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항녕의 조선

“네 죄를 네가 알렸다” 호통친 변학도, 그가 몰랐던 것

bindol 2022. 1. 7. 04:43

“네 죄를 네가 알렸다” 호통친 변학도, 그가 몰랐던 것

중앙일보

입력 2022.01.07 00:31

형벌, 법치와 문치 사이

조선 후기 화가 김윤보의 ‘형정도첩(刑政圖帖)’ 중 하나. 당시 죄인을 다루는 모습을 그렸다. [중앙포토]

“네 죄를 네가 알렸다!”

사또 변학도는 수청을 거부한 춘향이에게 근엄하게 꾸짖는다. 수청을 거부했다고 매를 치라는 변 사또의 말은 얼마나 공허한가. 자신의 성적 욕구를 법적 강제력으로 변환시킨 허위의식 때문에 폭넓은 풍자의 여지를 남겨주었다. 이 말이 딱히 전거(典據)가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지만,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말씨였다. 그리고 이 말씨는 민사(民事)보다 형사(刑事) 사건에서 발견됐다. 이제 형률과 정치사상 두 측면에서 이 말의 함의를 살펴보겠는데, 어디에 저 말이 놓이느냐에 따라 의미가 사뭇 달라진다.

백성의 범죄는 결국 임금의 책임
훌륭한 정치는 죄가 없게 하는 것

형벌 위주 법가사상 경계한 조선
강압적 통치는 자기 죄 모르는 꼴

자백을 범죄의 강력 증거로 삼아
죄인 몸에 형벌의 흔적 남기기도

중대 사건 수사·심문하는 추국청

임권택 감독의 ‘춘향뎐’에서 춘향이 신문을 당하는 장면. [사진 한국영상자료원]

조선시대 형사 사범에 대한 심문은 질문 항목인 문목(問目)으로 시작하고, 형 집행 근거는 죄인의 지만(遲晩)이었다. 지만은 죄를 당사자가 인정하는 일, 또는 그 문서다. 죄인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죄가 없다고 버티면서 지만을 하지 않으면  “네 죄를 네가 알고 있지 않느냐, 어서 지만해라”라고 다그치는 과정에서 등장하는 말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조선에서 중대 사건을 수사·심문하는 관청인 추국청(推鞫廳)에서 죄인으로 지목된 자의 자백은 범죄의 가장 확실한 증거가 됐다. 자백이 있으면 고발자는 다른 증거를 제시하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됐다. 자백한 범죄자야말로, 문서에 의해 구성된 범죄 내용에 대한 살아있는 진실이기 때문이다. 자백이 정형(正刑), 즉 정당성을 지닌 형벌의 필수 조건이 되는 것이다.

조선시대 죄인의 조사·판결서를 모은 『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 표지. [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처럼 자백이 각별히 유력한 증거가 되므로 자백을 얻기 위해서 모든 강제권을 사용하는 결과가 초래됐다. 철학자 푸코(M Foucault)의 말로 푼다면 “피고인의 신체는 자백을 행하는 한편, 고통을 당하기도 하는 신체가 된다.” 그래서 추국청의 심문은 신체에 고통을 주는 신문(訊問)이 된다.

추국청의 신문은 서울 남영동 고문실이나 관타나모 미군 기지에서 자행된 무절제한 근대적 고문과는 다르다. 서유럽 중세의 고문은 잔인한 것이었을지언정 야만적인 것은 아니었듯이, 조선시대 추국청도 야만적이진 않았다. 따라서 1589년(선조22) 기축옥사(己丑獄死)의 과도한 형장(刑杖)에 대한 비판을 비롯하여, 남형(濫刑)에 대한 문제 제기가 가능했다.

조선시대 죄인의 조사·판결서를 모은 『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 내용. 실록의 편찬 자료로 활용 됐다. [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도주의적 입장’에서 보자면 신문이 어떻게 자백을 받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는가. 증명을 해야지 어떻게 형장을 동원하는가, 하는 의문이 들 수 있다. 그런데 추국청에서는 범죄에 대한 ‘모든’ 증거가 수집됐을 때도 유죄가 되지 않았다. 유죄성은 죄인임을 인지할 수 있는 하나하나의 증거에 따라 단계적으로 구성됐다. 절반쯤 되는 증거가 있으면 절반만 유죄인 죄인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무죄추정의 원칙이 적용되지 않았다.

누군가 올린 고변서(告變書)에 역적모의를 꾸민 자로 지목됐을 경우, 그 모의를 증명할 수 있는 증거가 있으면 확정 판결나기 이전이라 하더라도 일단 ‘그만큼’ 죄가 있는 것이고 따라서 ‘신문=고문=형벌’을 받을 이유가 됐다. 이것이 정여립(鄭汝立) 사건과 임해군(臨海君) 옥사 때 고변과 함께 바로 추국청이 설치돼 심문·신문이 벌어진 이유였다.

미셸 푸코

추국청을 지배하는 힘은 ‘주권(主權)=왕권’이었다. 왕정(王政)에서 사법(司法)의 형률은 정치적인 행사였다. 바로 여기에 “네 죄를 네가 알렸다!”라는 말의 또 다른 차원이 있다. 푸코는 형벌에는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 아니라, 왕의 최종 결정이라는 군주의 몫과 본질적인 불균형과 우월성을 확인하는 의식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이를 넘어서는 주제가 있는데, 교화와 형률, 문치와 법치, 왕도와 패도라는 정치사상사의 핵심 주제와 연관돼 있다.

