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를 망가뜨린 노론 조작정치의 그늘[박종인의 땅의 歷史]
306. 정읍 송시열 수명유허비 ‘독수(毒手·독 묻은 손)’의 비밀
* 유튜브 https://youtu.be/0zSX0x7COgw에서 동영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조선 후기 서인(西人) 영수이자 노론계 정신적 지주인 우암 송시열은 1689년 음력(이하 음력) 6월 3일 전북 정읍에서 죽었다. 숙종이 내린 사약을 마시고 죽었는데, 그가 약을 받은 자리에는 비각이 서 있다. 비각 속 비석 이름은 ‘우암수명유허비(尤菴受命遺墟碑)’, 송시열이 왕명을 받든 자리를 알리는 비석이다. 비문은 훗날 노론 영수가 된 이의현이 1731년에 썼다. 세 번째 줄에 이런 글이 나온다. ‘흉악한 무리가 먼저 독이 묻은 손을 뻗쳤다(羣兇先逞毒手·군흉선령독수).’ 남인 세력이 송시열을 증오해 선수를 쳐서 죽음으로 몰았다는 뜻이다.
충북 괴산에는 송시열 무덤이 있다. 원래는 경기도 수원에 있었는데 풍수가 사나워 1757년 10월에 이리로 이장했다.(1757년 8월 10일, 10월 2일 ‘영조실록’) 묘 아래 비각 속에는 1779년 만든 송시열 신도비가 서 있다. 정조가 직접 지은 비문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고자 효종대왕 최측근(帷幄·유악)으로서 책임에 힘썼다.’(정조, ‘홍재전서’ 15, 문정공송시열신도비명) 두 비문을 연결하면 송시열은 북벌(北伐)이라는 대의를 추구하는 당대 지도자 오른팔로 활동하다가 간신들에 의해 모함을 받고 억울하게 죽었다는 뜻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권력을 둘러싼 갈등 방식에는 공작과 조작이 끼어 있다. 이제 비석에 각인되지 않은 진실을 파헤쳐보자. 독이 든 손은 누가 먼저 뻗쳤고 북벌은 누가 추진했는지 알아보자.
서인의 권력욕과 술수
‘서인 무리들은 영광과 명성을 공경하고 사모해서 이를 위해 스스로 이용되는 것을 즐겁게 여겼다. 끓는 물이나 불 속에 들어가 죽더라도 피하지 않았다. 반면 남인은 그 기질이 구속받기를 싫어하고 빈틈이 많아 스스로 경계하는 일에 소홀하였다. 사람을 모아 당을 수립하려는 계책은 서인의 술수가 한 수 위였다.’(남하정, ‘동소만록’(1779), 원재린 역, 혜안, 2017, p303)
1623년 인조반정 이래 띄엄띄엄 몇십년을 제외하고 집권당이었던 세력은 서인이었다. 숙종 때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당된 뒤 ‘순혈 서인’인 노론은 망국 때까지 집권 여당이었다. 18세기 남인 남하정이 쓴 위 ‘동소만록’에는 남인이 권력 유지에 실패한 이유가 명쾌하게 적혀 있다. 한마디로 ‘계책’과 ‘권력욕’ 부족이었다. 남인은 권력을 즐기려고만 했을 뿐 유지하거나 확장할 계책을 세우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 계책에는 공작과 조작, 그리고 진영 논리도 포함돼 있다.
