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남북] 미 정치권의 초당적 반도체 살리기
‘중국의 부상’이라는 위기 앞에
파격적 반도체법 통과시킨 美
국가적 의지로 경쟁력 회복 추진
글로벌 반도체 지형 뒤흔들 수도
대만 TSMC를 세계 1위 파운드리(위탁생산) 기업으로 키운 창업자 모리스 창은 직설적이기로 유명하다. 사상 첫 대규모 해외 공장을 미 애리조나에 짓기로 한 후인 작년 4월 그는 미국에 쓸 만한 인재가 없어 힘들다고 토로했다. 한 대만 언론사 주최 포럼에서 창은 “애리조나의 값싼 전기와 토지는 좋지만 정작 경쟁력 있는 기술자와 인력을 구할 수 없어 어려움이 크다”며 “지난 수십 년간 미국에선 제조업 일자리가 인기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창의 말대로 미 반도체 업계는 1990년 이후 30여 년째 신규 인력 공급이 제자리걸음 중이다. 반도체 제조업이 쇠락하면서 대부분 인력은 설계 분야에 몰렸다. 그나마 괜찮은 인재들은 애플, 구글 같은 실리콘밸리 기업들이 싹쓸이를 해왔다. 최근 미국의 사립 명문 퍼듀대가 미 대학 중 처음으로 반도체 학위 과정을 개설하고 반도체 기업 인텔이 오하이오주 각 대학들과 함께 반도체 제조 혁신 과정을 추진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콧대 높던 미국 기업과 대학들이 한국과 대만의 반도체 인재 양성 시스템을 벤치마킹하고 나설 만큼 절박한 것이다.
대만·한국에 밀려 반도체 제조 2류국으로 전락한 미국이 권토중래(捲土重來)에 나섰다. 미 상원이 지난 27일(현지 시각) ‘반도체 과학법’을 통과시키며 반도체 종주국으로서 잃어버린 자존심 회복을 선언한 것이다. 법안은 미국에 반도체 제조 시설을 새로 짓거나 확장하는 기업에 527억달러(68조7000억원)를 지원하고, 10년간 240억달러(28조원)에 이르는 세제 혜택을 제공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첨단 분야에서 중국에 대한 우위를 지킬 수 있도록 과학 연구와 인재 육성에 2000억달러(267조원)를 투입한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미국은 반도체를 만들었다. 이제 그걸 갖고 와야 한다”고 외쳤던 조 바이든 미 대통령으로선 자신의 말을 실현할 막강한 정책 수단을 손에 쥔 것이다.
“수십 년래 가장 광범위하고 강력한 산업정책 법안”이라는 평가와 함께 눈길을 끄는 건 예상을 뛰어넘은 표결 결과다. 미 상원은 민주당 48석, 무소속 2석, 공화당 50석으로 야당이 다수당이다. 더구나 공화당은 법안에 대해 “거대 반도체 기업들까지 지원하는 건 예산 낭비이자 오는 11월 중간선거를 겨냥한 정치적 행위”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결과는 찬성 64 대 반대 33의 압도적 가결이었다. 공화당 의원이 17명이나 찬성표를 던진 것이다. 미 하원 표결이 남았지만 민주당이 다수여서 법안 통과는 확정적이다.
미 뉴욕타임스는 “이번 법안은 경제 법안이자 안보 법안”이라며 “미국 정치권이 ‘중국의 위협’이라는 국가적 위기 앞에서 초당적으로 뭉친 결과”라고 풀이했다. 중국과 인접한 대만·한국에 반도체 수요의 거의 전부를 의존하고 중국이 핵심 반도체용 원료·소재 공급을 좌우하는 현실에서 미 정치권이 눈앞의 이해득실을 제쳐두고 의기 투합했다는 것이다.
한국 기업이 짓는 미국 반도체 공장에 대해 예산 지원과 세금 감면이 늘어난다면 나쁠 이유는 없다. 그러나 미국의 각성이 우리에게 마냥 호재일 수만은 없다는 생각이다. 반도체 원천 기술과 압도적인 설계 능력, 반도체 패권을 되찾겠다는 초당적 의지까지 갖춘 미국이라면 장기적으로 글로벌 반도체 제조업 지형을 뒤흔들 가능성이 크다. 메모리 반도체 외줄 타기 중인 한국이 파운드리 1위 대만, 최대 내수 시장을 가진 중국에 맞설 돌파구를 찾지 못한다면, 한국은 어느 순간 미국이라는 새로운 경쟁자까지 맞닥뜨려야 할지도 모른다. 미국과 한국이 지금은 서로를 ‘반도체 동맹’이라고 부르지만 실력 없는 파트너는 언제든 밀려나는 게 기술 전장에선 철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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