가르치지 않고 죽이는 건 ‘학정’

전주대 한국고전학연구소의 번역본 90권 세트. [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이렇게 질문해보자. 만일 죄인이 자기 죄를 스스로 알지 못한다면 어찌 해야 할까. 『논어』에서는 “가르치지 않고 죽이는 것을 학정(虐政)이라고 한다”고 했다. 이를 받아 맹자는 “백성들이 안정된 생업이 없으면 방탕하고 편벽되며 간사하고 사치에 빠지는 등 못하는 짓이 없게 된다. 이러다 죄를 지으면 바로 형벌을 적용하니, 이는 백성들을 대상으로 그물질을 하는 것이다”라고 풀었다. 그물질은 어진 사람이나 현군(賢君)이 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떤 일이 죄인지 알게 하는 것, 그것을 교화(敎化)라고 했다. 여기엔 백성을 대상화하는 지배계급의 시각이 들어 있다. 하지만 가르침의 맞은편에 배움이라는 주체적 자율적 실천이 있다는 점에서 교화는 상호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는 왕과 위정자가 ‘죄인의 죄’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생각으로 확장될 수 있다.

조선 초인 1432년(세종14) 신개(申槩)가 “가장 좋은 정치는 교화를 확립하는 것이고, 그 다음은 정치를 밝히는 것”이라고 하면서 ‘참혹한 형법’과 대비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한 사례를 보자.

송시열

1681년(숙종7) 남편을 죽인 사람이 있어 형을 집행했다. 이른바 강상(綱常)의 죄였다. 송시열은 이 사건을 두고 “옛날 문왕(文王)의 교화는 크고 깊어 멀리서도 영향을 입지 못하는 일이 없었는데, 지금 다른 곳도 아닌 서울에서 이런 죄인이 나왔다”라고 했다. 송시열은 이 사건을 통해 숙종에게 더욱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도록 요구하는 근거로 삼으려 했다.

형벌 받을 죄가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이 위정자, 특히 국왕의 책임이었다. 교화의 상호성을 확보하는 것이 넓은 의미의 정치였고, 인정(仁政)은 그 지향을 가리키는 표현이었던 것이다. 형벌을 통해 주권자인 왕의 권력이 행사되더라도, 그리하여 왕권이 과시되더라도 강제력의 정당성을 약화시켰던 것이다. 왜냐하면 교화에 실패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소송을 잘 판단하는 것보다 소송이 없는 편이 바람직하듯, 행형의 엄정성보다 중요한 것은 행형 요인이 발생하지 않는 것이다.

법치는 문치의 하위 개념

언뜻 법치(法治)는 문치(文治)에 가까운 듯 보일 수 있다. 『경국대전』 『대명률직해』 등에서 보듯이 법치는 제도와 규정에 따른 지배라는 점에서 문치와 겹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아시아 법가(法家)의 법치는 원칙적으로 형벌을 다루는 형정(刑政)을 의미했다. 법을 통한 인민의 보호보다, 인민을 통제하거나 황제(왕)를 위시한 국가권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기능한 정치사상이었다.

이런 점에서 영화 ‘배심원들’(2019)에서 “법은 사람을 처벌하지 않기 위해 있는 것이다”라고 했듯이, 근대의 법치가 역사적으로 군주나 귀족의 자의적 권력 행사에서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 마련된 장치의 성격을 띠었던 것과 대비된다. 근대의 법치는 인치(人治)의 상대어에 가깝다.

이에 비해 조선의 법치는 문치와 예치의 반대편에 서 있던 것 같다. 조선의 형정은 법가에 대한 경계 때문에 설사 형정이 필요불가결하더라도 예악(禮樂)과 교육을 기초로 하는 복합적 정치 행위의 일부 또는 하위 개념으로 형벌의 자리를 두었다. 법치가 일부 문치나 예치(禮治)와 겹치는 부분이 있다고 해도, 그것만으로 형정이 온전한 정당성을 얻기는 어려웠다. 문치와 예치가 지닌 자발성과 멀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자기가 살고 있는 세상과 정치를 스스로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자율성이 생길 것이다. 자율성 없이 평화나 안정이 가당키나 하겠는가. 문제는 강제와 억압으로 다스리려고 했던 역사상의 위정자들, 현재의 정치가들이 자기 죄를 스스로 모른다는 사실이다. 『춘향전』의 변학도가 그랬듯이.

법치로만 민심을 얻을 수 있을까
개천에서 용 나는 시절을 보여주든 금수저 대물림 수단의 구현이든 다수 정당의 대선 후보 둘이 정치인과 검찰총장이라는 중요한 차이가 있지만, 모두 법조 출신이라는 건 흥미롭다. 앞서 우리는 두 명의 변호사 출신 대통령을 선출한 경험이 있다. 1980년대 군부독재가 끝나고 ‘법치주의’가 자리를 잡은 징표로 보이기도 한다.

199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시민들의 반부패 운동을 비롯한 정치개혁 노력이 성공을 거두면서 사회는 점점 투명해졌다. 그런데 자발적 교화 과정을 거치기도 전에 드러난 불의나 비법(非法)이 고소·고발되는 사례가 늘어났다. 그 결과 각 사회의 자율 역량이 강화되기도 전에 검찰 등 사법 권력이 비대해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70년대 군부에 기생했던 공안 검찰 대신 특수부 검찰이 견제받지 않는 권력집단이 됐다.

검찰개혁 운운하는 게 아니다.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형정을 전면화해서 민심을 얻거나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데 성공한 경우가 없다는 점을 걱정할 뿐이다. 법치의 주요 요건인 형정은 그만큼 취약한 비전이다.

 
오항녕 전주대 사학과(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