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비 걸릴 인사를 지명한 것도
시키면 시키는 대로 나온 것도
인사청문회 파행을 자초한 셈
안 맞는 자리는 알아서 사양해야
새 장관 후보자들에 대한 국회 인사청문회가 또 난항이다. 야당이 보고서 채택을 거부하고 특정 후보자의 사퇴를 촉구하기에 이르렀다. 과거에도 순탄하게 진행됐던 기억은 별로 없다. 청문회는 영어로 히어링(hearing)이지만 대개 청문위원들의 공격과 추궁이 앞선다. 후보자의 정책소신을 듣는 분위기가 아니다. 여야 정치공방의 장으로 변질된 지 오래다.
제도적 한계나 정치관행 탓으로만 돌릴 일이 아니다. 시비가 붙을 법한 인사를 굳이 낙점하는 인사권자의 무신경, 그 앞에서 멈추는 인사검증의 침묵, 시키면 시키는 대로 나서는 당사자의 대범함…. 이런 게 복합적으로 작용해 풍파를 일으켰다고 봐야 한다. 이 정부에서만 그런 게 아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도 많았다.
국회의원이니 청문회를 쉽게 통과할 것이라는 발상은 느슨한 기대일 뿐이다. 결코 합리적 판단이 아니다. 정당들이 국회의원 선거에 내보낼 사람을 어떻게 고르나. 자질이나 능력을 고려해 공천했다지만 실제론 당선 가능성이 더 중요하다. 그 기준으로 선정됐다면 국회의원으로서, 장관으로서 역량을 지녔을 보장이 없다. 그래서 국회의원을 장관으로 고를 때 더 조심해야 한다.
사람의 자질이나 역량은 극소수의 특출한 경우가 아니면 제한이 있는 법이다. 고도로 전문화된 사회에서 이것도 잘하고, 저것도 잘하긴 어렵다. 예전엔 만기총람형 거물 정치가가 있었지만 지금은 온통 조무래기뿐이라고 탄식하는 분도 있다. 전문화되고 분업화된 사회에선 어쩌면 당연한 현상이다. 또 그게 안전할 수 있다.
그 연장선에서 국회에 다양한 직능대표가 필요하다는 데 이의를 달 수 없다. 하지만 그들이 의원으로서 유능한지를 따지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다. 성공한 법조인·의사·약사·사회운동가·언론인 등이 반드시 유능한 정치인이 되는 건 아니다.
우리 주위에선 활약 공간을 이동하다 추락한 사례를 수없이 찾을 수 있다. 시민운동가로는 유능했다가 행정가가 된 순간 무능해진 분도 있고, 군인으로선 명성을 떨쳤으나 정치인으론 낙제점을 받은 분도 적잖다. 청와대에 진입한 학자들에게도 그런 경향은 농후하다. 저명한 경제학 교수가 현실과 동떨어진 정책으로 문제를 일으키질 않나, 정의롭게 보이던 법학 교수는 인사검증 업무에서 논란을 부르질 않나. 선량한 학자 특유의 예정조화설이 행정 일선의 리얼리즘 앞에선 통하지 않는 모양이다.
미국의 사회학자 로런스 피터는 사회 전반의 무능화를 필연적이고 보편적인 현상으로 파악했다. 어느 조직에서나 구성원은 역량의 한계점까지 승진한 뒤 무능한 상태로 남는다는 논리다. 유명한 ‘피터의 법칙’이다. 100의 능력을 지닌 사람을 예로 들어 보자. 필요역량 50, 60 정도의 자리에 있을 때엔 매우 유능해 다음 단계로 승진한다. 능력에 꽉 차는 자리까지 무난히 오른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110의 능력이 필요한 위치에 가는 순간 뭔가 모자란 사람으로 돌변한다. 이때부터 이런저런 실책이 나온다. 이른바 종점도달증후군이다.
게다가 무능한 상사는 무능한 부하를 승진시키는 성향이 있다. 무능이 무능을 부르는 악순환(무능 스파이럴)이 작동한다. 그 탓에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의 역량종점에 도달해 무능한 상태로 눌러앉는 이가 많아진다. 무능의 축적이다. 이들의 비율과 그 조직의 효율은 반비례할 수밖에 없다. 이념·체제·분야와 무관하게 나타나는 계층조직의 병리현상이라고 한다. 이게 우리 사회에도 일어나고 있다고 상상해 보면 으스스해진다.
무능도 병이다. 그것도 난치병이다. 특효약이 없다. 각자 자신의 역량에 맞지 않는 자리는 알아서 피하는 수밖에 없다. 불러도 사양해야 한다. 치열한 자기성찰이 있어야 가능하다. 쉽지 않은 일이다. 특히 몇 년 굶은 패거리들이 무슨 잔칫상에라도 올라탈 듯한 분위기에선 도저히 기대하기 어렵다. 앞으로도 한때 유능해 보였으나 이젠 무능해진 분들이 여기저기에서 계속 등장할 듯하다.
남윤호 도쿄 총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