1682년 공작정치-남인 역모 사건
1682년 10월 21일 ‘남인이 장사 300명을 동원해 세 정승과 육판서는 물론 비변사 대신들까지 찍어죽이고 나라를 깨뜨리려는’ 어마어마한 역모 사건이 발각됐다. 내용은 구체적이었다. 남인 유생 허새(許璽)가 “주상은 덕이라고는 조금도 없고 어둡고 흐려 어질고 현명한 이로 왕을 바꾸면 태평성대가 온다”며 모의를 주도했고, 여기에 다른 남인 16명이 가세했다고 했다. 전국 주요 도시에 가짜 의금부 도사를 파견해 현지 수령들을 체포하고 궁궐에는 군사 300명을 매복시켜 때를 기다린다고 했다.(1682년 10월 21일 ‘숙종실록’)
한마디로 쿠데타였다. 강력한 왕권을 휘두르던 숙종은 분기탱천했다. 즉각 관련자들을 구속해 수사가 진행됐다. 역모를 꾀했다고 고발된 남인들은 고문을 동반한 수사 과정에서 죄를 자백하고 하나씩 처형되거나 고문 도중 죽었다. 그런데 처음 고발된 허새와 허영을 제외하고는 자백을 한 자가 한 명도 없었다. 무릎을 바위로 짓이기는 압슬형을 받고도 무죄라 주장하다 죽는 이까지 나왔다. 갈수록 수사가 미궁에 빠지더니 결국 그 모든 것이 서인인 우의정 김석주와 어영대장 김익훈이 남인 박멸을 목표로 조작한 사건임이 드러났다. 우의정 김석주가 김환이라는 서인을 “명을 따르지 않으면 목을 베겠다”고 위협해 남인에 침투시킨 뒤 공작해낸 역모였고(권상하, ‘한수재선생문집 부록’, 황강문답), 김석주를 대리해 일을 진행한 주모자가 역시 서인인 어영대장 김익훈이었다.
이 같은 내용을 자기 문집인 ‘한수재선생문집’에 기록한 ‘권상하’ 또한 서인 총수 송시열의 최측근 인사였으니 서인이 남인을 박멸하기 위해 조작해낸 사건임을 서인 수뇌부가 모두 알고 있었다는 말이다.
진영 논리-우리 편 처벌 불가
이에 서인 가운데 젊은 소장파가 수뇌부에 반기를 들었다. “역모를 사주한 김익훈은 본인이 역적이 된 것보다 심하다.”(이건창, ‘당의통략’, 이덕일 역, 자유문고, 2015, p199) 승지 조지겸은 “시비를 분명히 해야 한다”고 숙종에게 재수사를 요구했다.(1682년 11월 10일 ‘숙종실록’) 사헌부 지평 박태유와 유득일은 김석주에 대한 유배형을 요구했다. 골치가 아파진 숙종은 두 지평을 거제도와 진도로 발령내버렸다.(1683년 2월 2일 ‘숙종실록’)
그런 와중에 1682년 11월 고향 충청도 회덕에 있던 송시열이 숙종 명에 의해 한성으로 올라왔다. 조지겸이 여주로 가서 그를 마중했다. 역모 사건 전모를 들은 송시열이 이렇게 말했다. “(공작을 한 김익훈은) 비록 죽는다 해도 애석할 것이 없다.” 이 말을 전해들은 서인 소장파들이 ‘드디어 크게 기뻐하면서 어른의 소견도 자기네의 뜻과 같다’고 하였다.(권상하, 위 책, 같은 글)
이듬해 1월 서울에 도착한 송시열에게 김익훈 가족이 찾아가 곡절을 호소했다. 1월 19일 아침, 숙종이 주재한 회의에서 송시열이 입을 열었다. “김익훈은 내 스승 김장생의 손자다. 스승에 대한 도리로서 내가 죄인이다.”(1683년 1월 19일 ‘숙종실록’)
추상 같은 정의(正義)를 기대하던 소장파에게 날벼락이 떨어진 것이다. 놀라서 찾아간 제자 김간에게 송시열이 재차 이렇게 확인했다. “김익훈은 스승 문중의 자제이니 구제하지 않을 수 없다. 진실로 그가 죽음에 이르게 되면 나는 마땅히 나의 거취(去就)를 내놓고 싸워서 살리겠다(師門子弟 不可不救 苟至於死則吾當以去就爭之·사문자제 불가불구 구지어사 즉오당이거취쟁지).”(송시열, ‘송자대전’ 부록 15 ‘김간(金榦)의 기록’)
‘원칙’과 ‘대의’를 주장하던 송시열 입에서 진영 논리가 튀어나오자, 젊은 서인들이 등을 돌렸다. 이들이 서인에서 분리된 소론(少論)이며, 소론을 배척하고 진영을 지킨 이들이 노론(老論)이다.
