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의 실수...“사또를 고소하는 자는 곤장 100대에 처한다” [박종인의 땅의 歷史]
307. 세종의 실수, 수령고소금지법
* 유튜브 https://youtu.be/7L_og6KoxfY에서 동영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건국세력의 설계: 중앙집권
새 나라를 세울 때 이성계와 정도전이 이끄는 군사-신진사대부 연합 세력이 꿈꾼 나라는 강력한 중앙집권제 국가였다. 중앙정부와 그 정부가 파견한 지방관이 군사와 경제와 행정을 장악하는 나라였다. 건국 세력의 정적인 옛 고려 지방 토호 세력을 약화시키고 군왕에서 백성까지 성리학적 수직 질서가 확립된 이상 사회를 꿈꿨다. 그래야 고려왕조가 말기에 보여준 부패한 모습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다.
지방관, 다시 말해 중앙 권력을 대리하는 사또(수령·守令) 권력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4대 조선 국왕 세종은 결정적인 정책을 내놨다. 즉위 4년 만인 1422년 음력 2월 3일(이하 음력) ‘세종실록’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형조에서 “수령을 고발한 백성은 장 100대를 치고 3000리 유배형에 처한다”고 하니 상(上)이 그대로 따랐다.’
때로는 신념과 의도가 현실을 그릇되게 이끌기도 하는 법이다. 세종이 결재한 ‘수령고소금지법(부민고소금지법)’은 지방관 권한을 대폭 강화했으나 이후 오래도록 백성의 민의 상달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작용했다. 조선 공동체 민의 통로를 단절시킨 수령고소금지법 이야기.
예조판서 허조의 정지 작업
강직하기 짝이 없는 선비 허조를 태종 이방원은 끔찍이 아꼈다. 끝없는 바른말에 곤장을 때리고 파직도 했지만 결국 태종은 허조를 재차 불러 고위직에 중용했다. 셋째 아들 이도에게 왕위를 물려준 뒤 어느 잔칫날 상왕 태종은 세종 앞에서 허조 어깨를 만지며 이리 말했다. “허조는 나의 주춧돌(주석·柱石)이다.”
허조는 또 사람을 대할 때 ‘반드시 존비(尊卑)와 장유(長幼)의 분별을 엄히 하는’ 사람이었다. 허조를 자기 주춧돌이라 불렀던 태종은 허조가 바른 소리를 하면 바로 귀를 기울이고 실천에 옮기곤 했다.(이상 1439년 12월 28일 ‘세종실록’ 좌의정 허조의 졸기)
상왕을 물러나 있던 1420년 9월 4일 태종이 자기 거처인 낙천정(서울 광진구)으로 가는 길에 중랑천 천변 송계원평 들판으로 허조를 불렀다. 이런저런 대화 도중 허조가 불쑥 이리 말했다.
“아전과 백성이 수령의 잘못을 고발하는 자가 흔히 있으니 풍속이 심히 나빠져 화가 납니다. 이를 막지 못하면 아내는 남편을 아들은 아비를 배반하고 노비는 주인을 음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리 덧붙이며 땅바닥에 머리를 찧고 눈물을 흘렸다. “(수령 고발 금지를) 주변에서 반대해 오늘에야 아룁니다.” 감동한 태종은 즉시 시행하겠다고 약속했다.(1420년 9월 4일, 1422년 2월 3일 ‘세종실록’)
들판에서 태종을 만나기 1년 석 달 전인 허조는 회의석상에서 세종에게 “수령에 대한 고소·고발을 금지해 풍속을 두텁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이에 우대언(우승지) 이수(李隨)가 “(탐관오리를 고발하지 않는다면 그 해가 필히 백성에게 미친다”며 반대했다. 허조는 “수령이 하는 짓은 고발 없어도 많은 사람 귀와 눈에 드러난다”고 반박했다. 세종은 좌중에 술을 다섯 잔씩 돌리고 서둘러 회의를 끝냈다.(1419년 6월 21일, 1422년 2월 3일 ‘세종실록’) 허조는 바로 이날 회의를 가슴에 삭이고 있다가 자기를 신뢰하던 상왕 태종에게 직보한 것이다.
