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석의 100년 산책

대한민국이 지향하는 정의란 어떤 것인가

bindol 2022. 7. 22. 03:48

대한민국이 지향하는 정의란 어떤 것인가

중앙일보

입력 2022.07.22 00:32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해방 직후니까, 프랑스와 이탈리아에 국제공산주의 사상이 팽창했을 때였다. 프랑스의 한 철학자가, 공산주의자와 미국의 자유주의 사상을 비교하면서 남긴 얘기를 읽었다. 어떤 사람이 캐딜락 자동차를 몰고 파리 거리를 달리면 프랑스의 젊은이들은 “저런 건방진 놈이 있나. 당장 붙잡아 처벌하고 자동차를 몰수하라”고 한다.

그런데 미국 뉴욕 거리를 어떤 사람이 캐딜락을 타고 지나가면 흑인 젊은이들도 “야! 근사한데, 나도 한 번 저런 차를 가져보았으면 좋겠다”고 부러워한다는 것이다. 공산주의자는 평등을 위한 수단을 정의라고 생각하지만 미국인은 더 많은 자유를 모두가 누릴 수 있어 정의의 가치가 귀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미국대학 추천서엔 장·단점 기재
사실과 어긋나면 사회 신뢰 잃어

“내가 하면 정의, 너는 불의” 만연
이념주의 정치는 민주주의 훼손

소수의 정의로 공익 해치면 안돼
정의의 궁극적 가치는 인간적 삶

J F 케네디와 R 케네디 형제

그림=김지윤 기자

 

또 하나의 예, 미국의 J F 케네디가 40대 젊은 대통령의 기록을 세웠다. 내각을 구성할 때 30대의 친동생 R 케네디를 법무장관에 임명하면서 “너무 좋아하지 말라”고 얘기했다고 들었다. 그런데 어떤 미국인이나 야당 국회의원도 그 임명을 정의롭지 못하다든지 공평하지 못하다는 얘기를 하지 않는다. 케네디 형제의 인품과 사회적 공정성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동생이어서 형에게 쓴소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형제간이지만 공익을 위해서는 사사로운 이해관계가 없을 정도의 상식을 갖춘 형제로 믿어준 것이다.

하버드 대학에서 신입생을 선발할 때 있었던 일이다. 미국 전역에 하버드 졸업생들이 일하고 있는데, 알래스카주에는 하버드 출신이 없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알래스카주 출신 학생을 선발하자는 여론이 생겼다. 그 결과는 잘 모르겠다. 만일 하버드가 자기네 졸업생을 고려해 알래스카 출신 학생을 입학시켰다고 해서 미국인들은 불공정이라든지 학사 비리를 조사해야 한다는 여론을 일으키지 않는다. 사회 공익성을 위한 선택은 불의나 불평등이 아니라는 상식 때문이다.

미국 대학들이 자기 대학 출신을 교수로 채용하는 것을 꺼리는 것은 대학의 목적이 국가를 위한 인재를 사회로 진출시키는 데 있기 때문이다. 동문들이 대학을 운영하게 되면 동질사회로 굳어져 발전이 안 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 밑에는 정의를 공익을 위한 방법으로 인정하는 사회질서가 깔렸기 때문이다. 폐쇄적인 정의 관념보다 사회 공익을 위한 개방된 자유를 존중하는 사회질서의 다양성이다.

나 자신이 대학에 있을 때 겪은 고민이 있다. 졸업생이 취직을 원해 추천서를 부탁해 온다. 다른 대학 졸업생도 있으니까 좋게 써 달라는 기대를 갖고 온 것이다. 그때 나는 그 제자의 장점을 앞세우지만 단점은 쓰지 않는다. 나 때문에 낙방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나도 내 생각 안에 잘못이 깔렸다고는 인정하지 않는다. 그 학생이 믿음직스럽지 않은 때에는 나보다 학과장이나 학장의 공식적인 추천서를 대신하는 것이 좋겠다고 책임 회피를 위해 거절하는 때도 있다. 그런 습관이 나 자신의 인격을 스스로가 훼손한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런데 미국 교수들은 소견서나 추천서를 본인이나 상대기관에서 요청받으면 장단점을 정확히 기록하면서 선도할 수 있는 가능성 여부를 추가한다. 만일 거짓 과장이나 사실과 어긋나는 추천서를 썼다면 작성한 교수의 인격과 신뢰가 떨어지고 후에는 추천할 신의와 자격을 잃는다. 교수로서의 인품을 스스로 훼손하는 일은 자신과 사회를 위한 정의가 못 된다고 생각한다.

최근 우리 대학 사회가 비판을 받는 원인을 반성하게 된다. 교수들 자신이 자신과 때로는 제자들, 심하면 아들딸들의 장래까지 불행하게 만드는 실수를 범하곤 한다. 누가 사회정의를 병들게 하는가. 교육계에 몸담은 나 자신을 부끄럽게 반성하게 한다. 내가 나를 믿지 못하면 누가 나를 믿어 주겠는가.

지난 몇 해 동안 국가 통치권자를 포함한 우리 정치계의 정의 관념은 어떠했는가. 아직은 갈 길이 너무 멀다는 자책감을 떨칠 수 없다. 그러면서도 정의로운 국정을 선도해 가겠다는 정치 지도자들이 대부분이다. 나와 우리가 하는 일은 모두가 정의이고 상대방이나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은 언제나 불의라는 식의 사고방식과 가치관을 가진 지도자가 허다하다. 그런 사고방식을 잘못이라고 생각지 못하는 지도자가 대를 이어가는 후진 국가들이 우리 주변에 있을 뿐 아니라 우리 후대에도 만연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평등과 자유가 함께하는 휴머니즘

정의는 평등을 위한 수단 가치이며 정권이 권력으로 평등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이념주의 정치가가 있었다면 민주주의에 역행했기 때문에 심판을 받아야 한다. 정의는 공정성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믿는 지도자는 마라톤 경기의 출발선에는 누구나 참여할 수 있고, 골인선의 심판을 허위를 조작할 수 없다는 엄연한 규범은 지켜야 한다. 기회의 균등성과 결과의 공정한 평가는 사회생활의 기본가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정의관이 있다. 정의를 가장해 사회적 공익성을 훼손하거나 억제하는 평등 위주의 정의관은 정의의 가치를 파괴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공익성에는 두 가지 성역이 있다. 다른 사람의 인격이나 인생을 헐뜯거나 파국으로 몰아넣는 일이다. 그리고 소수집단의 정의관에 붙잡혀 다수인과 사회의 선한 질서를 해치는 행위다.

우리는 어떠했는가. 과거 이념정권의 강경파들은 권력으로 평등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질서파괴의 정의관을 갖고 있었다. 현 정부는 최소한 공정한 사회를 위한 정의의 책임을 지켜야 한다. 그것이 정의 사회 구축의 기초 작업이다. 그 후에 자유민주주의가 성숙하게 되면 정의는 공익을 위하고 자유와 공존할 수 있는 창조적 기여를 동반하는 자유 민주국가에 동참하게 된다. 정의의 궁극적인 가치는 인간적 삶의 가치를 위하기 때문이다.

민주국가의 큰 나무에는 정의로운 평등과 창의적 자유가 함께 열매를 맺어야 한다. 그런 나무를 우리는 휴머니즘(인간애)의 나무로 키워가는 것이다.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