해 일본군과 반란군을 제압했다. 두 왕자 구출은 실패했지만, 함경도를 회복한 이 전투를 ‘북관대첩’이라고 한다. 숙종 때인 1709년 이를 기념하는 북관대첩비를 함경도 길주에 세웠다. 비석은 1905년 러일전쟁 때 일본군이 도쿄 야스쿠니신사로 가져갔다가 2005년 반환됐다. 실물은 원위치인 함북 김책시(옛 길주)로 돌려줬고 경기도 의정부 정문부 묘와 서울 경복궁에 복제비가 서 있다. 전투를 이끈 정문부는 인조 때인 1624년 역모 혐의로 고문받다가 시종 “원통하다”고 하며 죽었다.(1624년 음11월 8일 ‘인조실록’)
“삼남을 주고 나를 살려라”
여러 경로를 통해 조선에 전달된 강화 협상 조건은 대체로 ‘대동강을 경계로 한 명과 일본의 조선 분할 통치’였다. 일본군 수중에 떨어진 임해군과 순화군은 종전 무렵까지 전쟁 수행에 큰 장애가 됐다.
협상을 담당한 사람은 명에서 파견된 심유경이었다. 1593년 음력 3월 15일 심유경이 고니시 부대가 주둔한 한성 용산(현 서울 원효로 부근)에서 회담을 가졌다. 심유경은 선상(船上)에서 뭍에 있는 고니시와 담판을 벌인 뒤 조선군 사령관 김명원에게 편지를 보냈다. ‘임해군이 사람을 시켜 이렇게 전했다. “우리를 돌아가게 해준다면 한강 남쪽 땅은 어디든 가리지 않고 일본에 다 줄 것이다(倘得歸國 漢江以南 不拘何地 任意與之·당득귀국 한강이남 불구하지 임의여지).”'(류성룡, ‘징비록’, 김시덕 역, 아카넷, 2013, p649) 영토를 줘서라도 자기를 살려내라는 것이다.
심유경은 명-일본 사이에서 문서 조작을 해가며 협상을 이끌던 모사꾼이었으니, 이 말의 신빙성은 문제가 있다. 하지만 바로 며칠 전 임해군은 평안도 안변에서 “지금 휴전이 안 이루어지면 우리는 바다 건너 일본으로 가게 된다”며 조선 정부 관리에게 경비 조달을 요구한 적이 있으니(1593년 음3월 4일 ‘선조실록’), 땅과 자기 목숨을 바꿔달라는 말은 사실일 가능성이 크다.
전후 막장으로 치달은 악행
전쟁이 끝났다. 정유재란이 터지기 전 가까스로 풀려나 목숨을 건진 임해군 행태는 막장으로 치달았다. 1600년 임해군은 인질 억류 시절 자기를 도와줬던 홍산군 이득의 노비 4명을 강탈해갔다. 1603년에는 특진관 유희서의 첩과 간통한 뒤 유희서를 청부 살해했다. 이듬해 수사 결과 임해군이 진범으로 밝혀지자 선조는 수사반장인 포도대장 변양걸을 고문하라 명했다.(1604년 음1월 1일 ‘선조수정실록’) 남의 남편을 죽이고 그 아내를 하인을 시켜 끌고온 뒤 그 하인에게 짝을 지어 입을 틀어막고(1603년 음3월 9일 ‘선조실록’) 민가에 들어가 사람을 구타한 뒤 노비를 빼앗는가 하면 기생을 몇 년씩 불법으로 데리고 살며 사람 죽이기를 초개(草芥)와 같이 하였다.(1606년 8월 23일 ‘선조실록’) 동생 순화군은 의인왕후 상중에 빈전 뒤에서 궁녀를 강간하고(1600년 음7월 16일 ‘선조실록’) 술을 가지고 온 아낙을 옷을 벗겨 구타하고 눈먼 여자 생니를 뽑고 장석을시라는 여자 생니 9개를 쇠망치로 부수는 변태 행각을 벌였다.(1601년 음2월 23일 ‘선조실록’)
두 아들을 비호하던 선조는 결국 순화군의 군호를 삭제하고 유배 보내는 데 동의했다. 순화군은 1607년 음력 3월 18일 가택 연금 상황에서 죽었다.
임해군은 선조가 죽자마자 동생 광해군 정권에 의해 역모 혐의를 쓰고 1608년 전남 진도를 거쳐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 됐다가 살해됐다. 유배소를 지키는 군관 이정표가 윽박질러 독을 먹게 했으나 거부하다가 목이 졸려 죽었다.(1609년 음4월 29일 ‘광해군일기’)
건달에 걸맞은 무덤 풍경
경기도 남양주에는 그 임해군 무덤이 있다. 자식 없이 죽은 탓에 입적시켜준 양자 후손들이 무덤에 비석을 세워놓았다. 하지만 혼이 저승으로 무사히 가도록 인도해주는 장명등은 무덤 아래 지붕과 몸체가 떨어져나간 채 팽개쳐져 있다. 419년 전 실록 사관은 이렇게 평했다. “백성에 의해 포박돼 적에게 보내졌으니 극도로 사무친 원망이 아니면 어찌 이렇게 하였겠는가.”(1603년 음8월 6일 ‘선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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