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에서] ‘나쁜 원저’가 닥쳐온다
일본 언론에 ‘나쁜 엔저’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하고 있다. 달러 대비 엔화 값이 24년 만에 최저 수준이다. 이번 엔저가 불길하다는 일본인이 많다. 과거에는 엔화 가치가 하락하면 한편에서 웃었다. 수출 가격 경쟁력이 커져 실적이 호전될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엔저가 나타나면 닛케이지수가 오르곤 했다.
올해는 영 다르다. 일본 경제동우회가 경영자 회원들을 대상으로 설문을 돌려보니 엔저가 일본 경제에 마이너스라는 응답이 73.7%로, 플러스가 된다는 응답(20.1%)의 3배가 넘었다. 결정적인 이유는 도요타를 중심으로 주력 기업들이 대거 생산 시설을 해외로 옮겼기 때문이다. 이제는 ‘엔저=수출 호조’라는 등식이 성립하지 않는다. 미즈호은행은 “엔저의 유리한 점은 활용하기 어렵게 됐고, 일본인들의 구매력이 저하돼 경기를 냉각시키는 불리한 점은 뚜렷해졌다”고 했다.
비슷한 현상이 우리에게도 슬슬 나타나고 있다. 원화 값어치가 올 들어 달러 대비 9% 하락했는데, 수출에 유리하다는 들뜬 전망이 예전처럼 들리지 않는다. 생산 시설의 해외 이전은 우리도 겪고 있다. 전국경제인연합회에 따르면, 2020년 기준 우리 기업의 해외 법인은 7만8640개이며 그중 38%가 2011년 이후 만들어졌다. 매출 상위 100대 기업은 최근 5년 사이 연평균으로 국내 매출은 2.8%씩, 해외 매출은 5.6%씩 증가했다. 특히, 지난해부터 100대 기업은 해외 매출이 국내 매출보다 많아졌다.
이쯤이니 ‘나쁜 원저’를 걱정해야 한다. 1990년대 외환 위기 직후 우리는 원화 값 하락을 지렛대 삼아 수출을 급격히 늘려 구제금융에서 벗어났다. 이런 환율을 활용한 위기 극복 방식은 이제 통하기 어렵다. 이런 환경에서 미국·유럽 대 중국·러시아가 대립하는 탈세계화로 기업 활동에 안보가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는 걸 유심히 봐야 한다. 벌써 선진국들은 해외 생산 시설을 내국으로 끌어오는 온쇼어링과 우방국으로 옮기는 프렌드쇼어링으로 기민하게 움직이고 있다. 생산 시설의 이전이나 신규 투자를 결정할 때 기업들은 경영 활동에 제약이 없는지는 물론이고, 안보상 위험 여부를 깊게 살피게 됐다.
정부는 규제 개혁을 통해 온쇼어링으로 국내 투자를 늘리는 전략을 최우선으로 삼아야 한다. 그래야 원화가 약세를 보여도 기회가 생긴다. 그러나 모든 기업의 국내 복귀나 무조건적인 국내 투자 유도는 불가능하다. 차선책이라면 확실한 우방국에 분산 투자하는 것이다. 그러면 원화 약세는 활용하기 어렵더라도 글로벌 공급망이 마비될 때 피해는 줄일 수 있다. 우방은 넓고 굳건해야 한다. ‘나쁜 원저’ 시대를 대비해 기업 활동의 제약 요인은 없애고 동맹국과 울타리는 튼튼하게 치는 ‘투 트랙’ 전략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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