위선과 은폐의 정치
1689년 1월 10일 숙종이 희빈 장씨가 낳은 아들 이름을 짓겠다고 선언했다. 이 아이가 곧 세자가 되고 이어 숙종이 죽으면 왕이 될 것이다. 장희빈은 남인의 지지를 받는 여자였다. 그러니 그 아들이 왕이 되면 서인, 그중에서 노론에 불어닥칠 피바람은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2월 1일 노론 지도자 송시열이 집안사람을 통해 아들 명호(名號) 반대 상소를 숙종에게 올렸다. 숙종이 말했다. “송시열 뜻이 이렇다면 그 문하 제자들이 잇달아 일어나게 될 것이고 그러면 소론인 윤증 제자들과 또 싸움이 벌어지리라.”(1689년 2월 1일 ‘숙종실록’) 그날 밤 숙종은 노론 정승들을 파직하고 빈자리를 남인으로 채웠다. ‘기사환국(己巳換局)’이다. 송시열은 벼슬과 품계를 박탈당하고 제주도로 유배됐다.
장희빈과 아들 명호를 반대한 사람 가운데 소론 박태보가 있었다. 박태보는 법전에 없는 고문까지 다 당한 뒤 전남 진도로 유배를 떠나다 서울 노량진에서 죽었다. 그리고 숙종은 남인 정권 요청에 유배 중인 송시열을 서울로 재소환했다. 귀경 도중 소식을 들은 송시열은 ‘눈물을 흘리며 소식(素食·죽은 이에 대한 예로 육식을 금하는 것)을 하고 자손에게 박태보 이름을 부르지 말라고 하였다.’(1689년 5월 4일 ‘숙종실록’)
그런데 ‘연려실기술’은 소론 나양좌가 쓴 ‘명촌잡록(明村雜錄)’을 인용해 그 뒷이야기를 이렇게 기록했다. ‘송시열이 손자에게 “박태보와 관련된 문자는 모두 불에 넣으라” 하였다.’(이긍익, ‘연려실기술’ 35, 숙종조고사본말, 원자의 명호를 정하다) ‘송시열이 앙숙이었던 윤선거의 외손자 박태보를 헐뜯고 다녔는데 급히 그 글들을 태워버리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앞과 뒤가 다른 위선은 물론 그 위선을 덮으려는 은폐까지 사료(史料)에는 다 기록돼 있다.
북벌의 허구와 독 묻은 손
1659년 3월 11일 즉위 11년차 효종이 송시열과 독대했다. 사관도 없었고 내시도 없었다. 대화 내용은 훗날 송시열이 ‘악대설화(幄對說話)’라는 제목으로 공개한 글에 적혀 있다.
“나는 포병(砲兵) 10만을 길러 청나라 산해관(山海關)으로 쳐들어갈 계획이다.”(효종) “국가가 망하게 된다면 어찌하시렵니까?”(송시열) 효종이 또 물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급선무인가?” 송시열은 군자금 모금 방법과 군사 모집 방법 따위를 자세하게 답한 뒤 이렇게 덧붙였다. “이 모든 것은 기강을 먼저 세워야 시행할 수 있는데, 기강은 전하가 사심(私心)을 없애야 세울 수 있나이다.”(송시열, ‘송자대전습유’ 7, ‘악대설화’)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봤자 마음공부가 돼 있지 않으면 헛일이라는 말이었다. 송시열은 “북벌보다는 선비들 습관을 바로잡는 일이 급선무”라고 덧붙이기까지 했으니, 이는 북벌 계획 동참이 아닌 실질적인 거부에 불과했다. 독대 한 달 뒤 효종이 급서했다.
16년 뒤인 1675년 남인에 의해 수세에 몰렸을 때 송시열은 본인이 작성한 대화록을 전격 공개했다. 이는 훗날 ‘효종대왕-송시열’ 듀엣의 북벌 대계로 확대포장됐다. 노론을 등에 업고 왕이 된 정조는 송시열을 북벌론 주도자로 포장해 비문을 쓰고(1779년) 1787년에는 송시열 문집인 ‘송자대전’도 편찬했다.
제주로 송시열을 쫓아보낸 남인은 “송시열 나이가 80이 넘었으니 굳이 국문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숙종은 남인들 요구를 수용해 “의금부도사가 송시열을 만나는 그 자리에서 사약을 내리라”고 명했다. 1689년 6월 3일 상경 중인 송시열이 정읍을 지날 무렵 조정에서 보낸 의금부도사가 눈앞에 나타났다. 송시열은 사약을 받았다. 42년 뒤 그 제자 이의현은 그 자리에 비석을 세우며 ‘흉악한 무리가 독 묻은 손을 먼저 뻗쳤다’라고 기록했다. 이상 위선과 조작과 공작이 난무했던 17세기 피비린내 가득한 정치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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