세종, 고소금지법을 결재하다
태종을 만나고 9일 뒤 허조는 세종을 만났다. 이렇게 주장했다. “천하와 국가에는 상하 구분이 없을 수 없다. ‘별처럼 작은 불이라도 온 들을 태운다’고 한다. 만약 이대로 두면 임금이라도 신하를 둘 수 없게 되고 아비라도 자식을 거느릴 수 없는 지경이 되리라. 따라서-.”
보고가 이어졌다. “상전을 고발하는 노비는 목을 베시라. 또 아전이나 백성이 고을 수령을 고발하면 역모와 살인죄가 아닌 한 수령에게 죄가 있더라도 처벌하지 말고, 만일 고발이 음해와 무고라면 고발한 사람을 중죄로 처벌하시라.” 허조는 “고려 때는 수령을 능멸하면 그 집을 연못으로 만들었다”고 덧붙였다. 이날 실록은 이렇게 끝난다. ‘이에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1420년 9월 13일 ‘세종실록’)
2년 뒤 형조에서 구체적인 처벌 규정을 정해 세종에게 보고했다. ‘수령을 고발한 사람은 장 100대를 치고 3000리 유배를 보낸다. 고발당한 수령은 역모와 살인죄가 아닌 한 고발의 진위 여부와 상관없이 처벌하지 않는다.’ 이 또한 ‘세종은 그대로 따랐다.’(1422년 2월 3일 ‘세종실록’)
지금까지 논란이 되고 있는 ‘노비의 주인 고소 금지법’과 ‘부민의 수령 고소 금지법’이 탄생한 날이었다(이 글에서는 ‘수령 고소 금지법’에 대해서만 알아보기로 한다).
태종의 개혁 – 신문고
태종은 즉위하고 일곱 달이 지난 1401년 7월 18일 궁궐에 신문고를 설치했다. 처음 명칭은 ‘등문고(登聞鼓)’였다. 그리고 다음 달 태종은 “하소연할 데 없는 백성으로 원통하고 억울한 일을 올릴 자는 북을 울리라”고 명하고 이름을 ‘신문고(申聞鼓)’로 고쳤다. 억울한 일을 관청에서 받아주지 않으면 누구든 북을 치되, 남을 무고하기 위해 북을 울리면 처벌한다고 조건을 달았다.(1401년 8월 1일 ‘태종실록’)
이듬해 정월 태종은 신문고 기능을 대폭 확대했다. 정치의 득실, 민생 문제도 신문고 대상이 되었고 고한 내용이 이치에 맞지 않아도(雖或不中·수혹부중) 면책을 한다고 했다. 역모나 반란 사건에는 집단 고발도 받아들이고 대규모 포상도 약속했다.(1402년 1월 26일 ‘태종실록’)
신문고를 주로 이용한 사람들은 왕조 교체 과정에서 불법적으로 노비가 되거나 노비를 남에게 빼앗긴 사람들이었다. 13년 뒤까지 북을 치는 민원이 노비 문제에 한정되자 태종은 “도성 내외 백성에게 억울한 처벌과 불법 강제 처분을 당한 사람은 언제든 북을 치라 이르라”고 다시 한번 강조하기도 했다.(1415년 7월 8일 ‘태종실록’)
개국 초기 어수선한 정국 속에서 중앙에서 파견한 수령들은 자질이 저질인 사람이 많았다. 1409년에는 밀양군수 우균이 지역민 4명을 이유 없이 때려 죽이는 사건도 있었다. 하지만 우균은 형법적인 처벌을 받지 않고 오직 파면에 그쳤다.(1409년 윤4월 20일 ‘태종실록’) 수령의 비리에 대한 중앙정부의 처분이 미봉책에 그치자 지역 세력들이 신문고를 두드리는 사례가 급증했다.
1410년 4월 사간원이 태종에게 개선책을 올렸다. “수령은 임금의 명을 받아 정사를 맡는 사람이다. 비록 허물이 있다 해도 백성은 그 허물을 숨겨줘야 한다. 그런데 간사한 백성이 수령을 고소하는 죄는 놔두고 수령만 죄를 주는 것은 잘못이다. 고소를 금지하라.” 의정부는 이에 대해 “간악하고 사나운 무리에게 징계할 문이 사라진다”고 반대했다.(1410년 4월 8일 ‘태종실록’) 조선왕조 사상 ‘수령 고소 금지법’이 처음으로 언급된 날이었다.
