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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남북] “왜 싸우는지 모르면 지는 거야”

bindol 2022. 7. 21. 05:39

[동서남북] “왜 싸우는지 모르면 지는 거야”

자유민주주의 옳았다는 건
한국 현대사가 증명했는데
교과서에선 좌파 사관이 득세
강제 북송 사건 일어나는 이유

입력 2022.07.21 03:00
 
 
 
 
 
영화 '고지전'에서 6.25 전쟁 초기 북한군 장교(류승룡)가 국군 포로들에게 "니들이 전쟁에서 지는 이유는 왜 싸우는지 모르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장면. /쇼박스
 

“니(너희)들이 왜 전쟁에서 지는 줄 아니? 왜 도망치기 바쁜 줄 알아? 그건 왜 싸우는지를 모르기 때문이야.”

영화 ‘고지전’의 한 장면, 6·25 전쟁 초기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북한군 장교는 국군 포로들을 향해 오만한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말한다. 일방적 남침을 저지른 자들 입에서 나오는 말로는 어처구니없다고 여길 수도 있지만, ‘싸워야 하는 이유를 모르기 떄문에 밀리는 것’이라는 메시지만큼은 영화가 개봉한 지 11년이 지난 지금도 강렬하게 남는다.

1948년 대한민국이 수립된 지 불과 2년 뒤 상황이라면, 남과 북 어느 쪽의 체제가 옳은지 망설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74년이 지난 지금은 체제 경쟁이 의미가 없어졌을 정도로 그 답은 분명해졌다. 세계 10위의 경제 규모를 지닌 대한민국은 오래전 민주화를 이뤘으며 문화 강국으로도 떠오르는 반면, 세계 최빈국 수준의 북한은 여전히 폐쇄적인 독재국가다.

그렇다면 이제는 ‘왜 싸워야 하는지’가 명백해져야 할 때다. 대한민국 현대사는 광복 후 미국과 유엔의 도움으로 38선 이남에서만 불완전하게 정부가 수립됐으나, 헌법의 기초 위에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성장한 역사였다는 점에서 정통성을 확립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설사 이 말을 고장난 레코드판처럼 느낄 사람일지라도 인정해야 할 사실이다.

하지만 교육 현장에서 이 중요한 사실을 제대로 가르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지난 십 수년 동안, 역사 교과서를 둘러싼 진보·좌파와 보수·우파 사이에서 일어난 세 차례 ‘전쟁’에서 보수 쪽은 번번이 패했다. 세 번 모두 좌파 교과서로 인한 불안→보수 쪽의 교과서 집필→’극우 교과서’로 몰려 외면당하는 구도가 붕어빵 틀로 찍은 듯 같았다.

2008년 11월 17일 오후 서울 정부종합청사 정문 앞에서 반국가교육척결국민연합은 기자 회견을 열어 교육과학기술부의 왜곡 교과서 검정 취소와 직권 수정을 요구하고, 금성출판사 교과서 채택 학교 명단을 공개했다. /조선일보 DB

시작은 2003년 출간된 금성출판사의 고교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였다. 이 교과서는 ‘연합군의 승리로 광복이 이뤄진 것은 우리 민족이 원하는 방향으로 새 국가를 수립하는 데 장애가 됐다’는 등 이념 편향 서술이 곳곳에서 보였지만, 전교조가 장악한 교육 현장에서 널리 채택됐다. 이에 맞서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옹호하는 ‘대안 교과서 한국 근·현대사’를 2008년 민간에서 출판했으나 식민지 근대화론 등 반론 여지가 있는 시각을 드러내 ‘한국판 후소샤 교과서’라는 공격을 받았다.

 

2라운드는 2013년이었다. 보수 진영 학자들이 쓴 교학사 교과서가 검정을 통과했다. 그러나 오류와 오해를 살 수 있는 표현이 많았던 이 책은 ‘극우 교과서’라는 집중 공격을 받고 전국 고교 중 채택률이 0%에 가까운 결과를 낳았다.

악수(惡手)의 절정인 3라운드는 2015년 정부가 한국사 국정 교과서를 추진한 일이었다. 보수 성향 학자들마저도 ‘자유민주주의를 강조하기 위해 자유민주주의를 포기하려느냐’고 비판하는 가운데 명분을 잃어버린 국정 교과서는 ‘적폐’로 몰렸고 결국 폐기됐다.

2015년 11월 3일 새정치민주연합(더불어민주당의 전신) 의원들이 ‘역사 교과서 국정화 철회를 위한 규탄대회’를 하는 모습. photo 뉴시스

세 번 모두 ‘좌편향’을 단기간에 걷어내려는 조급함이 초래한 실패였다. 그러나 2013년 교육부가 검인정 교과서들에 829건을 수정 권고하고, 이후 수정을 거부하거나 불충분하게 고친 41건에 수정 명령을 한 것은 ‘현행 법규와 교과서의 집필 기준 내에서 좌편향 문제를 상당히 합리적으로 고친 것’이란 평가를 받았다.

지금 교육부는 7년 만에 교육과정을 바꾸는 ‘2022년 개정 교육과정’을 준비하고 있다. 2025년부터 고등학교에 적용하는 교육과정이지만, 역사 교과서 집필 기준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점이 있다. ‘이 체제가 옳은 이유’를 분명히 알지 못한다면, 서해 공무원 피살 사건과 북한 어민 강제 북송 사건 같은 일은 언제고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