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식의 메타버스 사피엔스] [6] 22세기를 위한 정의론
어쩌면 1만2000년 전 모든 문제가 시작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가족 단위로 사냥과 채집을 하던 인류에게 ‘정의’라는 단어는 무의미했을 것이다. 하지만 정착해 농사를 짓기 시작하며 이방인들과 공동체를 유지해야 했던 인류는 본질적 문제를 하나 발견한다. 바로 능력과 선호도가 서로 다르다는 사실이었다. 공동체 생산물이 능력과 노력에만 따라 나눠진다면, 빈부 격차와 사회 불평등이 발생한다. 반대로 능력과 노력과는 상관없이 모두에게 동일한 결과물을 배분한다면? 노력한 개인의 자유가 무시된다.
같은 사람들이 다른 대우를 받는 건 정의롭지 않지만, 반대로 서로 다른 사람들이 같은 대우를 받는 것 역시 정의롭지 않다고 이미 2500년 전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하지 않았던가. 자유는 불평등을 만들어내지만, 평등은 개인의 자유를 억압한다. 두 가치관의 합의는 과연 가능할까?
20세기에 가장 영향력 있는 정의론을 제시한 하버드 대학의 존 롤스는 사회 기본 가치는 평등이어야 하나, 불평등을 통해 사회 약자들의 상황을 개선할 수 있다면 조건적 불평등 역시 허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롤스와 같은 대학에서 활동하던 자유론자 로버트 노직 교수는 자유와 평등은 본질적으로 합의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자유와 평등에 대한 기본 정의조차도 서로 다르기에 공동체 다수가 결정한 모든 체제는 개인의 자유를 억압한다는 말이다. 덕분에 개개인의 능력과 선호도에 따라 각자가 자신만의 사회 운영 체제를 만들 수 있는 사회만이 오로지 정의로운 사회라고 노직은 결론지었다.
그렇지만 어떻게 5000만 한국인이 5000만 가지 사회 운영 체제를 가질 수 있다는 말일까? 아날로그 현실에서는 당연히 불가능한 생각이겠다. 하지만 모든 것을 바꾸고 창조해낼 수 있다는 메타버스에서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의 평등이 본질적으로 타협할 수 없는 아날로그 현실을 떠난 22세기 인류는 어쩌면 노직이 꿈꾸던 새로운 개념의 정의론을 실천하며 자신만의 디지털 현실에서 살게 될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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