태종은 사간원의 개선책을 받아들이지 않고 신문고를 유지시켰다. 오히려 앞에 언급했듯 ‘억울한 처벌’과 ‘불법 처분’까지 신문고를 두드리도록 신문고 기능을 대폭 강화했다. 그러자 지방 토착 세력이 신문고를 두드리는 대신 수령과 결탁해 함께 부패를 저지르는 일이 빈번해졌다. 수령 권한도 강화됐지만 그 강화된 권한을 이용한 부정부패가 오히려 은폐되는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조병인, ‘세종의 ‘부민고소금지법’ 제정과 시행에 관한 연구’, 범죄수사학연구 통권 9호, 경찰대학 범죄수사연구원, 2019)
세종의 꿈: 삼강오륜의 나라
이와 같은 복잡한 상황 속에서 태종이 물러나고 세종이 등극했다. 세종이 즉위하고 두 달 만인 1418년 10월 사헌부에서는 “법을 제정해 삼강(三綱)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건의했다. 사헌부는 “윤리에 반해서 아비와 남편, 상전을 고소한 사람은 법률로 처단하라”고 건의했다. 세종은 의정부와 육조판서 연석회의에 이를 안건으로 올렸고, 이들 의견을 좇아 ‘윤리의 입법화’에 동의했다.(1418년 10월 6일 ‘세종실록’) 이로써 고려왕조 때는 경전에서나 볼 수 있었던 상하, 존비, 귀천, 장유의 구별이 현실 세계를 활보하게 되었다.(조병인, 앞 논문)
그리고 이듬해 6월 21일 강직한 예조판서 허조가 새 왕에게 수령에 대한 고소를 금지해야 한다고 나섰다. 왕은 이에 대해 “옛 법을 함부로 고칠 수 없다”고 했고 우대언 이수는 “탐관오리를 놔두면 백성에게 화가 미친다”고 반대했다.(1419년 6월 21일 ‘세종실록’)
그런데 세종은 이들에게 술을 먹여 논쟁을 가라앉히면서도 허조의 주장에 ‘그 또한 그렇게 여겨(上亦以爲然·상역이위연)’ 각 관청이 금지법 검토 지시를 내렸다.(1422년 2월 3일 ‘세종실록’) 심정적으로 허조의 주장에 절반쯤은 기울어 있었다는 뜻이다.
입이 막혀버린 백성들
결국 백성이 수령을 고소하는 행위는 공식적으로 금지됐다. 1년이 지난 1423년 백성의 억울함이 곳곳에서 감지되자 세종이 대책회의를 열었다. 병조참판 최사강은 “관찰사가 수령의 비리를 적발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주장했고 공조참판 황상은 금지법 폐지를 주장했다. 이에 이조판서 허조는 “중국처럼 소송 사태가 날 수 있다”며 폐지 불가를 주장했다. 세종은 “법의 폐단이 생기면 그때그때 대처하자”고 말했다.(1423년 6월 8일 ‘세종실록’)
세종은 각 지역에 관리를 보내 민생 문제와 수령의 비리를 조사하는 방법으로 수령 고소 금지법 보완을 시도했다. 법규정과 달리 수령을 고소한 백성을 처벌하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공익 신고는 계속 금하되 ‘자기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소장만은 허용’으로 금지법을 완화했다.(1433년 10월 24일 ‘세종실록’) 하지만 원천적인 문제는 풀릴 수 없었다.
마침내 1437년, 사헌부가 관리 기강 확립책을 내놨다. 그중에 고소 금지법 폐지안이 들어 있었다. “탐혹한 관리는 법을 믿고 위엄을 세워 마음대로 백성을 침해하는데 백성은 입을 봉하고 숨을 죽이며 원망을 품고 하늘에 호소한다. 이제부터 재물을 탐하고 정사를 어지럽게 하며 백성을 사납게 하는 일에는 모두 고소하게 하기를 허락하여 억울함을 펴게 하라.”(1437년 6월 1일 ‘세종실록’)
세종은 이후 지방에 관원을 파견해 수령과 감사의 횡포를 조사하라고 명했지만 수령 고소 금지법 자체에 대한 폐지 건의는 수용하지 않았다. 이 법은 300년 뒤인 숙종 때까지도 어전회의에서 언급되면서 백성의 억울함 호소에 제동을 거는 장치로 작동했다. 건국 초기 무질서한 시스템을 통제하기 위해 만든 법이 엉뚱한 방향으로 굴러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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